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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1인 가구의 삶은 내 방 안에 세상을 들여놓는 연습

등록 2018-11-17 14:15수정 2018-11-17 14:48

[토요판] 이런, 홀로!?
1인분의 살림
1인분만큼만 장을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냉장고가 작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방에 사는 동안은, 이 냉장고가 정해준 식생활의 규모에 내가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1인분만큼만 장을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냉장고가 작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방에 사는 동안은, 이 냉장고가 정해준 식생활의 규모에 내가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퇴근 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채소와 과일 가게, 정육점, 반찬 가게가 조르르 붙어 있다. 저녁으로 먹을 재료들은 퇴근길에 이 가게들에 들러 조금씩 산다. 제일 자주 가는 곳은 과일집. 가게 앞을 지나는 걸음이 조금이라도 느려지면, 순식간에 사장님이 뛰어나와 “뭐 줄까, 언니” 하고 말을 붙인다. 처음 이 집을 기웃거릴 때 나는 매번 물건값을 묻는 끝에 “혹시”를 붙였다. 혹시 대파 한개도 살 수 있을까요? 혹시 사과 한알만 해도 될까요? 혹시 포도 한송이, 혹시 마늘 이만큼, 혹시 당근 한개…? 사장님 내외분께 ‘한개녀’나 ‘혹시녀’로 불려도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또 무얼 ‘혹시 한개만’ 사려고 했던 어느 날이었다. 사장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언니! 장사하는 데 안 되는 건 없어. 다 돼. 편하게 물어봐.”

아쉽게도 모든 사장님이 다 과일집 사장님 같지는 않다. 반찬 가게에서 “누가 반찬을 100g씩 팔아, 아가씨. 포장값도 안 나오게”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지금 사는 집에서 서너 블록 떨어진 곳에도 대형마트가 있지만, 잘 가지 않는다. 채소나 과일은 은근히 큰 단위로 포장되어 나와서, 열심히 챙겨 먹어도 소비 속도가 상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반면 소포장 채소는 대개 신선하지 않아, 하루만 지나도 짓무르고 상해서 손도 못 대고 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대안으로 찾은 것이 골목에 있는 가게들이었던 것이다. 혼자 살아도 대충 적당히 살 것이지 신수 고단한 일들을 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1인분만큼만 장을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냉장고가 작다. 더 큰 냉장고를 살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직사각형 방 안을 한참 둘러본 끝에 인정했다. 이 방에는 도무지, 이것보다 큰 냉장고를 놓을 자리가 없다. 그러니 이 방에 사는 동안은, 이 냉장고가 정해준 식생활의 규모에 내가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퇴근길, 골목길에서 1인분 장보기를 하며 나는 내 방 안에 세상을 들여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빠짐없이, 그러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뿌듯한 집맥 잔치를 위한 집안일 루틴

집에 오자마자 냉동실에 맥주와 보온병을 넣어놓는다. 혼자 집맥 잔치를 하기 위해서다. 주로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한다. 우리 동네는 일주일에 이 세 날, 청소업체가 재활용품을 수거해 간다. 그렇다. 집안일하기 좋은 날이다. 맥주가 얼기 전에 후다닥 집안일을 해치워야 한다.

일단 세탁이 제일 오래 걸리니 제일 먼저.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방 안에 나와 있는 물건들을 정돈한 뒤 청소기를 돌린다. 걸레질을 하기 전에 ‘돌돌이’ 테이프로 침구와 바닥의 머리카락을 제거한다. 쓰레기와 재활용품을 내놓고 온 다음은 욕실. 세면대와 타일을 수세미로 문지르고, 보일러가 온수를 데울 동안 나오는 달갑잖은 찬물로 헹궈낸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면 세탁이 끝난다. 드럼세탁기라 헹구는 솜씨가 시원찮다. ‘헹굼-탈수’ 코스를 다시 작동시킨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고 나면 세탁기 내부가 잘 마르도록, 고무 패킹에 고인 물기를 닦아내고 세제 투입구도 분리해 놓는다. 빨래는 있는 힘껏 탁탁 털어서 건조대에 널어놓는다. 나중에 개키기 편하게, 양말은 짝을 맞춰 집어놓는다.

집안일을 끝내야
집맥 잔치를 하도록
스스로 만든 살림 규칙

여덟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나는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를
데리고 살고 있다

매일 살림의 과정 반복하면서
그날 휘고 구부러진 마음들도
가만가만 토닥임 받는 기분

여기까지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자리잡은 평일 집안일 루틴. 이렇게 딱 한시간이 된다. 이제 방바닥은 반질반질하고, 빨래들은 얌전히 말라가고, 나뒹구는 택배 상자 없이 현관은 말끔하다.

쥐포는 약불에 느긋하게 뒤집어가며 가장자리가 바싹하게 굽는다. 계피를 친 마요네즈를 종지에 담아 쥐포 접시 한편에 얹는다. 계피가루를 살짝 뿌린 마요네즈를 찍으면 달고 비린 쥐포의 감칠맛이 배가된다. 냉동실에서 보온병과 맥주도 공손히 테이블로 모시고 나온다. 냉동실에 다녀와 쩡하니 시원해진 맥주를 보온병에 따라 마신다.

“도대체 퇴근하고 맥주 하나 먹기가 이렇게 힘들 일인지.”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집안일 루틴을 구경한 둘째 언니가 웃으며 불평을 했다. 그건 나에게 퇴근과 맥주가 전혀 별개이기 때문이다. 일한 보상은 월급으로 받는다. 그리고 맥주는 일하고 와서 집안일까지 해내는 외벌이 가장에게 주는 보상이다. ‘나님’ 만세! 이 조용한 저녁 시간의 진짜 안주는, 스스로 생활을 온전하게 건사하고 있다는 안심이다.

이 집맥 잔치의 끝은 테이블 정돈과 설거지. 피로와 취기가 겹쳐 좀 휘청휘청해도, 먹은 자리를 치우고, 설거지와 양치질을 하고 잔다. 하룻밤 미루어보았자, 어차피 이튿날 아침에 일어난 내가 할 일이다. 하지만 내일의 나는,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은 오늘의 즐거움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먹은 사람이 치운다는 동거의 기본 규칙은 나 혼자 사는 생활에도 적용된다. 여덟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나는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를 데리고 살고 있다.

간단하지만 완결되지 않는 것

어릴 때 만화로 읽은 <명심보감> 가운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남은 한 구절이 있다. “방 안에 혼자 앉아 있기를 탁 트인 사거리 지나듯이 하라.”(坐密室如通衢) 그렇다. 그러하다. 서울 도화동 주택가 한가운데 섬처럼 박힌 빌라 원룸에서 혼자 사는 일은 실로 그러하다. 혼자 빨래를 탁탁 털어 널고 있을 때 그렇다. 분리배출을 대충 하고 싶지만 꾹 참고 생수병에서 비닐 라벨을 벗겨낼 때도 그렇다. 이런 것쯤은 언제든 미루고 내팽개쳐도 아무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조용히 저 구절을 떠올린다.

한 사람분의 살림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열고, 닫는다. 밀고, 당긴다. 그러나 그걸 누군가에게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어렵다. 대충대충 건너뛸 수가 없다. 집안일을 미루고 쌓아놓는 것은 언제나 쉽다. 하루만 게으름을 피워도 집 안 곳곳에는 쓰고 난 물건이 너저분하게 쌓인다. 창틀은 닦아도 닦아도 늘 까만 먼지가 묻어 나온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거울은 뿌옇게 흐려진다. 살림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되돌리고 바로잡는 것을 끝없이 반복하는 일이다. 그 과정을 말없이 따라가면서, 매일 해 뜬 동안의 일들로 휘고 구부러진 마음들도 가만가만 쓸어가며 토닥임을 받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 이렇게 항상성 없는 살림을 혼자 꾸려나가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는 이유는, 결국 이 방 안에서의 삶에서 품은 온기가 바깥에서의 생활에도 스며들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아직까진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유주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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