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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짜장면 아빠, 단호박 엄마도 나이 드니 바뀌더라

등록 2018-10-21 10:31수정 2018-10-21 10:40

[토요판] 이런, 홀로!?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
서른살 생일, 무뚝뚝한 아빠에게서 온 축하 문자. 내 생애 받아볼 일 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의 생일 축하 문자를 나이가 계란 한판을 채우니 받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부모님과도 점점 친구가 되어간다. 게티이미지뱅크
서른살 생일, 무뚝뚝한 아빠에게서 온 축하 문자. 내 생애 받아볼 일 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의 생일 축하 문자를 나이가 계란 한판을 채우니 받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부모님과도 점점 친구가 되어간다. 게티이미지뱅크

“우리 딸∼ 축가축가(생일) 우리 딸.”

지난 5월. 봄의 설렘보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더 두려워지고, 생일쯤이야 쿨하게 야근으로 때울 수 있는 내 나이 서른. 서른살 생일을 두시간 남긴 밤 10시쯤 야근을 하던 내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아빠? 두 눈을 의심했지만 사실이었다. 보낸 이에는 ‘아빠’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문자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뒤엔 더더욱 내 두 눈을 의심했다. 생전 문자 한번 살갑게 보낸 적 없는 무뚝뚝한 아빠가 생일 축하 문자라니. 게다가 문자도 겨우 쓰는 아저씨가 오글거리게 딸 옆에 ‘물결표’(∼)까지 붙이다니. 게다가 설마 뭐 때문에 축하하는지도 모를까 봐 ‘축가축가’ 옆에 괄호를 열고 ‘생일’이라고까지 설명했다니. ‘티엠아이’(TMI, Too Much Information)도 이런 티엠아이가 없었다.

초저녁부터 동네 아저씨들과 소맥을 거하게 말아 먹고 취했거나, 회사 아저씨들과 막걸리를 거하게 마시고 취했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확신했다. 천성이 아빠를 닮아 무뚝뚝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딸내미는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다, 10분 만에 겨우 답장을 썼다. “아빠 나 야근 중이야. 근데 축가가 뭐ㅋㅋㅋㅋ 나 축가 불러주는 거야??” 지금 생각해도 이보다 더 살갑게 답장을 보낼 수는 없었을 거라 확신한다.

짜장면 같았던 아빠

아빠는 자상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지난 20년간 한결같았던 내 이상형은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 기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아빠였다. 무뚝뚝한 아빠 밑에서 자라면서 “난 죽어도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 안 할 거야”를 시전한 딸이 ‘자상한 사람’을 이상형으로 삼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울 터였다. 딸이 첫 생리를 한 날 케이크를 사 들고 퇴근했다는 누구네 아빠 이야기라든지, 딸이 학교에서 상을 받은 날 반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쐈다는 누구네 아빠 이야기는 나와는 다른 별에 사는 외계인들의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작문 최우수상을 받은 날, 나는 자랑이랍시고 거실 텔레비전 위에 상장을 떡하니 올려뒀다. 퇴근한 아빠는 야근하는 엄마를 대신해 상장을 보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오빠와 나를 동네 중국집에 데려갔다. 아빠가 주문을 했다. “짜장면 세개 주세요.” 수상자에게 메뉴 선택권은 없었다. 뭘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는진 모르겠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일년에 고작 서너번 치킨을 시켜 먹을 정도로 외식도 해본 적이 없는 집이었다. 내 시선은 자꾸만 옆자리에서 시킨 탕수육으로 향했지만, 혀에서 휘몰아쳤던 짜장면 면발도 초등학교 2학년 꼬맹이를 현혹하기엔 충분했다. 은은하게 혀를 감싸던 달큰한 짜장의 맛. 이제 와 생각해보면, 무뚝뚝한 아빠의 사랑 표현이란 바로 짜장면 맛이 아닐까 싶다.

단호박 같았던 엄마

엄마는 냉정하고도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맞벌이를 했던 탓에 엄마는 항상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자책감을 안고 살았고, 그 때문에 더욱더 오빠와 나를 엄격하게 대했던 것 같다. 내게 남아 있는 가장 어릴 적 기억은 바로 유치원에 처음 가던 날의 일이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며 봉고차에서 몸부림치며 우는 아이들 가운데 나도 끼어 있었는데, 아이를 안아 달래는 여느 엄마들과는 달리 우리 엄마는 가장 먼저 등을 돌려 집으로 향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 도도한 뒷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뇌리에 선연하다. 그 모습에 놀란 나는 그만 눈물을 꿀꺽 삼키고 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뚝뚝한 아빠에게서 30년 만에
생일 축하한다는 문자 받아
냉정했던 엄마도 갱년기 겪으며
숨겨왔던 감정 솔직하게 드러내

어른과 아이 아닌
어른과 어른의 관계로
반주하고 고민 나누며
부모님과 친구가 되어간다

‘너무 단호해서 단호박인 줄 알았던’ 엄마의 뒷모습을 그 뒤로도 몇번 더 봤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 놀이터에서 놀다 남자아이와 싸운 적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분에 못 이겨 씩씩대다 이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는데, 마침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지나가던 엄마와 눈이 딱 마주쳤다.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저 녀석에게 뭐라고 해주지 않을까’ 하는 알량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보고도 그대로 지나쳐 집으로 향했다. 냉정한 엄마의 뒷모습에 더더욱 서글퍼졌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어떻게 내가 울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갈 수가 있어?”라고 서럽게 묻는 내게 엄마가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같이 싸웠으면 아무리 남자애여도 이기려고 달려들어야지. 엄마가 너 대신 남자애한테 뭐라고 하는 순간 넌 확실하게 지는 거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땐 이해하지 못했다.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

요즘 부모님이 변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무뚝뚝한 아빠는 요즘 그 누구보다도 잘 삐지는 사람이 됐다. 주변 사람을 좀 힘들게 할 정도로 잘 삐진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퇴근하면 집 소파에서 곯아떨어지기만 했던 그 옛날의 30대 아버지는 이제 집에 없다. 뒤집어 생각하면 뒤늦게 예민한 감수성을 자랑하면서 그만큼 살가운 사람이 되기도 했다는 뜻이다. 내가 오랜만에 집에 가면 그렇게 좋아하고, 외식이라도 갈 참에는 먼저 팔짱을 끼기도 한다. ‘우리 딸 축가축가∼’ 내 생애 받아볼 일 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의 생일 축하 문자도 내 나이가 계란 한판을 채우니 받기 시작했다. 비록 술김에 문자를 보냈을 게 확실할지언정 말이다.

엄마도 변했다. 자식들에게만큼 자신에게도 엄격했던 우리 엄마는 5년 전부터 갱년기를 겪으면서 숨겨왔던 감정들을 폭발시키고 있다. 엄마는 내가 아기 때 덮고 자던 이불을 덮어쓰고 펑펑 울었고, 내게 전화해 “내 인생이 허무하다”는 얘기를 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모든 증상을 갱년기라는 한 낱말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오춘기’를 지난 뒤, 갱년기 ‘소강상태’를 겪는 요즘의 엄마는 마치 화력을 잃은 휴화산을 보는 느낌이다. “옷은 벗으면 춥고 입으면 더워.” “갑자기 짜증이 나다가도 조금 지나면 괜찮아져. 참으면 돼.” 갱년기의 대표적인 증상도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서술하신다. 마치 미칠 듯이 나대는 호르몬마저 컨트롤할 수 있게 된 수도승처럼 말이다.

나이가 계란 한판을 채우고 나도 변했다. 요즘 좀 부모님이 보고 싶어질 때가 많다. 대학에 입학하고 직장에 다니고, 10년째 자취를 하면서 조금 외로워졌기 때문일까. 1년에 두번, 명절 때만 가뭄에 콩 나듯 고향을 찾던 내가 올해만 벌써 여섯차례나 고향에 다녀왔다. 집에 간다고 해서 특별하게 하는 건 없다. 반주나 하면서 삶의 고충을 나누는 정도랄까. 남과는 다른 조금 특별한 사람들. 가족과 함께 나누는 ‘그런’ 느낌이 그리워서인지도 모르겠다.

나쁜 표현이 아니라, 같이 나이를 먹으면서 부모님이 좀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전에는 부모님과 나의 관계가 ‘어른-아이’의 관계였다면, 지금은 똑같이 이 거친 세상을 헤치며 살아가는 ‘어른-어른’이 된 느낌이다. 아직도 부모님 눈에 나는 ‘아이’ 같아 보일 테지만 말이다. 이제는 아빠 입맛에 맞게 소맥도 제대로 탈 줄 알고, 목욕탕에서 엄마 등을 밀어주면서 시집 욕도 찰지게 같이해주고, 갱년기에 좋다는 영양제를 대령하며 ‘엄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한다. 아무리 딸이라도 이제 ‘애어른’ 정도로는 봐주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짜장면과 단호박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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