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런, 홀로!?
실패해도 유쾌한 요가
실패해도 유쾌한 요가
고난도의 전갈자세. 이 자세를 성공하고 싶어 요가를 시작했지만 실패를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가 요가의 목적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굶고 운동했던 지난 시간들 전갈자세 성공하고 싶어
아슈탕가 요가 시작했지만
잘해도 아무도 칭찬 않고
못해도 나무랄 사람 없어 내 몸에 집중하는 과정 자체가
요가의 목적이자 수련 나는 수업시간에 순서를 몰라 다른 사람 모두가 오른쪽을 바라볼 때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책을 보고 순서부터 외우기 시작했다. 잘되지 않는 요가 자세(아사나)는 요가원에서 부끄럽지 않게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집에서 연습했다. 요가원에 가면 쉴 새 없이 양옆을 곁눈질해가며 내 속도가 너무 느리진 않은지, 내가 든 발 높이가 옆 사람보다 너무 낮지는 않을까 마음속에 늘 그날의 경쟁자를 두고 수업을 했다. 수업시간 내내 주변을 신경 쓰며 몸을 움직이다 보니 수업이 끝난 뒤 매트에 누우면 몸과 마음이 다 지쳐버린 느낌이었다. 아무도 칭찬하지 않았다. 어려운 아사나를 성공했다고 해서 요가 선생님께 칭찬받을 일도 아니었고, 반대로 못한다고 해서 나를 나무랄 사람도 없었다. 그렇지만 잘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근육을 쥐어짜고 고통 속에 요가를 하던 내가 요가 매트 위의 나 자신과 마주치게 된 건, 요가를 시작하고 석달이 더 지나서였다. 아슈탕가는 너무도 정직해서 안 되는 자세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일이 결코 없었다. 며칠만 쉬어도 옆 사람은 모르겠지만 아슈탕가는 단박에 눈치챘다. 옆 사람보다 더 잘하고 싶어서 힘을 힘껏 준다고 다리가 더 들어 올려지지도 않았고, 사람들마다 잘하는 자세가 다 달랐다. 수업시간 내내 긴장해서 온몸에 주던 힘을 빼고, 내가 부족한 부분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나는 코어 힘이 부족했고, 왼쪽 고관절이 오른쪽보다 비뚤어졌으며 새끼손가락을 타고 팔 바깥, 그리고 어깨로 이어지는 근육이 많이 약하다는 것을 누가 지적해주지 않아도 혼자서 매트 위의 나와 마주하면서 느꼈다. 처음에는 아사나로 향하는 과정에서 했던 플로(동작과 동작을 연결하는 것)들이 아사나로 향하는 데 도움을 줬음을 무시하고 그저 내 목표였던 멋진 아사나들을 완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성공한다고 누가 칭찬해줄 것도 아니었는데, 내 안에 잘하고 싶은 마음이 모든 것을 다 생략하고 목표 자세로 향하도록 나를 밀어붙였다. 오롯이 매트와 그 위에서 수련하는 나 자신에게만 집중을 하고 힘을 빼면서부터 내 어깨선이, 엉덩이가, 오른쪽 발목이 동작마다 내게 말하는 것에 집중하며 내 몸을 조금씩 읽어 들였다. 그제야 가슴을 열려면 가슴만 젖힐 것이 아니라 허리와 복부에서 단단하게 들어 올리는 힘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욕심부리지 않고 천천히 뒤로 넘어갔을 때 비로소 어려운 자세에서 숨을 내뱉을 수가 있었다. 실패하는 과정도 수련 흔히들 아슈탕가 요가는 움직이는 명상이라고 한다. 한겨울에도 땀이 엄청 날 정도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도 가만히 앉아서 명상할 때처럼 온갖 잡념이 나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오늘 내가 고양이 밥을 주고 나왔나, 고데기 플러그를 제대로 뽑았나 하는 사소한 잡념부터 지난 주말에 있었던 남자친구와의 싸움이 머리에서 통째로 재생되기도 했다. 그렇게 이유 없이 불쑥 끼어든 잡생각을 한창 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자세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렇게 아사나를 실패하면 우습게도 기분이 좋았다. 내가 집중하지 않고 있었구나. 나는 실패가 반갑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실패하면 안 되는 삶의 역사는 꽤 오래된 것이었다. 틀린 수학문제를 몇번이고 다시 정답이 나올 때까지 풀었고, 수능에 실패하면 다시 일년이란 시간을 대학 입학에 성공하기 위해 투자했고, 구멍 난 학점을 다시 올리기 위해 방학을 반납했다. 시작만 하고 끝을 보지 못한 일본어, 프랑스어 입문책은 중고 서점으로 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목적과 계획 세우기, 목표 지향적인 삶을 살았던 나에게 실패를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가 수련이고 목적인 요가는 삶의 매 순간 실패를 유쾌하게 마주 볼 수 있게 했다. 실패해도 괜찮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그 자세에 머물러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난 조리법에 ‘약불 30분’이라 돼 있으면 ‘센 불 10분’과 다를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음식의 향과 맛이 우러나려면 재료가 뭉근한 불에 서서히 익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는 요가도 음식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물구나무서기가 안 되면 집에서 백번이고 연습을 해서 도달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안다. 아사나의 완성이 아니라 그곳으로 가는 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어려운 동작을 마주할 때 마음가짐은 이제 잘해야지가 아니라, 그 자세를 할 때의 내 몸에 집중하고 실패해도 된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9월에 들어서며 새벽 수련을 시작했다. 말이 새벽 요가지 수업은 7시에 시작되기 때문에, 부지런한 누군가에게는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이른 아침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7시에 요가원까지 가기 위해서는 6시15분에는 일어나야 했고, 아침잠 5분도 소중한 나로서는 굉장한 벽을 만난 셈이었다. 새벽반을 등록하며 나 자신에게 물었다. “너 새벽에 매일 일어날 수 있어?” 내가 다니는 요가원은 번잡한 홍대 번화가 바로 뒷골목에 있다. 요즘은 새벽의 조용한 번화가 골목을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기분에 중독되어 잠을 물리치고, 요가원에 간다. 그토록 염원하던 멋진 요가 자세들이 영원히 되지 않는다 해도 이제는 상관없다. 나는 내 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계속 도전할 것이고, 또 실패한다고 해도 반평만한 한없이 관대한 요가 매트가 나를 받아줄 테니까. 목화밭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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