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이 지나도록 ‘이념 갈등’ 탓에 제주 4·3은 제대로 된 ‘이름’을 갖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자료도 제대로 남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법원이 제주 4·3 수형인의 재심 개시를 결정하면서 재판을 둘러싼 우려에 대해 내놓은 답변이 눈길을 끈다.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제갈창)는 3일 제주 4·3 때 고등군법회의(군사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수감된 수형인 18명의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4·3 관련 형사재판의 첫 재심 개시 결정이다. 재판부는 “재심청구인들은 법원이 발부한 사전 또는 사후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구금되어 군법회의에 이르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며 “재심청구인들 중에는 구 형사소송법에 따라 피의자를 구속할 수 있는 기간의 최장기에 해당하는 40일을 초과하여 구금되었고, 폭행과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던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공무원의 불법구금과 가혹행위는 형사 재심 사유 중 하나다.
재판부는 제주 4·3 수형인들의 재심 개시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법원으로서는 재심 개시 요건이 충족된 이상 재심 개시를 결정하고 본안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먼저 “재심청구인 중에도 남로당 당원이라며 조사 받은 사람, 간첩 혐의 쓰고 지명수배를 받은 사람, 한국전쟁 뒤 북한군에 편입돼 포로가 된 사람 등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 “재심청구인이 당시 그 처벌 규정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특정 행위를 하였는지 여부를 확인할 자료가 없고, 자료가 소실돼 재심 절차가 개시되더라도 본안 판단이 불가능하다. 더구나 남로당 무장대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존재해 경우에 따라서 청구인들의 신원 회복이 그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재심을 개시하는 것인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있다”고 재판부는 언급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형사소송법상 재심의 요건은 유죄의 확정판결과 재심 이유의 존부라 할 것이어서 법원으로서는 위 요건의 충족 여부를 검토하여 재심개시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며 “재심개시 요건이 충족된 이상 재심개시 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본안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위와 같은 우려가 있다 하여 재심 개시 결정을 거부하는 것은 형사소송의 기본 이념에도 반한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인류의 이성과 역사적 경험은 소극적 실체진술주의(무고한 자를 국가의 형벌권 행사로부터 지켜주는 것)를 형사소송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하도록 했다. 이는 흔히 ‘백 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자를 처벌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명제로 표현되고, 형사소송을 담당한 법관들에게 주어진 화두이자 무엇에도 양보할 수 없는 일차적 임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판부는 “재심 요건이 인정됨에도 앞서 본 바와 같은 우려를 들어 재심청구인들이 신원을 회복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은 법관들에게 부여된 위와 같은 임무를 외면하는 결과가 된다”며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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