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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유전무죄 무전유죄” 탈옥범 지강헌의 고발, 30년 지나도 현실

등록 2018-08-26 10:29수정 2018-08-27 11:45

[토요판] 신현호의 차트 읽어주는 남자
(19) 사법정의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강헌을 아시나요? 삼십년 전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88년 10월8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충남 공주교도소로 이감 중이던 죄수 열두명은 호송 차량에서 탈출을 감행합니다. 이들 중 지강헌이 이끄는 네명은 서울 시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일주일 뒤인 10월18일 은평구의 한 주택에 침입한 뒤 그 집에 살던 가족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합니다. 수천명의 경찰과 취재진이 좁은 주택가를 가득 채웠던 당시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최종적으로 인질범 한명이 자수하고 세명이 자살하는 것으로 끝마쳤는데, 다행히도 인질로 잡혔던 가족은 무사하였습니다.

지강헌의 탈주극은 당시에도 큰 화제였고, 이후에도 티브이 드라마 <수사반장>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2006년 영화 <홀리데이>로 각색되어 제작되었고 최근에는 <응답하라 1988>의 한편에서 이 사건이 다루어졌습니다. 이 사건이 이토록 주목받은 것은, 한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범죄자들의 탈주, 총기 범죄, 인질극, 그리고 지강헌이 마지막에 요청한 비지스의 노래 홀리데이까지 온갖 극적인 요소를 다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지강헌의 짧은 유언이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지강헌은 여러 차례 잡범죄를 벌인 전과자였지만, 자신은 560만원을 훔친 것 때문에 징역과 보호감호로 무려 17년간 수감생활을 하여야 하는 데 반해서, 수백억원에 달하는 횡령, 탈세, 뇌물수수를 범한 전경환(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은 겨우 7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에 큰 불만을 품고 벌인 일입니다. 전경환은 실제로는 노태우 정권 말에 징역 3년을 마치고 가석방된 뒤 특별사면을 통해 복권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세태를 고발한 것이 바로 ‘유전무죄·무전유죄’였습니다. 과연 우리 사회의 사법 정의는 부자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자에게 불리한 것일까요?

국민 80% 이상 “돈 있으면 무죄”

우선 국민들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강헌 사건이 벌어진 지 삼십년이 지났지만 여론조사로 드러난 우리 국민들의 의식 속에는, (그림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전무죄·무전유죄’가 확고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대법원이 2004년 1월 M&C리서치를 통해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형사재판이 부유하거나 가난한 사람, 지위가 높거나 낮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65.5%는 ‘그렇지 않다’, 18.2%는 ‘매우 그렇지 않다’고 답변해서 83.7%가 ‘유전무죄·무전유죄에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또 2017년 1월 동아일보·엠브레인이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한국은 유전무죄·무전유죄가 얼마나 적용되는 사회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가 19.6%, ‘매우 그렇다’가 71.4%로 총 91%의 답변자가 유전무죄·무전유죄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법률소비자연대의 연례조사 등 모든 조사에서 우리 국민은 유전무죄·무전유죄에 대한 강한 공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렇다면 유전무죄·무전유죄는 우리 국민의 인식을 넘어 현실에도 존재하는 것일까요?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수감 중 재판을 받던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2월5일 항소심에서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으로 석방된 바 있는데, 이때 화제가 된 것이 소위 ‘3·5의 법칙’이었습니다. 이 법칙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가리키는데, 현행법상 징역형이 3년 이하일 때만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하여, 법원이 재벌 등 특권층에 억지로 징역형을 3년 이하로 선고하고 이와 함께 집행을 유예해서 석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비꼬는 조어입니다. 이재용 부회장 외에도 그간 1조5천억원대 회계분식 혐의의 에스케이(SK)그룹 최태원 회장, 1천억원대의 비자금 조성 혐의의 현대차 정몽구 회장, 1500억원대의 배임과 400억원대의 탈세 혐의의 삼성그룹 이건회 회장 등이 모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바 있습니다.

2000~2014년 특경가법 집유 비율
전체 45%지만 재벌은 68%로 올라
한국 사법 신뢰 OECD 중 최하위권

미국 소득 하위 10% 남성 수감 비율
상위 10%에 비해 20배 높게 나타나
보석금 못 내면 유죄비율 6% 높아져

이 문제에 대한 학술적 실증 분석은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최한수 박사가 집중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최근 최 박사가 한양대 경영학과 이창민 교수와 공동으로 2000~2014년의 주요 기업범죄 사건(언론에 보도돼 주목을 받은 사건들을 지칭) 738명에 대한 판결을 분석해서 발표한 결과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법원은 여전히 재벌 범죄에 관대한가?’, 미발표 논문, 2018)

화이트칼라 범죄의 대표적인 유형인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사건의 경우 1심 집행유예 비율은 전체적으로 45%였던 데 반해, 주요 기업범죄 사건의 경우는 58%로 상승했고, 그중에서 재벌 피고인만으로 한정할 경우 68%로 더 올라갔습니다. 나아가 항소심의 경우에는 재벌 피고인에게서만 고유하게 78%로 크게 상승하였습니다.

우리 법원은 2009년 각종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제정하였는데, 다른 범죄와 마찬가지로 횡령과 배임 금액별로 징역형에 대한 양형기준이 강화되었고, 그 이후 전체적으로 집행유예 비율은 하락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림2)에서 보시듯 흥미롭게도 양형기준 제정 전후로 주요 기업범죄의 경우 집행유예 비율은 비재벌 피고인의 경우 66%에서 45%로 하락하였지만, 재벌 피고인의 경우에는 78%에서 60%로 더 빠르게 하락해 재벌과 비재벌의 격차는 오히려 확대되었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서 한국의 경우 재벌과 비재벌 사이에 형사처벌 받는 격차가 존재하고 있고, 나아가 전체적으로 처벌이 강화되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재벌과 비재벌 사이의 격차는 유지되거나 오히려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 박사와 이 교수의 표현대로 한국 법원은 여전히 재벌에 관대한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사법 차별’ 큰 사회문제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사법적 측면의 차별은 미국에서도 큰 사회문제이고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어 있습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애덤 루니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니컬러스 터너는 미국 30대 수감자들과 부모 소득 사이의 관계를 상세하게 추적하였습니다.(‘수감 전후의 노동과 기회’, <브루킹스연구소 보고서>, 2018) (그림3)에서 보시면 남성과 여성 모두 가난한 집안 출신이 부유층 출신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로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성의 경우 부모의 소득이 하위 10%인 경우 수감되는 비율은 상위 10%에 비해 대략 스무배 정도 높았습니다.(이러한 연구가 가능하도록, 미국 재무부, 국세청, 교정당국이 관련 데이터를 제공한 것도 매우 이례적인 일로, 우리가 본받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엄청난 격차는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습니다. 물론 이 격차가 모두 재판 과정의 불공정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고, 성장기에 범죄 환경에 노출되는 정도, 교육을 덜 받는 정도 등 다양한 요인이 결합되어 있을 것입니다.

시카고대학의 아르피트 굽타 교수와 크리스토퍼 한스만 교수, 메릴랜드 국선 변호인단의 이선 프렌치먼 변호사 등은 미국 사법 절차에 널리 활용되는 보증금을 통한 보석 제도의 불공정함을 발견하였습니다.(‘높은 보석금액의 큰 비용’, <저널 오브 리걸 스터디>, 2018) 미국에서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고 도주하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보증금을 내면 보석을 허용하는 제도가 있는데, 보석 상태에서 재판을 받으면 유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유죄를 받을 확률을 낮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피고의 경우 보석 보증금이 높게 책정될 경우 지급 능력이 없어서 보석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이 재판관에 따라 이 보증금을 높게 설정하거나 낮게 설정하는 성향을 이용하여 필라델피아와 피츠버그의 사례를 통계적으로 분석한 내용을 보면 이러한 보석 보증금 제도의 효과로 보증금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경우 유죄비율이 6% 높아진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결과는 이후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미국의 다른 주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과 미국에서 이슈가 되는 방향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한국은 재벌 등 특권층이 부당하게 형사처벌을 면제받는 ‘유전무죄’가 강조되었지만 미국에서는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이 부당하게 많이 형사처벌을 받는 ‘무전유죄’의 경향이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물론 미국에서도 ‘유전무죄’ 측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습니다. 특히 지난 금융위기 이후 월스트리트의 대형 금융기관들이 정부와의 합의금을 통해 형사처벌을 피해나가는 경향이 강화된 것을 분석해서 비판한 듀크대학 법학교수 브랜던 개릿의 <대마불옥>(Too Big to Jail)(하버드대학 출판부)이 대표적인 연구입니다.

다국적 여론조사기구인 갤럽이 세계인을 대상으로 사법시스템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림4)에서 보듯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은 칠레 다음으로 신뢰도가 낮았고, 미국은 오이시디 평균보다 약간 높은 수준입니다.(‘한눈으로 보는 정부’, 오이시디, 2015) ‘유전무죄’가 ‘무전유죄’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기는 특성이 일부 반영된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유전무죄’와 ‘무전유죄’가 모두 근절되어야 할 사회악이라면, ‘재벌들의 유전무죄’에 대한 경각심과 더불어 우리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이 사법시스템의 불공정함에 의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억울하게 유죄가 되는 ‘무전유죄’ 경향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신현호 데이터 분석가. 20년 동안 숫자와 차트를 작성하고 분석하는 일로 살아왔다. 연애 시절 차트 이야기에 몰두하다 썰렁한 남자로 몰려 차일 뻔한 뒤 충격을 받고 “차트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기치하에 아내를 겨우 설득했다. 그렇게 가다듬은 차트 이야기들로 독자와 대화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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