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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남자들의 ‘공놀이’와 이제 결별하련다

등록 2018-07-22 09:36수정 2018-07-22 11:01

축구공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남자들은 ‘쿨한 여자’를 원했다
진정으로 공놀이에 빠진들
여자인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선수도 심판도 해설자도 모두
월드컵은 남자들만의 이벤트
손흥민의 멕시코전 만회골은
뒤늦게 노력하는 구남친 같았다
월드컵은 여전히 남자가 뛰고, 남자가 심판을 보고, 남자가 해설하고, 남자 권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남자가 돈을 버는 이벤트였다. 지난 6월28일(한국시각)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에서 손흥민이 2-0으로 앞서는 골을 넣자 선수들이 뒤엉켜 환호하고 있다. 카잔/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월드컵은 여전히 남자가 뛰고, 남자가 심판을 보고, 남자가 해설하고, 남자 권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남자가 돈을 버는 이벤트였다. 지난 6월28일(한국시각)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에서 손흥민이 2-0으로 앞서는 골을 넣자 선수들이 뒤엉켜 환호하고 있다. 카잔/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토요판] 이런,홀로!?

공놀이와 쿨한 여자

한국과 멕시코 대표팀이 맞붙던 날 밤, 나는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깨어 있었다. 때마침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려서 중계를 지켜봤다. 2 대 0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손흥민 선수가 한 골을 만회했을 때 나는 그 상황을 이렇게 논평했다. ‘마치 뒤늦게 노력하는 구남친 같다’고. 그 말을 들은 친구 하나가 깔깔 웃었다. 그러고 보니 멕시코전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든 공놀이가 헤어진 남자친구 같았다. 한때는 즐거움을 줬고 잊지 못할 추억도 만들었지만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외면해버리는.

헤어짐 이전에 만남이 있듯, 분명 공놀이를 좋아한 시절이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였을 것이다. 주변의 모든 남자들이 공놀이를 좋아하다 못해 숭배하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그 영향을 받았다.

‘쿨걸들이여, 우리를 사랑해달라’

정말이지 남자들은, 극히 일부만 제외하곤 모두가 공을 좋아한다. 우리 집만 해도 아버지와 두살 터울의 오빠, 심지어 재작년에 태어난 조카까지도 축구공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러므로 나는 공놀이를 즐길 줄 아는, 쿨한 여자일 필요가 있었다.

“쿨한 여자는 섹시하고 똑똑하고 재미있는 여자라는 뜻이다. 그녀는 축구와 포커, 지저분한 농담, 트림을 좋아하고 비디오게임을 하며, 싸구려 맥주를 마시고 지상 최대의 음식 윤간 쇼라도 주최하는 것처럼 핫도그와 햄버거를 입속에 쑤셔 넣으면서도 어찌 된 일인지 사이즈 2를 유지하는 여자다.”

소설가 길리언 플린은 출세작 <나를 찾아줘>에서 쿨걸을 이렇게 묘사했다. 남자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좋아하고 결코 불평하는 법이 없는 여자.

나도 예전에는 지금처럼 자주 불편하지 않았으니, 그만큼 불평도 적었으리라(확신은 못하겠다). 게다가 이전 남자친구들은 고맙게도, 내가 파마를 하거나 반영구 화장이라고 불리는 시술을 받으면 살인적인 지겨움을 견디며 기다려주는 타입이었다. 공놀이는, 그들이 베푸는 자상함에 대한 보답이었다.(그게 사랑 아닌가?) 기다린 횟수에 비해서 공놀이가 너무 잦긴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퉁쳐야지 어쩌겠는가. 그리고 보답이 아니라도 남자들은 여자를 경기장에 끌고 가서, 앉혀놓기를 좋아한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그렇다.

그곳에서 나는 집안 남자들이나 남자친구가 숭배하는 팀을 응원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재미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선수의 이름과 팀을 연호하는 것은, 지능지수가 약간 떨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거기까지만 하면 좋으련만, 한번 시작한 쿨걸 노릇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딱히 관심도 없는 라리가의 순위를 외우고 엘클라시코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척하며 쿨함을 연기했다. 역시 알지도 못하는 너클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고 차에 실려서 대전까지 갔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파도도 탔다. ‘뭐 어때? 이건 인류 문화사의 중요한 일부분이야’, ‘공놀이를 이해한다는 건 남자를 이해하는 거’라고 거짓을 합리화할 구실만 늘어났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놀이와 쿨걸 정서를 결합시켜서 하나의 문화현상을 만들던 흐름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시작은 2002년 무렵부터인데, 우리 생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한 월드컵 4강을 안방에서 지켜봤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공놀이에 관한 책이 쏟아지다시피 했고 닉 혼비의 <피버 피치>도 이때 번역됐다.

알려진 대로 닉 혼비는 영원히 철들지 않는, 아니 철들 생각이 없는 남자들을 위한 변명을 써내는 데에 매우 탁월한 작가다. 그의 작품에는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나 결핍을 보상받고자 축구와 록 음악 등에 심취한 오타쿠 남자가 자주 등장한다. 어찌 된 일인지, 이들에겐 나름의 매력이 있고 그 매력으로 쿨걸의 사랑을 얻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허약하기 짝이 없는 이 별종들에게 사랑이란, 여자친구의 집에 얹혀살면서 잘못을 저지르고 그럼에도 무조건적인 이해를 바라는 것이다. <피버 피치>는 이 작가의 지독한 축구 사랑을 담은 자전적 에세이이자 데뷔작이다.

닉 혼비의 뒤를 이어 한국 문학계에도 축구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가 발표돼 인기를 끌었다.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느냐’는 농담에서 출발한 것 같은 이 소설은, 어느 축구광 남자가 자신만큼이나 축구를 좋아하는 쿨걸과 결혼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뤘다.

이런 작품들이 주는 메시지는 한결같다. 공놀이는 남성성 그 자체라는 것. 남자는 공놀이에 미치는 열정으로 여자를 사랑한다. 그러니 쿨걸들이여, 우리들을 사랑해 달라!

결국 이러한 흐름은 공놀이를, 여자들이 이수해야 할 필수 교양 대열에까지 올려놓는다. <축구 아는 여자>나 <야구 아는 여자>와 같은 책이 등장한 것인데, 이런 책은 여성이 스포츠 까막눈이라는 전제하에 기획됐다. 보통의 스포츠 서적과 다르게 여성 저자를 내세워서 오프사이드나 삼진 아웃부터 가르치는 의도는 너무나 빤하지 않은가? 쿨걸이 되라는 것이다.

결국 내가 진정으로 공놀이에 빠진들, 그것은 여자인 나와 무관한 일이었다. 가난한 소년이 이적료 1000억원을 넘게 받는 스타가 돼도, 노장 감독의 고집이 기적을 일으켜도, 다른 세상의 신화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나는 정식으로 공을 차보거나 던져본 적도 없다. 꿈의 무대라고 불리는 경기장도 나의 무대가 아니었으며 남자의 공놀이에 온 세상이 열광하는 풍경은 소외감만 안겼다. 그것은 국제대회에서 남성 선수들보다 월등히 좋은 성적을 내는 여성 선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직 남성만이 열띤 환호와 절망의 주인공일 수 있다.

그렇게 나는 공놀이와 결별했다. 이미 헤어진 남자와 우연히 마주치듯 F조의 경기와 결승전만 겨우 구경했다. 모든 것이 짐작대로 흘러갔다. 월드컵은 여전히 남자가 뛰고, 남자가 심판을 보고, 남자가 해설하고, 남자 권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남자가 돈을 버는 이벤트였다.

여성의 자리가 경기와 동떨어진 주변부인 것도 여전했다. 현장을 보도하던 여성 리포트가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영상을 봤고 러시아 버거킹이 선수 아이를 임신하는 여성에게 상금과 햄버거를 평생 제공하겠다는 프로모션을 벌였다가 중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국제축구연맹(FIFA)이 나서서 중계 중에 여성만 골라서 줌인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방송사에 요구한 점이다. 사진 전문 에이전시 게티이미지도 ‘가장 섹시한 팬들’이라는 이름의 갤러리를 열었다가 얼른 삭제했다.

푸시 라이엇의 ‘반전’

그렇게 월드컵과의 재회는 별다른 추억도 없이 막을 내리는 듯했다.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결승전의 ‘그 사건’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훗날 러시아 월드컵의 우승팀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라운드에 난입한 러시아 펑크록 밴드 ‘푸시 라이엇’은 기억할 듯하다. 전부터 꾸준하게 푸틴 체제에 저항해온 이들은 남자들의 게임을 시원하게 망쳐 놨다. 그리고 엄청난 주목과 질타를 한몸에 받았다. 일부 팬들이 크로아티아 선수들보다 더 분노하는 바람에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그러한 반응조차도 푸시 라이엇의 전략이 유효했음을 증명한다.

역시나 공은 둥글며 반전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축구 역사상 가장 쿨한 진리를 선수가 아닌 록 밴드가 몸소 보여주다니! 앞으로도 이런 반전이 준비돼 있다면, 나는 다시 한번 공놀이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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