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월드컵도 거의 막바지에 도달해서 프랑스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결승전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한국 팀이 16강 진출에 실패한 아쉬움이 크지만, 그래도 세계 최강 독일 팀을 2 대 0으로 꺾은 짜릿함은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는 한국과 독일전이 열리던 지난달 27일 독일 베를린에서 여행 중이었습니다. 수만명의 독일인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얼굴에 독일 국기를 그리고, 독일 유니폼을 입고 광장과 맥줏집에 모여서 열광적인 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기 후반 우리가 두골을 연속해서 넣으면서 독일 팀 패배가 확정되던 순간 독일인들의 절망은 과장 없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놀란 것은 영국인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경기 직후 영국 언론은 일제히 독일의 패배를 고소해하는 보도로 대서특필하였는데, 심지어 조 4위를 한 독일팀 성적표에 가위 표시를 한 절단선을 그려놓고선, “오려두었다가, 우울할 때면 꺼내서 즐기세요”라는 조롱까지 등장했습니다. 네덜란드에 사는 한국 친구에게 들어보니, 독일 팀 패배가 확정되고 네덜란드 친구들로부터 “한국 고마워” “한국 사랑해”라는 메시지가 쇄도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영국과 네덜란드 사람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요?
영국의 경우 독일이 승리할 경우, 준결승 이후 독일과 대결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차분한 계산에 기인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아예 지역예선에서 탈락해서 월드컵에 출전도 못했기 때문에 독일 팀의 패배는 네덜란드 팀 성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심리학자들은 이를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현상이라고 지칭하였는데,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느끼는 쾌락’을 지칭하는 독일어입니다. 일부에서는 ‘쌤통 심리’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우리말로 딱 떨어지는 번역어는 없습니다. 한편으로 질투와 비슷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질투는 ‘타인의 행복으로부터 느끼는 불행감’이기 때문에 샤덴프로이데와 대칭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샤덴프로이데와 스포츠
아이러니하게도 스포츠에서 나타나는 샤덴프로이데 분석 중 대표적인 사례도 독일 축구팀의 패배였습니다. 독일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8강에서 당시 약체로 분류되던 크로아티아에 굴욕적인 3 대 0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때에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독일 팀의 패배에 환호했는데, 네덜란드의 독일에 대한 라이벌 의식은 오래전부터 유명했다고 합니다. 축구와 관련해서는 1974년 독일에서 개최된 월드컵 결승에서 독일에 2 대 1로 역전패를 당한 트라우마가 네덜란드인들에게 깊게 각인되어 있고, 그보다 더 파고들면 2차 대전 당시 독일로부터 폭격과 점령을 당하고, 수십만명의 네덜란드인이 희생되었던 역사가 근원에 있다고 합니다.
콜린 리치 등 미국과 네덜란드의 심리학자로 이루어진 연구팀이 이에 대해 분석했습니다.
(‘사악한 기쁨: 다른 집단의 고통에서 느끼는 샤덴프로이데’, <저널 오브 퍼스낼리티 앤드 소셜 사이콜로지>, 2003) 이들은 암스테르담 대학 심리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축구에 대한 관심, 독일에 대한 라이벌 의식, 독일 패배로부터 느끼는 쾌락의 정도(1에서 7로 숫자가 높을수록 더 큰 쾌락을 나타냅니다) 등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림1>에 기본적인 결과가 요약되어 있는데, 우선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을수록 샤덴프로이데 심리가 더 크게 나타납니다. 또 이들은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는 영국과 브라질 등 다른 국가들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냈던 것을 요약한 기사를 보여주고, 다른 그룹에는 보여주지 않았는데, 다른 나라 활약상에 접한 응답자들이 독일 팀 패배에 대해 더 큰 샤덴프로이데 심리를 보였습니다. 이것은 다른 국가들의 활약상이 네덜란드인의 상대적 열등감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연구에서도 열등감이 강할수록 대체로 샤덴프로이데 심리가 강화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영국과 독일, 네덜란드와 독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2014년 브라질 월드컵 준결승에서 브라질은 독일에 7 대 1로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지만, 며칠 뒤 결승에서 독일이 아르헨티나를 꺾자 브라질인들은 폭죽까지 쏘아 가면서 축제 분위기로 환호했습니다) 등 국제 축구경기에서 나타나는 샤덴프로이데는 모두 수십년, 혹은 수백년에 걸친 역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나라 안에서 역사가 짧은 스포츠에서도 샤덴프로이데가 나타날까 살펴본 학자들이 있습니다. 미국 노던켄터키 대학과 웨스턴캐롤라이나 대학의 경영학자 조 콥스와 데이비드 타일러가 미국-캐나다의 신생 축구리그인 메이저리그사커(MLS) 팬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입니다.
(‘신세계에서의 라이벌 팀 의식의 형성’, <사커 앤드 소사이어티>, 출간 예정)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북미 축구리그에도 샤덴프로이데가 존재하는데, 흥미롭게도 라이벌 의식과는 다소 구분되는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림2>를 보시면, 라이벌 의식은 지리적으로 가깝거나, 경기 횟수가 많거나, 라이벌이 되는 특정한 이벤트가 있었거나 하는 등의 요인이 중요하게 작동하였지만 이것은 샤덴프로이데 심리와의 상관도가 매우 낮았습니다. 오히려 샤덴프로이데는 문화적 차이 또는 차별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문화적 차이는 예컨대 프랑스어를 쓰는 몬트리올 팀과 영어를 쓰는 토론토 팀의 팬들이 서로 간에 샤덴프로이데를 보이는 주요 이유로 상대가 자기들의 언어와 문화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차별감은 리그 사무국이 특정 팀에 선수 선발 등의 특혜를 주고 있다고 느낀 팬들이 해당 팀에 대한 높은 샤덴프로이데를 보이는 것 등을 지칭합니다. 샤덴프로이데의 심리는 해당 스포츠 자체와는 다른 차원이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심각한 샤덴프로이데
샤덴프로이데가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라이벌 팀의 패배에 대해 고소해하는 정도의 감정이라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측면이 몇 가지 있습니다.
미국 켄터키 대학의 심리학자 찰스 후글런드가 이끄는 연구팀은 켄터키 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서 듀크 대학 농구팀에 대한 샤덴프로이데를 조사하였습니다.
(‘고통의 기쁨 및 기쁨의 고통’, <모티베이션 앤드 이모션>, 2015) 켄터키 대학과 듀크 대학 농구팀은 대학리그에서 전통의 라이벌인데, 특히 1992년 지역 결승에서 듀크 대학이 연장전 종료 2초를 남기고 극적인 역전승을 한 것이 켄터키 대학 농구팬들에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연구는 듀크 대학 농구선수의 부상과 회복 소식에 대한 켄터키 대학생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농구에 대한 관심이 큰 켄터키 대학생들은 상대 팀 선수의 부상에 기뻐하였고, 빠른 회복에 대해서는 불만족스러워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라이벌 팀의 패배 소식을 고소해하는 것보다는 사악한 정도가 더 큰 것 아닐까요?
또 샤덴프로이데는 스포츠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영국 리즈 대학과 요크 대학의 경제학자 피터 하울리와 세라 나이트는 실업 연구를 통해 샤덴프로이데에 접근하였습니다.
(‘샤덴프로이데: 지위 효과와 실업자의 행복도’, <리즈 대학 워킹페이퍼>, 2018) 본인의 실업 여부와 주변의 실업자 증가는 각자의 행복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먼저
<그림3(A)>를 보시면, 본인이 취업 상태(파란색)에 있으면 실업 상태(빨간색)에 있을 때보다 더 행복도가 높습니다. 이것은 매우 자명한 일이겠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취업자는 주변의 실업자가 늘어날수록 행복도가 낮아지는데(이것은 마을 전체의 분위기를 어둡게 하기 때문입니다), 실업자는 오히려 실업률이 높아지면 행복도가 높아집니다. 전형적인 샤덴프로이데 현상이고 앞서 말씀드린 바대로 현재 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의 열등감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실업자들 중 이웃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을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그림3(B)>를 보시면 이웃과 교류하는 사람에게서는 샤덴프로이데가 나타나지만 교류가 없는 사람에게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교류가 실업 상태의 열등감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이웃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실업자들이 성별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지 조사한 결과가
<그림3(C)>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을 보시면 흥미롭게도 남성은 샤덴프로이데를 보이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실업 상태에서 이웃과 활발하게 교류하더라도 이웃의 실업자가 늘어나는 것이 행복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추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질투나 샤덴프로이데 심리를 여성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연구는 그것이 얼마나 근거 없는 편견인지를 또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껏 살펴본 바대로 샤덴프로이데는 애교 수준의 것부터 꽤 심각한 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것까지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또 최신 뇌과학과 진화론적 분석에 의하면 질투와 샤덴프로이데는 우리 본성 중 일부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질투가 나의 힘’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질투와 샤덴프로이데는 우리에게 일정한 자극을 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그렇듯 샤덴프로이데도 지나치게 되면 그 심각도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역사학자와 심리학자들은 나치가 행한 유대인 학살의 근원에 샤덴프로이데 심리가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샤덴프로이데가 적절한 선에서 제어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