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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그의 사랑도, 조카의 사랑도…변해야 얻는다

등록 2018-06-02 09:57수정 2018-06-02 10:34

[토요판] 이런,홀로!?
‘조용한’ 고모의 변신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조카를 대하면서 삼십여년 묵은 정체성이 흔들린다. 하지만 조카한테 외면당하다 보니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훈련을 하고 있다. 계속하다 보면 슬슬 새 인생도 시작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게티이미지뱅크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조카를 대하면서 삼십여년 묵은 정체성이 흔들린다. 하지만 조카한테 외면당하다 보니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훈련을 하고 있다. 계속하다 보면 슬슬 새 인생도 시작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나 사실 그동안 네가 하는 말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

지난해 5월12일 금요일 밤 서울 당산역 부근 치킨집에서 헤어진 사람이 말했다. 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쪽은 나였다. 그랬는데, 그의 말을 듣고 사실 조금 놀랐다. 이별의 이유로는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이런 말을 한 이유가, 내가 했던 많고 많은 가시 돋친 말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도 씁쓸했다. 그동안 내가 한 말을 이해하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니, 영화 <식스센스>급의 반전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내 말을 알아듣는 척 연기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함을 느끼는 내 마음과 달리 이미 흥분한 그는 남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넌 나와 너무 달라.” 그는 눈을 반짝였고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이 말 역시 나에게 상처 주기 위한 말이라는 것이 잘 느껴졌다. 2년 전 사귀는 것을 주저하는 나에게 밤마다 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헤아리던 그의 첫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마지막 이별을 한 뒤 나는 사랑이 또 찾아올 거란 믿음도, 희망도 반은 포기한 채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지금 내가 불행한 것은 아니다. 일에 집중하고 있고 친구와 가족과의 관계도 연애 시절보다 나아졌다. 짚신도 짝이 있다지만 짝 없는 짚신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며 잘 살아 있다.

“고모 최고!” 이 한마디에…

‘안물안궁’일 독자들에게 ‘듣보잡’ 필자의 이별 장면을 소상히 밝히는 이유가 있다. 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나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싶어서다.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내 타고난 성격은 내향적이다. 생각이 많고 자존심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말을 잘 안 한다. 나는 말을 해야만 하니까 한다. 어떤 말을 들으면 다음에 내가 할 말을 속으로 오랫동안 꼭꼭 씹어 다 소화가 됐을 때 툭 뱉는 편이다. 원래 고요함을 좋아한다.

입사시험을 볼 때 치렀던 압박면접에서 한 면접관이 “말이 너무 적다. 속을 모르겠다. 사이코패스적 기질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는데 속으로 움찔했다. 첫 사수도 말 없는 나에게 “후까시 잡지 마라”고 했으니, 소통 능력이 좋은 편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눈으로 말해요’ ‘말하지 않아도 진심은 통하는 법’이라는 격언을 삼십여년째 실천하며 그럭저럭 살아왔다. 최근 그런 나의 삶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고모 최고!”

나와 똑같이 생긴 4살 된 오빠의 딸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웃는다. 이 땅의 흔한 조카바보인 나는 요즘 한번도 상처받아보지 않은 조카의 미소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걸 즐기고 있다. 이런 게 천국의 모습은 아닐까. 나를 부정하며 떠난 그가 더는 떠오르지 않는다. 연차는 쌓여가는데 할 줄 아는 건 없는 나를 감추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는 회사에서의 내 모습도 잊을 수 있다. 그래서 유희열은 사랑을 말하며 “니가 웃으면 나도 좋아”(‘좋은 사람’)라고 했나 보다. 나는 조카를 사랑한다. 잘 보이고 싶다.

그런데 그게 참 힘들다. 내가 생각할 때 나의 장점 중 하나는 말을 잘 안 하는 대신, 말 많은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말이 많은 공간에서는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 편안하다. 나는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기 때문에 말을 듣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조카의 말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지난 일요일 가족 식사가 끝난 뒤 식당 근처 약국에 들렀다가 생긴 일이다.

“고모, 이거 사줘.”

“응응, 그래. 고모가 사줄게.”

약국에서는 현명하게도 애들이 손으로 집기 편한 위치에 캐릭터 칫솔을 전시해두었다. 애들은 자기를 제일 예뻐하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애교를 부린다. 혼자서도 잘살려면 노후자금을 모아야 한다며 알뜰살뜰 은행이자 1%대 적금을 미련하게 들고 있는 내가 조카 앞에서는 지갑을 쉽게 연다. 2000원에 4개 하는 칫솔을 쓰고 있는 내가 조카에겐 4000원짜리 에디(뽀로로의 친구인 여우) 칫솔을 사주었다.

“어머. 너 참 예쁘게 생겼다. 손에 든 건 뭐야?”

후덕한 인상의 인자한 약사님이 데스크 아래 서 있는 조카에게 말을 걸었다. 성격도 날 닮았는지 수줍음이 많은 조카가 약사님의 눈을 피하며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조카가 불편해할까봐 내가 대신해서 “애기 칫솔이에요”라고 대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그게 잘못이었다. 조카가 입을 삐쭉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애기 칫솔….”

“그래, 애기 칫솔이야.”

“애기 칫솔….”

“응응, 그래. 애기들이 치카치카하는 칫솔이지.”

“애기 칫솔!”

조카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잡고 있던 내 손을 뿌리치고 엄마,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조카의 얼굴은 울상이 됐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원망하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다 휙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에디 칫솔이라는 거예요.”

보다 못한 약사님이 답을 말해주고서야 알았다. 조카는 목청껏 ‘애기 칫솔이 아니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뽀로로의 친구인 여우 ‘에디’ 얼굴이 달린 칫솔인데 애기 칫솔이라고 헛소리를 하고 있었으니. 나도 에디, 루피, 포비… 또… 암튼 나도 뽀로로 친구들 얼굴과 이름 다 구분할 줄 아는데 억울했다. 시험공부는 나름 열심히 했지만 실제 시험은 망친 기분이었다. 나도 시무룩해졌다. 새언니는 “아가씨,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라고 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애기 칫솔?” “쪼꼬 선생님?”
‘아알못’ 고모는 오답을 반복했고
조카는 입을 삐죽거렸다
함께 노는 걸 재미없어했다

조카에게 외면당하고서야
‘조용한’ 고모는 새로 태어났다
행동도 함께, 높은 톤으로, 크게
‘이렇게 새 인생도 오지 않을까’

조카는 내가 자기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니 함께 노는 걸 재미없어한다. 어느 날 엄마 혼자 조카를 돌보는 게 마음에 걸려 오빠 집으로 퇴근했다. 고모에게 사달라고 하면 뭐든 다 사준다는 걸 아는 조카는 고모가 온다는 말에 ‘만 3세용 첫 가위’ 책을 사 오라고 주문했다. 대형서점에 들러 그 책뿐 아니라 그 나이용 책 5권을 모두 사서 집에 갔다.

“고모 최고.”

그 말 한마디 들으려고 한 거니 됐구나 싶었다. 조카가 기분이 좋아진 틈을 타 같이 책 읽기를 시도했다. 책 몇장을 함께 보는데 갑자기 조카가 “우리 아이스크림놀이 할까”라며 쪼르르 방에 들어갔다. 트랜스포머 출연 로봇처럼 접으면 가방이 되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끌고 나왔다. 조카가 퍼주는 색색의 아이스크림을 먹는 시늉을 하고,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으면 배가 아프다는 생활정보까지 넣어가며 조카랑 놀아주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쪼꼬… 쪼꼬 선생님이 사줬어.”

“응? 초콜릿을 선생님이 사줬다고?”

조카의 고개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내가 못 알아듣고 있어 답답하다는 의미였다.

“쪼꼬… 쪼꼬 선생님이 사줬어.”

“응? 뭐라고? 고모가 못 알아들었어. 쪼꼬 선생님이 있어?”

조카의 답답함이 폭발 직전처럼 보였는지 엄마가 달려와 ‘쪼꼬’가 아니라 ‘소꿉’이라고 통역해주었다. 아니 치약 같은 걸 들고서는 초콜릿이라고 우기는데다 어린이집에는 있지도 않은 소꿉 선생님을 말하는데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단 말인가. 자괴감이 들었지만 억울했다.

소통 의지가 불타오른다

조카의 마음을 얻기 위한 ‘아알못’(아이를 알지 못하는) 고모의 분투기는 계속되고 있다. 처음에는 나의 비루한 일상을 천사 같은 조카를 만나 치유하기 위한 목적이 적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 따뜻했다. 그런데 이제는 점점 조카와 소통하겠다는 의지가 강해지고 있다. 나의 소통 의지 위로 프라이팬을 올려 계란프라이를 해먹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새언니가 조언을 많이 해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리 언니(유튜버)처럼,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고 한다.(젠장, 나는 성가대에서 알토였다) 말도 행동도 평소보다 크게 하면서 말하면 애들이 관심을 기울인다고 한다.(나는 최신 스마트폰으로 전화할 때도 상대방이 다시 말해달라고 할 정도로 평소 목소리가 작다.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해 잘 때마저 움직임이 적다) 조카의 사랑을 구하려면 내가 변해야만 한단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조카를 대하면서 삼십여년 묵은 정체성이 흔들린다. 하지만 조카한테 외면당하다 보니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훈련을 하고 있다. 계속하다 보면 슬슬 새 인생도 시작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갱생 중인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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