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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6개월마다 바뀌는 회사 이름, 나는 ‘◇◇인력’ 소속 ‘유령’노동자

등록 2018-05-16 05:02수정 2018-05-16 15:59

[창간30 특별기획/ 노동 orz]
1부 노동OTL 10년, 다시 찾은 제조업 현장 ② 떠도는 언니들
‘4~5월 생산직 인력 운영 안내’

지난 3월 말 경기도 안산에 있는 연성인쇄회로기판(FPCB·에프피시비) 제조업체 ㅇ사에 다니던 최정민(이하 모두 가명·40대) 언니는 ‘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다.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서다. 회사 관리자는 자세한 설명 없이 단체 카톡방에 이미지 파일 하나만 덜렁 공유했다. 언니와 같은 기간제 노동자는 4월○일자로 계약이 종료된다는 내용이었다.

언니가 ㅇ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지난해 봄이다. 글로벌 기업에 공급량이 늘면서, ㅇ사는 설비를 늘리고 노동자도 대거 채용했다. 언니는 ㅇ사의 한 사내 하도급 업체 소속이었는데, 언니가 속한 라인 담당만 30여명에서 100여명으로 순식간에 인원이 불었다. 사업이 커가는 과정이어서였는지, 언니는 정기 심사를 통과해 파견직에서 3개월짜리 계약직으로 전환됐다. 3개월 계약을 한 번 더 연장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남편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놀 수만은 없던 차에 얻은 소중한 일자리였다. 언니는 입사 초기 30일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고 했다.

인터넷 보고 ‘△△인력’ 갔더니
사무실엔 ‘□□솔루션’ 간판
직원은 ‘◎◎테크’ 명함 건네

6개월 동안 파견 노동했더니
‘△△인력’에서 ‘◇◇인력’으로
불법파견 숨기려 간판만 바꿔
안산·인천 떠도는 파견노동자

그것도 잠시였다. 회사에 위기가 찾아왔다. 물량을 소화해주던 글로벌 기업과의 계약이 끊겼다. 회사는 상여금을 100% 깎더니 노동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희망퇴직과 무급휴직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올해 1월 언니는 ‘무급휴직 동의서’에 서명했다. 회사 사정으로 휴직할 경우 평균 임금의 70%를 휴업수당으로 지급해야 하지만, 회사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몇달만 참으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지.” 언니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언니는 퇴직금 한 푼 받지 못했다. 다른 소사장 업체까지 합해 2천여명의 노동자가 잘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노동자와 사용자는 노동력과 임금을 교환한다. 그러나 직접 계약을 체결하지 않는다. 사내하청과 파견 등으로 이름 지어진 간접고용 구조 아래 실사용 업체인 원청은 파견업체 뒤에 숨었다. 파견업체는 법망을 피하느라 실체를 숨겼다. 노동자는 이렇게 복잡한 구조의 틈새를 부유하듯 떠돌았다. 생산직 구직자와 노동자로 2~3월 경기도·인천 지역을 떠돌면서 목격한 ‘유령’들이다.

경기 안산시 한 파견사업소 출입문에 각종 파견노동자 모집공고가 빼곡히 붙어있다. 안산/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경기 안산시 한 파견사업소 출입문에 각종 파견노동자 모집공고가 빼곡히 붙어있다. 안산/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비정규직 제로 시대의 ‘생산 정규직 제로 공장’ 지난 2·3월 경기 안산시와 인천에서 생산직 구직자·노동자로 지내는 동안, 정민 언니를 비롯해 ㅇ사 출신 노동자를 네 명이나 다시 만났다. ㅇ사에서 정착을 꿈꾸던 언니들은 ‘정리해고’ 바람에 새 일을 찾으러 뛰어다녔다.

그중엔 ㅇ사 사내 하도급 출신인 김희경(33) 언니도 있었다. 희경 언니는 ㅇ사의 사내하도급 업체에서 1년 넘게 일해 ‘자리를 잡았다 싶었을 때’ 해고됐다. 일하던 업체가 베트남으로 이전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만 했는데, 그 업체가 실제 베트남으로 이전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회사를 해외로 옮긴다고 그만두라는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잖아.” 희경 언니는 그 뒤 핸드폰 케이스 제조업체에 들어갔다. 그곳은 ‘경영 악화’를 핑계로 첫달이 지나고부터 월급을 주지 않았다.

ㅇ사는 생산직군에 사내 하도급(소사장) 업체를 최대 23곳(2016년 기준) 두는 방식으로 직접고용을 피하던 ‘악질 기업’이었다. 사내 하도급 업체마다 따로 사장(소사장)을 두고 그 업체에 생산직 노동자를 소속시키는 식이다. 그 덕에 ㅇ사의 생산 라인에서 일하는 ㅇ사 정규직 노동자는 ‘제로’에 수렴한다. 이른바 ‘생산직 정규직 제로 공장’이다. ㅇ사에는 사내 하도급 파견직, 사내 하도급 계약직, 사내 하도급 정규직이라는 3개의 신분이 있었다. 사내 하도급 정규직이라고 하더라도 원청인 ㅇ사 정규직으로 도약은 불가능했다. ㅇ사의 사업이 휘청하면서 먼지처럼 떨려 나온 사내 하도급 파견·계약직 노동자들이 ‘유령’처럼 안산·인천 지역을 떠돈 셈이다.

‘제조업·상시·파견’ 형용 모순의 노동자 2월 경기 안산시의 한 회로기판 제조 공장에서 2주 가까이 일했을 때다. “어디 파견업체 소속이에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을까. 공장에서 만난 효빈(30) 언니는 즉답을 못 했다. “어디더라….” 그는 자신이 속한 회사의 이름을 대지 못했다. 출퇴근 기록카드에 적힌 파견업체 이름이 6개월마다 바뀐다고 했다. 처음엔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은 제조업 직접 생산 공정에는 파견노동자를 쓰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출산·질병·부상 등으로 결원이 생기거나 일시·간헐적으로 인력을 확보해야 할 경우’에만 파견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데 그것도 최대 6개월까지다. 파견업체들은 이 6개월을 넘겨 파견을 이어가기 위해 폐업과 개업을 반복하며 간판을 바꿔 달았다. 같은 업체, 같은 사장인데 △△인력으로 6개월간 노동자를 파견 보내고, 다시 ▽▽시스템으로 이름을 바꿔 파견을 이어가는 식이다. 생산물량 감소에 따라 해고를 용이하게 하려 간접고용을 선호하는 중소·영세 사업장과 이해가 맞아떨어진다. 이 업체에서 10년 이상 일했다는 한 언니가 머쓱해하는 효빈 언니를 대신해 기자에게 핀잔하듯 말했다. “괜찮아. 월급만 따박따박 받으면 되지.”

바람에 흩날리다 제자리를 찾으면 뿌리 내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언니들은 ‘정착’을 소망했다. 당시 같은 공정에서 일했던 노동자 여섯 명 중 정규직 노동자는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다섯 명의 언니들은 모두 다른 파견업체 소속이었는데, 다들 이곳에서만 2년 이상 일했다고 했다. 일시·간헐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라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았고 근속 기간도 길었다. 2월13일 이 업체는 공장 모든 직원에게 설날을 맞아 스팸 선물 세트를 돌렸다. 정규직도 한 개, 파견직도 한 개였다. 한 언니가 씁쓸하게 말했다. “우리 회사가 정규직이랑 파견직이랑 차이를 두진 않아. 사실 파견직이 정규직처럼 일하긴 하지.”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6년 파견근로 감독 결과를 보면, 파견 사용업체 775곳 중 100곳에서 모두 2624명의 파견노동자가 불법 파견된 것으로 나타났다. 파견노동자가 불법적으로 사용한 사례의 49.0%(1287명)가 인천·경기 지역에서 발생했다. 특히 경기도 안산·시흥 지역은 대기업 2·3·4차 밴드에 속하는 영세 제조업체가 대다수여서 경기에 따라 물량 변동이 심해 쉽게 채용하고 정리할 수 있는 파견노동자 의존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높다.

파견 업체…너의 ‘진짜’ 이름은 지난 2월 구직자로 경기 안산역·중앙역·정왕역, 인천 동암역·선학역 부근 파견업체 37곳을 직접 방문했을 때다. 그달 21일 포털 사이트에 ‘정왕역 파견업체’를 검색했더니 10여곳의 파견업체 주소가 떴다. 검색 결과를 토대로 ‘◇◇인력’을 찾아갔더니 해당 사무실엔 ‘□□솔루션’이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직원은 ‘◎◎테크’라고 적힌 명함을 건넸다. ‘△△업체’에서 보낸 일자리 알선 문자는 “㈜ □□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알맹이는 바뀐 것 없는데 업체 이름만 바뀐 셈이다.

구인·구직사이트에 올라온 게시글도 베일에 싸여 있긴 마찬가지였다. 파견업체 쪽 전화번호 옆엔 담당자의 실명 대신 ‘김 과장’, ‘하 대리’, ‘박 상무’라는 직함만 적혀 있었다. 그달 19일 전화한 16곳의 구인공고 가운데 내가 직접 일해야 할 회사의 이름이 적힌 곳은 한 곳도 없었다.

노동부가 집계한 파견사업 현황에 따르면 1998년 789개였던 파견업체 수는 지난해 상반기 기준 2448개로 3배 넘게 급증했다. 인천지역노동자권리찾기사업단 등은 2015년부터 2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인천지역의 무허가 파견업체 73곳, 제조업에 불법으로 노동자를 파견한 파견업체 252곳을 노동부에 고발하기도 했다. 무허가 업체나 폐업과 허가를 반복하는 파견업체까지 포함하면 파견노동의 실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게 노동계 분석이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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