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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사랑받는 단 한 사람’…그래서 부모가 되려는 거겠지

등록 2018-04-22 10:00수정 2018-04-22 10:43

[토요판] 이런,홀로!?
부모를 ‘선택’하는 이유
결혼과 출산. 내가 인생에 들이지 않은 이 두가지 일을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하고 기꺼이 수행하려는 이유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어떤 함축성도 상징도 없이 스스로 부모가 되는 것, 다시 누군가의 어린 시절로 들어가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단 한 사람이 되는 것. 그러나 이 또한 대개 성공하지 못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결혼과 출산. 내가 인생에 들이지 않은 이 두가지 일을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하고 기꺼이 수행하려는 이유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어떤 함축성도 상징도 없이 스스로 부모가 되는 것, 다시 누군가의 어린 시절로 들어가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단 한 사람이 되는 것. 그러나 이 또한 대개 성공하지 못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사건의 발단은 에어컨이었다. 지난가을에 이사 온 집엔 에어컨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며칠 전 아버지는 전화를 걸어서 에어컨을 미리 달아두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지체하다가 날이 더워지기라도 하면 중고 에어컨도, 설치 비용도 부르는 게 값이라는 당신의 말은 백번 옳았다. 그런데도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우선은 귀찮았다. 제때 처리하지 못해서 밀린 일에, 가사에, 미리 잡아놓은 약속같이 신경써야 할 것들이 떠올랐다. 그 사이사이에 에어컨 설치 기사들과 통화, 비용 조율, 시간 예약을 끼워 넣을 생각을 하니 시작도 하기 전부터 골치가 아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모든 것은 돈이다. 아니, 그것들은 다 핑계였다. 그보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드는 게 탐탁잖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번 가시화된 에어컨 공사는 점점 더 나를 압박해왔다. 아버지는 당신이 미리 중고 에어컨을 사서 조카의 백일을 기념하는 날(고작 사나흘 뒤에 돌아올 주말이었다) 차로 실어 오겠으니 설치 기사와 미리 약속을 해두고 아버지의 지휘, 감독하에 공사를 완료하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일단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다.

최초의 사랑, 부모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알아차렸겠지만 아버지는 성격이 강한 사람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벗어난다니, 어림도 없다. 마치 아무리 빠르게 헤엄을 쳐봐도 그 물 안에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요행히 집주인의 선심 덕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그는 더워지기 전에 에어컨을 달아주겠으니 따로 공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엄마로부터 뜻밖의 말을 전해 들었다. 실은 에어컨을 사고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을 아버지가 부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손자들에게만 베푸느라 내가 등한시된 것을 미안해하고 있었다.

내가 싱글이라서, 여자라서
언제까지나 돌봐야 하는 존재로
그런 ‘잔소리'에 늘 저항하는
부모님과 난 그런 사이가 됐다

부모만 바라보는 조카를 보며
기억하지 못했던 나를 떠올렸다
많은 이들이 택하는 결혼과 출산
이젠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 후일담은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생각을 불러왔다. 나는 요즘 툭하면, 부모님은 속히 종결되기를 바라지만 나는 이대로 유지하길 원하는 싱글 생활에 대해서 생각한다. 부모님의 노화에 대해서, 싱글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돌보고 베풀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부모님에 대해서, 내가 앞으로도 계속 싱글이라면 나의 소속은 부모님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소속을 거부하고 완벽하게 독립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고 답을 찾지 못한 생각의 끝에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기다리고 있다. 혼자서는 설치 기사를 상대할 수 없고 공사 같은 것을 해낼 수 없는 남편 없는 여자, 그래서 나이 든 아버지가 고향에서 서울까지 와서 수고를 해줘야 하는.

혼자서 살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내 목표는 단순하고 확실했다. 유능해서 모든 일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모든 일을 하면서 유능해질 작정이었다. 여자라서 무엇을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나는 공구를 사 모으고 사용법을 익혔다. 서툴긴 해도 타일을 붙이고 선반을 고정하고 전등을 다는 법을 터득하기까지 아버지를 닮은 고집과 지기 싫어하는 마음, 그리고 오기가 작용했다. 그럼에도 부모님 앞에서는 그간의 노력이 다 무색해진다. 무능하고 경험 없는 아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부모님과 나는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이가 됐다. 부모님은 나이 든 사람들 특유의 고집으로 자기주장을 반복하고 나는 부모님 말을 듣지 않기로 작정한, 아니 그 말을 정반대로 거스르는 자식이 됐다. 이를테면 결혼을 하라는 소리를 거듭 들을 때마다 절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한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 위험한 운동이 진정으로 좋아졌다. 돈을 아끼라는 말을 들으면 돈을 써버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내 의지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서로의 고집만 내세울 것 같았다. 두명의 조카가 태어나고 우리 가족이 늘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 모두의 유전적인 형질을 이어받아서 절묘한 조합으로 완성시킨 작은 아이, 서툴게 아기 걸음을 걷다가 마침내 달렸고 말을 배우는 속도가 몹시 빠르고 모든 것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받아내는 존재. 우리는 그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아이를 보면서 부모님의 헌신을 떠올린다지만 싱글인 나는 조카들을 통해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아이 시절을 본다. 어떻게 목을 가누고 어떻게 몸을 뒤집었던가. 또 얼마나 부모님을 사랑했던가. 눈앞에서 그 시절이 생생하게 재현됐다. 누구나 그렇듯이 내 최초의 사랑도 부모님이었다. 기억하기로 태어나서 아홉살 무렵까지, 가장 열렬하게 그들을 사랑했던 것 같다. 뺨을 비비거나 눈을 가만히 보는 것, 안아주는 느낌, 냄새, 부모님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런 사랑도 끝이 난다.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 빠르게 소진되기 시작했다. 딸로 태어난 것이 불행하다고 느꼈을 때,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일찍, 문득 죽고 싶어졌던 십대 초반의 어느 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때, 사랑은 모두 사라졌다. 그것이 더 이상 아이가 아닌 내가 받아들여야 할 세상의 진실이었다.

남들보다 몇 배는 예민하고 아무리 보살핌을 받아도 만족할 줄 모르는 작가들은 이러한 경험을 작품으로 남기곤 한다. 가족은 사랑과 죽음에 이이서 작가들이 가장 집착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가족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악마적인 부모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궁금했다. 작가들이 부모를 악마화하는 것은 그만큼 이상적인 부모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쓴 작품은 인간이 얼마나 어린 시절과 부모의 사랑에 집착하는지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예를 들어 소설가 필립 로스는 ‘아버지의 유산’이라는 에세이에서, 자신이 어렵사리 완성한 우표 컬렉션을 아버지가 남에게 줘버렸던 사건, 아버지의 무심함과 자신의 분노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 에세이는 죽어가는 아버지에 관한 기록이고 이 책을 쓸 당시 필립 로스는 중년의 나이였음에도.

나는 한 편의 가족 드라마를 쓰는 대신에 남자와의 사랑으로 최초의 사랑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 사랑마저 실패할 기미가 보이면 미련 없이 내버렸고 언제나 지난 사랑보다 새로운 사랑을 좋아했다. 더 나은 사랑을 시도할 수 있고 더 많이 사랑받을 수 있는데 왜 모든 가능성을 버리고 낡은 사랑에 안주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죄다 실패하고 말았을 땐 최초의 실패가 있는 곳, 가족으로 돌아갔다. 가족을 떠나고 싶으면 다시 사랑을 찾았다.

결혼과 출산을 택하는 이유

결혼과 출산. 내가 인생에 들이지 않은 이 두가지 일을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하고 기꺼이 수행하려는 이유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최초의 사랑을 만회할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부모님을 이해하거나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함축성도 상징도 없이 스스로 부모가 되는 것, 다시 누군가의 어린 시절로 들어가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단 한 사람이 되는 것. 그러나 이 또한 대개 성공하지 못한다.

내가 또 어떤 시도를 하고 어떻게 실패하고 성공할지 전부 다 알 수는 없다. 한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르게 살고 싶었던 적은 많았어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필립 로스에 의하면 부모의 유산이란 부모라는 사람,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 그들의 존재 자체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일 모두를 의미한다. 그 안에 나의 결점과 한계, 불운이 존재할지라도 나는 그 유산을 바탕으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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