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지는 언어적인 부분에도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심리적으로도 나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끼쳤다. 매일매일 무언가를 ‘공부한다’는 것, 조금씩이라도 성장하고 있다는 것, 빡빡하고 답답한 일상에 조금 고개를 돌려 숨을 쉴 수 있는 시간. 이 모든 것이 조금이나마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약 1년 전부터 내 달력의 매주 목요일은 고정 스케줄로 채워져 있다. 누가 약속을 잡자고 해도 항상 목요일은 어렵다며 후다닥 집으로 도망간다. 나에겐 퇴근하고 어서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매주 목요일마다 약속을 잡지 않는 이유는 바로! 목요일에 구몬 중국어 수업이 있기 때문이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퇴근 후 녹초가 돼 집으로 돌아오면 씻고 침대에 누워 쉬는 게 다였다. 너무 피곤한 탓에 집에 와 무언가를 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가다 보니 혼자 집에 있으면 약간은 외로운데 그렇다고 사람들을 만나자니 막상 또 귀찮고 나가기 싫고. 나에겐 또 맞이해야 할 내일과 부장님이 있으니까… 나만 이런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매번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만 보던 어느 날 문득 생산적인 걸 해보자, 그래! 배움을 한번 실천해보자 마음먹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늘 억지로 배우다 처음으로 정말 배워보고 싶어 먹게 된 마음이었다.
좁은 집에 선생님을 모셨더니…
어릴 때부터 여러 언어를 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가까운 미래에 꼭 중국어를 배워보자는 다짐을 실천하기로 했다. 풀타임 회사를 다니고 있으니 평일에 퇴근 후 학원을 가기엔 문제가 많았다. 보통 학원은 종로나 강남 등 번화가에 밀집해 회사나 나의 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뜩이나 퇴근 후 힘든데 그곳까지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열정까지는 나에게 없었다. 게다가 야근이라도 하게 되는 날엔 수업을 날리게 될 판이다. 주말 수업을 들어볼까? 하고 마음먹었지만 주말엔 꼼짝도 않고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렇게 게을러진 내가 비싼 돈 준 학원을 빠지기라도 한다면 스스로에게 너무 자괴감만 느낄 것만 같았다. 이미 살면서 여러 번 겪어온 그 자괴감 말이다. 그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또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농후하니 일단은 저렴한 가격으로 천천히 시작해보자. 그래서 구몬 성인 중국어를 시작하게 됐다.
등록 후 선생님과 전화로 수업 시간을 잡았다. 첫 수업 날 어색하고 뻘쭘하게 집에서 선생님을 맞이했다. 무언가 민망했다. 어린 시절 넓은 엄마 아빠의 집에서 학습지 수업을 한 느낌과 완전히 달랐다. 가뜩이나 좁은 집에 선생님을 모시려니 뭔가 민망하고 선생님이 불편할 것 같기도 하고. 음료수를 준비해야 하나? 혼자 살아 내가 마실 음료수도 없는데. 게다가 첫 수업 당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에 책상조차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미 이런 좁은 집에서의 성인 수업에 익숙한 듯 보였다. 수업은 선생님이 진도에 맞춰 미리 뽑아 온 학습지를 푸는 것으로 진행됐다. 기본적으로 원어민 음성을 듣고 따라하는 식이다. 과거 구몬 일본어 수업 땐 선생님이 카세트테이프인지 시디인지를 들고 다니며 원어민 음성을 들려줬지만, 2018년엔 스마트펜이라는 하이테크놀로지가 있었다. 굵은 펜같이 생긴 기계를 학습지의 중국어 글자에 갖다 대면 스마트펜에서 원어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음성을 듣고 발음을 따라 읽고 직접 쓴다. 선생님은 뜻을 설명해주거나 잘못된 발음을 교정해준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일주일 동안 풀어야 할 학습지를 내 상황에 맞게 배분해 최대한 매일매일 공부하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역시나 인간은 초등학생 때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결국 공부하는 날은 선생님이 오시기 며칠 전부터다. 어쨌든 일주일 후 선생님이 오시면 지난주 풀었던 학습지의 문장을 스스로 말해보거나 써보는 테스트가 이뤄진다. 어렸을 때야 학습지를 덜 풀거나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선생님께 혼났지만, 어쩐지 성인이 돼서는 그저 민망함뿐이다. “선생님, 하하하 제가 이번주엔 야근이 많아서…. 다음주엔 꼭 제대로 해 올게요…. 하하하하.”
수업을 해보니 한달에 4만1천원(과목마다 가격이 다르다)이라는 저렴한 가격의 이유가 있었다. 아주 전문적인 중국어 과외는 아니고 사실상 자기주도 학습을 선생님이 잠깐씩 봐주는 식이다. 선생님은 해이해지지 않게 자기주도 학습을 정말 자기 주도로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역할이다. 그래서 오히려 성인반은 학습지만 받고 선생님은 오지 않는 옵션도 있다.
학습지를 공부하는 어른들이 나만은 아닌 듯하다. 최근에 이렇게 학습지를 푸는 성인들이 늘어나고 있단다. 2013년에 2만명 정도였던 구몬 회원수가 2016년에는 그 두배로 뛰었다고. 2016년에 4만명 정도였으면 2018년인 지금은 또 훨씬 더 많을 수도 있겠다. 취미생활을 위해 혹은 바쁜 와중에 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성취감을 얻기 위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승진을 위해, 태교를 위해 등등. 아주 다양한 이유로 성인 회원들이 학습지를 찾고 있다. 성취감을 느낄 곳이 잘 없는 성인이 선생님과의 수업을 통해 뿌듯함도 느끼고 칭찬도 받는 그런 과정 자체가 좋다는 사람들도 있다. 어린 시절엔 그렇게 하기 싫어 몇장 몰래 숨기거나 풀지 않아 선생님께 혼났던 아이들이 어른이 돼서는 주입식 교육 밖의 배움에 재미를 깨닫고 있다.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학습지 시장이 침체되다 몇년 전부터 성인들의 유입으로 다시 활성화되고 있을 정도란다.
학습지를 한다는 말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 성인의 수요가 높아지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어찌나 다들 궁금해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공부해보니 어떠냐고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학습지의 장단점은 뚜렷하다. 1년 정도 해본 결과 정말 단기간 안에 ‘빡세게’ 언어 능력을 늘려야 하거나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비추다. 아주 기초적인 부분부터 천천히 ‘반복 학습’을 하는 것이 구몬 학습지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진도 자체도 느릴뿐더러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 등이 많아 속도가 더디다고 느낄 수도 있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나에겐 이 반복 학습이 크나큰 장점이 된다. 크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하도 많이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익숙해지는 거다.
또 학원의 경우엔 정해진 커리큘럼이 있기 때문에 그에 맞춰 바삐 공부해야 하고 잘 모르는 경우 건너뛰게 되지만, 학습지는 내가 원하면 특정 진도 구간을 반복할 수 있다. 진도가 나가다 특히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그 구간을 반복해 풀고, 한 단계가 끝나면 그 단계에서 어려웠던 부분을 다음 단계 가기 전 한번 더 반복하는 식으로 자기 능력에 맞게 진도를 조정할 수 있다. 물론 학습지도 단점은 있다. 선생님이 원어민도 아니고 전문적인 과외 선생님이 아니기 때문에 과외 같은 세세한 배움을 상상한다면 적합하지 않다. 특히나 선생님이 오지 않는 학습지의 경우엔 결국 주변에 묻거나 구글신을 찾아야 한다.
매일 무언가를 공부한다는 것
“아니 그래서 어느 정도 하냐니까?”
혜화붙박이장 회원은 2A, A, B 단계를 거쳐 얼마 전 C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곧 1년이 다 돼가는데, 초반 몇달은 편의점에서 우연히 만난 중국인들이 하는 문장의 단어들을 몇개 주워들어 대충 뉘앙스를 파악했다. 물론 그 뜻이 맞는지 아닌지 모른다. 그러다 몇달 전 다녀온 대만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안부를 대만 친구와 떠듬떠듬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하루는 대만 친구가 다른 대만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던 도중 나온 간단한 대화, “너 어디냐”, “나 지금 가오슝에 잠깐 왔다”라는 문장을 알아듣고 무척이나 뿌듯했다. 알아들은 나를 보고 대만 친구도 놀랐다.
학습지는 언어적인 부분에도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심리적으로도 나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끼쳤다. 매일매일 무언가를 ‘공부한다’는 것, 조금씩이라도 성장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혼자 있다 선생님을 매주 만나 중국어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라도 나눈다는 것. 중국어를 쓰는 친구들과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것. 빡빡하고 답답한 일상에 조금 고개를 돌려 숨을 쉴 수 있는 시간. 이 모든 것이 조금이나마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회복의 단초가 됐다. 그래서 학습지를 추천하느냐고 물으면 늘 강력하게 추천한다고 대답한다.
이제 내 목표는 대만 친구와 다시 만나면 떠듬떠듬하더라도 일상적인 대화를 말하고 알아듣는 것이다! 加油!(파이팅)
혜화붙박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