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공개된 제주 4·3 사건 관련 수형인 명부 표지. 가운데 큰 글자인 ‘수형인 명부’ 오른쪽에 ‘단기 4281년 12월, 단기 4282년 7월 군법회의분’, 왼쪽에 ‘제주지방검찰청’이라고 적혀 있다.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제공
제주 4·3 당시 군사재판(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수감된 수형인들이 제기한 재심 청구의 최대 걸림돌은 판결문이 없다는 점이다. ‘유죄의 확정판결’을 다시 판단해달라는 재심 청구에는 원심 판결문이 있어야 하는데 법적 절차를 지키지 않았던 군사재판은 판결문도 작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일한 공식기록인 ‘수형인 명부’로 당시 재판과 판결을 입증할 수 있느냐가 재심 개시 여부의 핵심 쟁점이다.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제갈창)는 19일 제주 4·3 관련 수형인들의 재심 청구에 대한 2회 심문기일을 열고 수형인 명부 등과 관련해 김종민 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전문위원에 대한 증인신문을 진행했다. 제주 4·3 관련 수형인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법적 절차를 지키지 않고 진행된 군사재판을 거쳐 인천·대전·대구 등 전국 형무소 14곳에 나눠 수감된 사람들이다. 4·3 수형인에 대해서는 증언만이 전해져 왔으나, 1999년 추미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받은 수형인 명부를 공개하면서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수형인 명부에는 1948년 12월 열린 군사재판에서 형법 제77조 내란죄로 처벌한 871명, 1949년 7월 열린 군사재판에서 국방경비법 제33조 간첩죄 등으로 처벌한 1659명 등 총 2530명의 이름, 주소, 판결, 언도 일자, 형무소 등이 적혀 있다.
증인으로 나온 김 전 위원은 먼저 “1948년, 1949년 이루어진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은 재판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수형인 명부에 대해 “군인들이 철수하면서 제주지방검찰청으로 넘겼고, 검찰청이 보관할 이유도 없고 파기할 수도 없어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시켜 보관된 것으로 생각된다”며 “수형인 명부에 기재된 2530명 중 일부 이름, 본적지가 다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실제 증언과 일치하기 때문에 당시 재판의 존재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앞서 지난 2월에 열린 1회 심문기일에서 “일부 학자들은 수형인 명부가 사후에 조작됐다고 주장한다. 이 수형인 명부를 근거로 재심 청구가 가능한 것인지 문제가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제주 4·3 수형인들의 원심 판결문은 어느 국가기관도 보관하고 있지 않고, 판결문이 없는 이유도 명확하지 않다. 당시 군사재판이 기본적인 재판 절차도 지키지 않아 처음부터 작성되지 않았으리라는 추정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부가 수형인 명부의 신빙성을 인정할 경우, 당시 군사재판이 열렸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커진다.
한편,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지난 2월7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4·3 군사재판과 관련해 “수형인 명부는 존재하는데 적법 절차를 거쳐서 군사재판이 행해진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상적인 재판이라고 볼 수가 없다”고 답변한 바 있다. 군사재판은 열렸지만, 적법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청구인 쪽에선 재판의 형식조차 갖추지 못한 군사재판으로 고통받은 4·3 수형인들에게 다시 재판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주/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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