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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큰 기대도 실패도 없는, 감정의 안전지대

등록 2018-01-21 09:28수정 2018-01-21 09:40

[토요판] 이런, 홀로!?
내가 강남역으로 가는 이유

특색 없는 강남역은 기대도 없다
그래서 상대에게 집중할 수 있다
즐비한 대형서점과 영화관에서
‘실패의 충격’을 완화할 수도 있다

서울 이남과 강북 잇는 교통 메카
하루 수십만명이 찾고, 사라진다
애틋함 따위 공유하지 않아도
오늘도 무수한 인연이 시작된다

강남역은 일일 유동인구 30여만명, 지하철 이용 인구 20여만명에 달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공간을 빨리 소비하고, 사라지고, 다시 찾는다. 그러하니 이곳은 특정한 누군가와 애틋함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지대이기도 하다. 게티이미지뱅크
강남역은 일일 유동인구 30여만명, 지하철 이용 인구 20여만명에 달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공간을 빨리 소비하고, 사라지고, 다시 찾는다. 그러하니 이곳은 특정한 누군가와 애틋함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지대이기도 하다. 게티이미지뱅크
“네가 그랬잖아.”

지하철역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연인들이 큰 목소리로 싸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기웃거리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 시점에서 그들에게 공공질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서로를 깊게 사랑했으며, 그 깊이만큼 서로에게 아쉬워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과거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나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인가. 이제는 그 누구와 목소리를 높이면서 무엇을 증명하거나,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는다. 나의 경험상 대개의 저러한 과정은 정신적, 감정적 소모를 동반한다. 아무리 평균수명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30대는 30대다. 누구를 위해 저렇게 싸우나 싶은 생각에 갈등을 피한다. 무엇보다 상대방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 간명한 진리를 배웠다. 이제는 간이든 쓸개든 절대 내주지 말아야 할 소중한 나의 일부이자 정체성이다. 이러한 의식의 바닥에는 ‘마음의 평화’가 있다. 심연에 깔린 ‘마음의 평화’는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상대방에 대한 애정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고.

소개팅에 적합한 이유

30대의 연애는 몸을 사린다. 여전히 부나방과 같이 달려드는 연애를 하는 또래들도 많으나, 그들도 예전 같지는 않다. 상대방을 깊게 탐구하고 시험하는 자세는 낭비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는 빠른 의사결정을 선호한다. 그런데 상대방을 온라인에서만 만나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친구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만나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빠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전략적인 베이스캠프가 필요하다. 좋은 시절, 인생의 황금기인 20대를 다 보낸, 30대 남성인 나는 이제 조급하다. 그래서 쓸데없는 수고를 덜 하고 빠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결정의 장소가 어딘지 골똘히 생각한다. 바로 떠오르는 단 한 곳이 있으니 그곳은 바로 강남역이다.

강남역은 서울 및 경기도 이남 지역과 강북을 잇는 교통의 메카다. 요즘 인근 경쟁 상권들이 치고 올라와 강남역이 예전만 못하다는 말은 있지만, 강남역은 여전히 강남역이다. 경기도에서 올라오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강남역이다. 강북에 거주하는 많은 회사원들이 출근을 위해 강남역으로 모여든다. 한남대교 방향으로 시원하게 뚫린 도로는 계획도시의 면모를 보여준다. 대로변에는 대기업의 프랜차이즈가 있고, 이면도로에는 식당과 술집, 카페가 즐비하다. 강남역 남쪽에는 회사가 많다. 북쪽에는 상대적으로 학원, 극장들이 있어 젊은층이 많이 찾는다. 이처럼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공간이 바로 강남역이다.

강남역은 사실 특색이 없는 상권이다. 요즘 뜨는 망원동이나 경리단길처럼 개성이 넘치는 상권은 아니다. 독특함은 없으나 한편으로는 안전하다. 욕쟁이 할머니가 상주하는 가게는 강남역에 없다. 욕쟁이 할머니가 사장님인 식당에서 초면인 사람을 만난다고 상상해보라. 아마도 음식은 코로 들어갈 것이고 귀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아직 친하지도 않은데 욕쟁이 할머니의 각종 간섭과 불편한 참견을 함께 감내하고 싶지는 않다. 강남역의 식당들이나 카페들은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맛을 제공하기에 큰 기대 없이 상대방을 만나기 좋은 장소다.

여행지에서 만난 연인들은 곧 헤어진다는 말이 있다. 여행지라는 환상이 뿌옇게 끼어 있으니 환상이 증발하면 이별이 찾아온다. 여행지가 아닌 일상에서도 사랑은 이어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일상과 맞닿은 장소인 강남역에서 더욱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지 않을까? ‘비포 선라이즈’는 멀고, 강남역은 가깝다. 게다가 지금은 환상이 아닌 정확한 실체를 파악해야 할 시기다.

간혹 너무 잘하려고 무리수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제가 진짜 진짜 맛있는 집으로 안내할게요!” 또는 “유명한 맛집이기는 한데 자리가 좀 불편하고 구석이에요.” 상대방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 수 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 남자는 지금 내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맛집 탐방에 목을 매는구나’라고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지금 ‘수요 미식회’ 찍는 거 아니다. 이 시점에서는 맛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맞은편에 앉은 상대방에 대한 집중과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나도 강남역만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당시 난 상대방을 가급적 좋은 곳에 데려가겠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그 의무감 때문이었을까? 이제 막 만나기 시작한 그녀와 남산의 유명한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탁 트인 시야, 흠잡을 데 없는 음식, 쾌적한 환경, 친절한 직원들, 모두 훌륭했다. 상대방도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 이후 남산의 호텔을 능가하는 좋은 장소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었다. 장소에 대한 피로감이 상대방에게 전이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멀어져갔다. ‘남산 호텔’이 나에게 준 교훈은 “처음부터 너무 힘 뺄 필요 없다”였다.

무엇보다 강남역이 만남을 시작하는 장소로서 더욱 적합한 이유는 ‘실패의 충격’을 완화할 장치가 많기 때문이다. 누구도 원치 않지만 “꽝, 다음 기회를” 같은 불운한 가능성은 존재한다. 이때 괘념치 말고 다가오는 불운을 빨리 떨쳐낼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강남역은 이러한 기준에서도 탁월하다. 대형서점도 있고, 극장도 있고, 지하상가도 있다. 당장 속은 쓰리겠지만,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제 빠른 회복. 강남역 인근의 컴컴한 극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거나 대형서점에서 베스트셀러의 표지를 넘겨도 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인연이 아님을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아도 되는 곳,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곳이 강남역이다.

그래서 만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소개팅의 첫 장소로서 강남역은 더욱 적합하다. 카톡 프로필 사진에서 아이돌을 후려치는 미모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에서 느껴지는 재기발랄한 위트에 ‘혹시 이 사람인가’ 하는 환상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경험상, 이러한 환상은 직접 만나는 시점에서 바로 돌변할 수 있다. 환상과 현실의 차이가 클수록 충격은 더욱 커진다. 물론 넋 놓고 당할 수는 없기에 빠른 정상화가 필요하다. ‘미적지근한’ 아니요의 경우도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 예를 들면, 나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만 상대방은 나를 별로라 생각하는 경우 또는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 눈치이지만,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아쉬운 패배일 텐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쉬운 게 아니라, 패배다. 빨리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수밖에. 새로운 사람도 물론 여기, 강남역에서 만난다. 사람은 바뀌지만, 장소는 그대로이다.

모두가 점유하는 공간

한 문인이 “헤어진 연인이 선물한 음악은 일종의 망령이 되어 떠돈다”고 말했다. 이제는 헤어졌지만, 그 음악을 들으면 그 사람이 생각난다는 말이다. 어디 음악만 그러한가? 나에겐 장소도 그렇다. 성북동의 조용한 카페, 이태원 경사로에 있는 술집, 광화문 호텔의 식당. 그곳에 가면 과거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 엄습한다. 마치 지뢰와 같아서 깊었던 애정에 비례하여 망령들은 되살아난다. 그러하니 깊게 사랑하기 전까지는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게 ‘마음의 평화’에 이롭다. 강남역은 일일 유동인구 30여만명, 지하철 이용 인구 20여만명에 달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공간을 빨리 소비하고, 사라지고, 다시 찾는다. 그러하니 이곳은 특정한 누군가와 애틋함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지대이기도 하다. 빠른 교체가 일어나지만, 누구도 크게 마음을 쓰지 않는 곳. 장맛비처럼, 금방 씻겨 나가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무수한 인연의 시작, 강남역은 오늘도 연인을 맞는다.

미스터 캄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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