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뜬 ‘선유도 카페 거리’ 덕분에 서울 지하철 선유도역 3번 출구 부근에는 좋은 카페가 쭉 자리하고 있다. 주말 느지막이 일어나 밀린 일을 하기 위해 근처 분위기 좋은 카페로 엉금 기어가도 외부인들이 많지 않아 조용하고 당황할 일이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작년, 햇수로 7년을 산 혜화를 떠나 선유도로 이사왔다. 7년간 살았으니 생활공간이 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동네에 호기심이 많은 나는 혜화 구석구석을 살피곤 했다. 산책을 하며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는 것도 흥미로웠고 떡볶이집 투어도 재미였다. 흔히 ‘대학로’라고 불리는 혜화역 근처의 번화가를 떠나 학교와 원주민들이 사는 명륜동 근처를 살고 누비며 새로 생긴 조용한 카페에 들러 책을 읽기도 했다. 대학로와 살짝 떨어진 곳에 10년 넘게 자리잡고 맥주와 칵테일을 파는 단골 맥줏집에 앉아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렇게 7년 동안 곳곳을 얼마나 누볐겠나.
그래서 혜화는 나에게 단순히 대학 시절 잠깐 머물다 가는 공간이 아니었다. 대구에서조차 느끼지 못했던 오롯한 내 공간에 대한 애정과 정착의 안정감을 느꼈던 공간이었다. 그곳의 공간과 그곳의 공기와 그곳의 사람들에 무한한 애정과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던 혜화를, 조금 오글거리지만 정말로 사랑했던 혜화를 ‘통근 시간 한시간’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결국 저버리고 말았다.
왜 선유도였을까
회사 근처의 적당한 지역들을 나열했다. 영등포, 신도림, 구로, 당산, 선유도 등. 그중 왜 하필 선유도였을까. 글쎄, 그냥 사람들이 잘 모르고 그래서 다른 지역들보다 왠지 덜 번화가이거나 그나마 조용할 것 같았기 때문에. 언제나 내가 그렇듯 잘 알아보지도 않은 채 선유도의 집 몇 군데를 돌아다니고선 덥석 계약을 해버렸다. 어차피 내 사랑 혜화를 떠나 낯선 곳에 정착할 텐데 어디든 그렇게 큰 차이가 있겠냐며, 그저 저렴하고 깨끗한 방 조건에 맞는 집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렸다. 친구들에게 선유도 쪽으로 이사 갔다고 하면 다들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 되묻는다. “섬에 이사를 갔다고?”
재작년인가 재재작년 즈음 잠깐 선유도가 반짝하고 힙플레이스로 뜬 이후로 사람들에게 선유도는 진짜 ‘그 섬 선유도’로밖에 기억되지 않는 듯하다. 그럴 때마다 “아니 그 진짜 선유도 섬 밑에 보면 지하철 9호선 선유도역이라고 있어. 거기 근처에 살아”라고 하지만 잘 모른다. “아 그 왜 당산역 있지. 당산 근처야”라고 하면 그나마 감을 잡는다. 그만큼 선유도는 데이트 명소인 진짜 ‘선유도’를 빼고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지역이다.
사람들은 대체 거기에 왜 살게 됐냐고 뭐가 좋냐며 자주 묻는다. 글쎄. 혜화를 떠나고서 거의 1년이 다 돼가는 지금, 가끔 혜화에서 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혜화 향수병이 짙지만, 그래서 하루에 몇 번이나 직방, 다방을 둘러보기도 하지만 결국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선유도에 대한 갓 싹튼 애정 때문이다. 당장 떠나가려는 마음이 들다가도 선유도의 매력에 발목이 잡힌다. 다시 또 이런 곳에 살아볼 수 있을까.
사실 선유도역 근처는 특별할 게 없다. 시끄럽지도 않고 빼어나지도 않다. 그래서 나에겐 편하다. 우선 동네의 연령대가 낮은 편이다. 주 서식지가 혜화와 종로였던 시절, 수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만나며 힘든 경험을 많이 했더랬다. 물론 모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그네들 대부분이 향유하고 있던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와 오지랖 문화,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개인적 공간의 침범으로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런 나에게 온통 2030 직장인과 신혼부부들이 모여 사는 선유도는 고요하고 안전한 공간이다. 선유도는 아파트가 거의 없고 빌라들이 모여 있어 신혼부부나 젊은 사람이 많다. 밤에 산책을 나가도 길거리에 들어앉아 막걸리를 자시는 어른들도 계시지 않고 풀린 눈으로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술 취한 50, 60대도 없다.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산책을 하거나 유모차를 끌고 나온 신혼부부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연령대가 높다 해도 20대 딸과 함께 나온 엄마, 아빠가 전부다. 이러한 환경의 이유에는 동네 자체에 번화가가 없는 것이 크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걸어서는 10분 남짓 걸리는 당산역이 주변에 있어선지 번화가가 선유도로까지 들어오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직장인과 신혼부부가 많은 만큼, 이 주변의 상권은 1인가구 혹은 2인가구처럼 소형 가구 맞춤형이 된 곳이 많다. 근처엔 마트 직영 편의점이 많고 이런 편의점에선 1인 및 소형 가구를 위한 소포장 식재료를 주로 판다. 프로 편의점 애용자로서 당장 회사 근처의 편의점만 가봐도 선유도의 편의점과 그 느낌이 다르다. 큰 마트에 가 많은 양의 식재료를 사며 버릴 걱정을 미리 하지 않아도 된다. 보통의 편의점에서 팔지 않는 식재료를 사기 위해 굳이 이른 시간에 멀리 떨어진 대형 마트로 가지 않아도 된다. 선유도 근처엔 대형 롯데마트와 코스트코도 있어 대량으로 살 물건을 쟁여놓기에도 좋다. 얼마 전엔 역 근처에 이마트 노브랜드 매장도 생겼다. 다이소는 당연히 역 안에 있다. 소형 마트나 편의점에 비해 점포 수가 적은 대형 마트를 가기에 부담스러운 1인가구에게 접근성 높은 노브랜드 매장은 삶의 질을 행복하게 올려준다. 지금도 퇴근길에 노브랜드 매장에서 구매한 아주 저렴한 와인 한병을 마시고 있다.
홍대에서 합정까지 젠트리피케이션이 이뤄지면서, 일부는 선유도에 정착하기도 했다. 잠깐 뜬 ‘선유도 카페 거리’ 덕분에 선유도역 3번 출구 부근에는 좋은 카페가 쭉 자리하고 있다. 정말 잠깐 떴기 때문일까, 주말에 가도 그닥 사람이 많지 않다. 카페 주인들에게야 좋지 않은 소식이겠지만 선유도 주민으로선 사실 편하다. 주말에 느지막이 일어나 밀린 일을 하기 위해 근처 분위기 좋은 카페로 엉금 기어가도 외부인이 많지 않아 조용하고 당황할 일이 없다. 서쪽으로 안양천이 북쪽엔 한강공원이 자리잡은 지역인데도 외부인 유입이 적다. 바로 근처에 합정과 당산이 있어서일까. 선유도에서 합정은 버스로 10~15분 정도면 도착한다. 젠트리피케이션 탓에 번화가 대부분이 프랜차이즈 카페로 이뤄진 곳들과 달리, 선유도역 부근은 아직 각자의 공기와 색깔을 지닌 개인 카페들이 자리잡고 있다. 3번 출구 카페 골목 외에도 구석구석 개인 카페가 많고 특히 원래 공장 자리였던 곳을 개조한 특색 넘치는 카페도 많다.
다양한 카페뿐만이 아니라, 아예 커피 원두와 기타 기구를 파는 대형 커피 공장과 주말만 되면 꾸려지는 플리마켓, 캠핑 공간의 느낌을 재현한 비스트로, 마니아들을 위한 바이크숍, 독립 서점, 이런 곳에 있을지 몰랐던 스테이크집까지, 기존의 원주민과 한데 어울리며 꾸며진 젊은 사람들의 공간이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다. 날이 좋은 주말 낮, 게으르게 동네를 방향 없이 산책하다 보면 족히 20년은 돼 보이는 밥집과 갓 생긴 힙한 가게들이 바로 이웃으로 자리잡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이 모습이 이질적이지 않다. 오히려 선유도라는 공간을 각자의 느낌과 의미로 재해석하며 서로 어우러지는 듯하다. 나는 이런 카페도 좋아하지만 오래된 맛있는 음식점도 좋아한다.
감수해야 할 것들
선유도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정적인 공간이다. 음악 플랫폼 톱 100 순위에 드는 노래들이 나올 법한 공간보다, 조용한 재즈 음악이 더 어울리는 곳. 천편일률적인 해석보다 개인의 느낌과 감성이 묻어 있는 곳. 그것도 오래된 해석과 지금의 해석이 다투지 않고 공존하는 곳. 물론 이 선유도도 단점은 당연히 있다. 조용한 곳은 보통 교통편이 불편하다. 선유도역 역시 환승역이 아닌 9호선 지하철이 서는 역이다. 급행을 타지 않으면 너무 오래 걸리고 급행을 타기 위해선 당산역까지 가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서울의 서남쪽에 있다 보니 홍대와 합정 부근을 넘어선 서울의 중심부를 가려면 시간이 꽤 소요된다. 버스 편도 영등포구와 구로구를 제외한 곳을 가기엔 불편할 수 있다. 조금 북쪽에 있어도 서울 중심부 어디든 갈 수 있었던 혜화의 교통편과 비교해봐도 선유도 역이 조금 불편하긴 하다.
혜화붙박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