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런, 홀로!?
모욕적인 공격에 대처하는 법
모욕적인 공격에 대처하는 법
누군가 나에게 이유 없이 공격을 가할 경우, 그 사람이 약점이라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 생각한다. 굳이 남에게 모욕을 줘가면서 그가 얻고자 하는 만족감과 우월감에 대해서도. 그 실체를 알고 나면 너무나 얄팍하고 저열해서 분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능력되면 혼자 살아’ ‘예쁜데 왜?’
앙갚음하면 ‘사이다’가 되고
방어에 실패하면 ‘고구마’가 된다
‘센 여자’가 정말 주체적일까…
모욕으로 그가 얻는 건 무엇일까…
깨달음 뒤 ‘흉내내기’를 접었다
분노의 동력을 비축하기로 했다 외모 공격형은 이보다 훨씬 고전적이고 흔해빠졌다. 만약에 나이 든 싱글 여성의 외모를 두고 품평이 시작되면 외모가 어떻든 간에 결론은 단 두 가지뿐이다. ‘예쁜데 왜 남자가 없지?’ 혹은 ‘저러니 결혼을 못했지(쯧쯧)’. 이 유형은 두 배로 모욕적이라서 일타쌍피의 효율성을 자랑한다. 게으르고 창의력이 고갈된 자들이 특별히 이 유형을 선호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마지막으로 부러움을 가장한 수동 공격형이 있다. ‘넌 자유로워 좋겠다’,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라’와 같은 말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절대 속지 마라. 남의 처지를 이용해서 자신을 연민하고 우월감을 채우려는 수작일 뿐이니까. 이제 이 모든 모욕 앞에서 소위 말하는 사이다가 될지 고구마가 될지는 개개인의 역량에 달렸다. 사이다는 가히 폭발적으로 소비된, 2017년 최고의 히트상품이다. 나를 모욕한 사람에게 서너 배쯤 강력한 모욕을 돌려줬더니 상대방은 꼬리를 내리고 구경꾼들은 환호하더라! 이 얼마나 짜릿하고 즐거운 일인가.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한마음으로 사이다에 열광했다. ‘사이다를 주세요!’, ‘사이다는 언제 나와요?’ 그런데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인지라 모욕을 당하고도 되갚아주기는커녕 한마디 받아치지도 못한 채 방어에 실패한 패배자를 일컫는 용어도 생겨났다. 이는 전해 듣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막힌다고 해서 ‘고구마’로 불린다. ‘핵고구마’, ‘발암고구마’가 모두 여기서 파생된 유행어다. 사이다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따분하고 가식적인 세계에서 소영웅으로 등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좋은 사이다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말이 나온 김에 사이다를 터뜨리는 방법을 알아보자. 사이다 서사는 어떤 모욕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담대함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자면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공격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모욕을 당할지 알 수 없으니까. 동시에 모욕을 행하는 주체가 가진 약점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아두라. 정보가 부족해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는 언감생심, 사이다를 터뜨릴 수 없다. 여기에 나름의 통찰과 유머가 가미되면 더욱 훌륭한 사이다가 된다.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동시에 돌려 까는 여유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한 번의 사이다를 위해서는 억만 번의 모욕을 겪고 모욕 장인의 경지에 오른 것 같은 내공이 요구된다. 이런 이유로 실전에서 사이다를 터뜨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막상 모욕을 당하면 ‘이 사람이 나에게 왜 이러나?’, ‘내가 뭘 잘못했던가?’를 생각하고 별말도 아닌데 내가 예민한 것은 아닌지 검열부터 하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공격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한 세월이 흐른다. 공격 타이밍을 놓치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화가 마무리된다면? 그토록 혐오하던 고구마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고구마가 됐다는 수치심과 자책이 분노를 압도한다. 이렇게 고구마를 향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고구마스러운 인격을 밀어내고 ‘강하고 센 여자’라는 새로운 페르소나를 소환하는 것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센 여자의 치솟는 인기는 사이다의 유행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나 또한 사이다 사례를 연구하면서, 섣불리 모욕할 엄두조차 낼 수 없도록 센 여자가 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센 여자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도대체 센 여자가 뭔가? 정확히 어떤 여자가 센 여자인가? 미국에서는 우리보다 한발 앞서서 나쁜 년(bitch) 캐릭터가 유행한 바 있다. 나쁜 년은 ‘이 구역 미친년은 나야’라는 명대사를 남긴 드라마 <가십걸>의 블레어, <왕좌의 게임>의 서세이, 영화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던, <미스 슬로운>의 슬로운으로 끊임없이 분열되고 변주되며 새롭게 등장한다. 그만큼 인기가 많다는 증거다. 이들에 비하면 한국 대중문화 속의 센 여자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귀여운 수준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은수와 <건축학개론>의 서연은 대표적인 한국형 나쁜 년으로 쌍둥이처럼 닮았다. 둘 다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는 것처럼 굴어놓고 돌연 상처를 주면서 돌아선, 남자의 마음을 가지고 논 여자들이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나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새로운 스타일의 나쁜 년으로 앞서 말한 여성들보다 훨씬 사악하긴 하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또 ‘자식을 잃고 분노하는 어머니’라는 면죄부가 주어진다. 끝 간 데까지 간 여성 악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차이점보다도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동서고금의 센 여자들을 모두 아우르는 공통점이다. 극중에서 이들은 예외 없이, 굉장한 매력을 발산한다. 따지고 보면 악해서가 아니라 매력적이라서 위협적이다. 앞서 언급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이 하나같이 미인인 점도 이를 증명한다. 이들 대부분이 외모를 화려하게 꾸미고 자신의 매력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거침이 없다. 흔히 말하는 센 여자가 화장이 센 여자를 지칭하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여성들이 쓰는 화장품이나 향수 이름에 독, 유혹, 타락, 불법 같은 단어들이 반복해서 쓰이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결론은 사이다를 터뜨리는 것보다 센 여자가 되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거다. 어렵게 센 여자가 된다고 해도 센 여자의 위력이 주체적으로 작동하는지 그 또한 의문이다. <비치>(bitch)를 쓴 작가 엘리자베스 워첼은 저서에서 ‘센 여자로 산다는 것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이분화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밝힌 바 있다. 알면 두렵지 않다 그래서 사이다도, 센 여자도 되지 못한 자가 갈 길은 고구마뿐인가?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으면서 반등의 기회도 얻었다. 깨달음의 핵심은 ‘사람은 누구나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지, 뻔히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누군가 나에게 이유 없이 공격을 가할 경우, 그 사람이 약점이라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 생각한다. 굳이 남에게 모욕을 줘가면서 그가 얻고자 하는 만족감과 우월감에 대해서도. 그 실체를 알고 나면 너무나 얄팍하고 저열해서 분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정당한 공격으로 방어전을 치르고 싶다면? 그럴 때조차도 어울리지 않는 세고 강한 페르소나를 흉내 내며 사이다를 의식하는 짓은 그만뒀다. 경멸을 담은 눈빛이나 무관심한 태도와 같은 비언어적인 표현을 쓰거나 정색하고 반박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분노의 동력 또한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힘을 사소한 일에 써버리지 않고 비축하기로 했고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분 좋은 선택이었다. All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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