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런, 홀로!?
나의 생리 일대기
나의 생리 일대기
높은 ‘진입장벽’을 넘고 나니,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겨우 닷새 정도 생리컵을 사용했지만 장점은 차고도 넘쳤다. 피부 발진이나 가려움증도 사라졌고, 생리가 끝나고 나면 칼같이 찾아왔던 질염 증상도 눈에 띄게 완화됐다. 게티이미지뱅크
호르몬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생리대는 잘 숨겨야 한다”
불편함과 고통은 숨길 수 없어 생리대 유해물질 논란 이후
우연히 만난 신세계, 생리컵
발진과 가려움, 냄새가 사라졌다
‘피자매’들에게 손을 내밀어라 ‘호르몬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인생에서 직접 경험한 만고불변의 진리 가운데 꼭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문장을 고를 것이다. 호르몬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특히 황체호르몬은 더 그렇다. 프로게스테론으로도 불리는 황체호르몬은 주로 여성 난소의 황체나 태반에서 만들어진다. 한 달에 한 번 주기로 성숙한 난자가 난소에서 빠져나가면 황체는 황체호르몬 분비를 시작한다. 이 호르몬은 임신을 대비해 자궁 내막을 두터워지게 하는데, 수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황체는 더 이상 황체호르몬을 분비하지 않는다. 이후 2~3일 내에 자궁 내막이 떨어지면서 생리가 시작된다. 생리 전 느끼는 미칠 듯한 식욕의 원인은 바로 이 황체호르몬 때문이다. 황체호르몬은 식욕을 돋운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돋운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임신을 위해서는 자궁 내벽이 두터워져야 하는데, 외부에서 공급되는 영양분이 필요할 터다. 갑자기 단것이 당겨 편의점에서 초콜릿을 주워 담고 있거나, 밤 11시에 라면을 끓여먹고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고 있다면 내 황체가 열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식욕이 뚝 떨어지는 시기가 오면, 퇴근길 마트에 들러 ‘원쁠원’(1+1) 행사를 하는 중형 생리대를 사다가 화장실 수납장에 주섬주섬 채워 넣는다. 곧 다가올 ‘그날들’을 맞이하는 의식이자, 생리를 겪었던 지난 13년간 매월 내가 겪은 진리의 순간이었다. 생리컵을 만나기 전까지는. 생리대, 그 지긋지긋한 내 인생 첫 ‘그날’은 중학교 1학년 초겨울에 찾아왔다. 소변을 보고 났더니 팬티에 갈색 피가 묻어 있었다. 직감적으로 엄마에게 알려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지를 추스르고 설거지하던 엄마에게 다가가 말했다. “엄마, 팬티에 뭐가 묻었어.” 엄마는 화장실에서 내 팬티를 확인하더니, 조용히 수납장에서 생리대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생리 시작했구나. 이제 너도 여자가 된 거야.” 엄마는 직접 흰색 생리대를 팬티에 붙이며 시범을 보였다. “생리대는 무조건 잘 숨기고, 안 보이게 잘 버려야 한다”고도 했다. ‘생리를 해야 여자가 된다’는 엄마의 말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생리대는 무조건 잘 숨겨야 한다’는 조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아기가 만들어진다’는 10여년 전 성교육 교과서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사춘기를 맞은 아이들의 육체적 성장과 성적 호기심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이 간극은 남녀공학 중학교라는 현실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의 가방을 뒤져 생리대를 찾아내 흔들어대며 “과자인 줄 알았어”라고 놀려댔다. 여학생들은 울거나, 짐짓 담대한 척 화를 내거나 했다. 생리대는 더욱 가방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갔고, 나 역시 쉬는 시간 주위의 눈치를 보며 생리대를 꺼내 화장실로 도망치듯 뛰어가야 했다. 가방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생리대의 해방은 여자고등학교에 가고 나서야 찾아왔다. “생리대 있는 사람! 나 좀 빌려줘!” 생리가 ‘터진’(급작스러운 생리를 보통 이렇게 표현했다) 친구는 다급한 표정으로 생리대를 찾았고, 친구들은 너나없이 자신의 가방을 뒤져 생리대를 뭉치로 건넸다. 여고생들의 교실에서 생리대는 가방 깊숙한 곳을 벗어나 허공을 날아다녔다. 우리는 생리대를 ‘준다’거나 ‘받았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빌렸다’거나 ‘빌려줬다’고 표현했다. 내가 지금 생리대를 빌렸지만 언젠가는 너 역시 급하게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고, 그땐 나도 흔쾌히 네게 ‘빌려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히 ‘피로 맺어진 자매애’의 모습이었다. 생리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다 사용하는,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 생리대는 자매애를 확인하는 징표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불편함과 괴로움이 따르는 존재였다. 한여름 생리대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불쾌함. 혹여 생리대에서 생리혈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생리대를 갈아야 하는데 화장실을 찾지 못할 때의 초조함. 생리대를 둘러싼 불편함은 대부분 심리적인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지난달 생리대 유해물질 논란이 불거졌다. 여성환경단체가 시중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생리대를 조사해보니, 대부분의 제품에서 독성이 포함된 총휘발성유기화합물(TVOC)이 검출됐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사를 보던 그때, 나는 생리를 하고 있었다. 분노보다도 허무함이 먼저 밀려왔다. 유해물질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 13년간 생리대를 사용하면서 ‘생리대에 유해물질이 있고, 그게 인체에 유해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 나 스스로가 더 무서웠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비슷한 무력감에 빠졌을 터다. 생리대 종류에 따라 생리 주기나 양이 들쭉날쭉하고, 생리대와 맞닿는 사타구니 피부에 발진이 일어나고, 생리통이 유난히 더 심해지거나, 생리가 끝나고 나면 질염이 따라왔던 증상들. 물론 그 모든 문제가 생리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리대를 이용한 지난 수십년간, 그 모든 문제가 ‘예민한 내 몸’ 때문이라고만 생각해왔던 여성들의 억울함이 터져나오기엔 충분한 경험들이었다. 생리대 실험의 객관성, 제품명 공개 여부 등 소모적인 논쟁 속에서 갈 길을 잃은 억울함들은 생리대 외의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현실 앞에서 더 커졌다. 생리대가 아니면 뭘 사용해야 할까? 그나마 부작용이 덜하다는 외국의 유기농 생리대는 매달 쓰기엔 너무 비쌌고, 그렇다고 하루에도 예닐곱개씩 이용하는 면생리대를 손빨래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한숨을 푹푹 쉬며 인터넷 검색을 하다 생리컵이라는 존재를 발견했다. 의료용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엄지손가락만한 길이의 생리컵. 질 속에 넣으면 자궁에서 떨어지는 생리혈을 받아내는 도구. 온라인에서 생리컵에 대한 수많은 간증을 확인한 뒤 나는 프랑스제 생리컵 두 개를 3만원에 주문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생리컵을 꺼냈다.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숱하게 시뮬레이션을 해봤지만, 정작 실제로 사용하려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생리컵 입구를 좁게 구겨 질 안으로 넣으면 그 안에서 제대로 펴지면서 진공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노하우가 없으니 자꾸만 질 밖으로 빠져나왔다. 당장 주변에는 조언을 구해볼 만한 친구도 없었다. 물어볼 곳이라곤 인터넷 검색이 전부였다. 다행히 유튜브엔 생리컵 이용법부터 세척법까지 알려주는 수많은 피자매들의 영상이 있었다. 한 손에는 유튜브 영상이 틀어진 휴대폰을, 한 손에는 구겨진 생리컵을 들고 한시간가량 낑낑대고 나서야 드디어 제대로 된 사용법을 익혔다. 13년 만에 찾은 생리컵 높은 ‘진입장벽’을 넘고 나니,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겨우 닷새 정도 생리컵을 사용했지만 장점은 차고도 넘쳤다. 피부 발진이나 가려움증도 사라졌고, 생리가 끝나고 나면 칼같이 찾아왔던 질염 증상도 눈에 띄게 완화됐다. 외음부가 건조해지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생리컵을 빼내 안에 든 생리혈을 바로 버리고 교체하면 되니, 생리혈 냄새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돈이 크게 들지 않는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생리가 끝나고 난 뒤 뜨거운 물에 소독해 잘 말려두면 반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하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생리컵이 잘 맞는 것은 아닐 터다. 사용법을 익히는 게 어렵고, 심한 경우 생리컵으로 인해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생리컵을 교체할 때마다 물에 헹궈야 하기 때문에 공중화장실 이용이 불편하기도 하고, 제대로 착용하지 못해 생리혈이 샐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여전히 있다. 그러나 생리컵은 이 모든 단점을 상쇄할 정도로 장점이 컸다. 무엇보다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대안이었다. 어떤 브랜드의 생리컵을, 어떻게 구매하고, 어떻게 써야 하냐고? 하나도 몰라도 괜찮다. 혼자여도 괜찮다. 휴대폰을 켜고 유튜브를 뒤져보자. 당신보다 먼저 ‘생리컵 길’을 걸었던, 그리고 당신에게 아낌없이 조언을 해줄 훌륭한 피자매들이 많으니까. 신촌 드럭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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