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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혼자일 때 더 설레는, 내 남친 같은 맥주

등록 2017-08-19 09:23수정 2017-08-19 09:40

20대 초반 알바로 번 돈을 털어
유럽행…양조장과 펍을 전전했다
이른 낮술로 알딸딸해지면
거리는 아름답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따뜻한 안주와 함께하는 ‘혼맥'
남자친구 없이도 잘 살 것 같다
대출도 갚고 다이어트도 해야 하는데
다시 양조장 기행도 가야 하는데…
맥주 양조장과 펍을 전전하며 여행하는 유럽은 정말 아름다웠다. 갓 태어난 싱싱한 맥주를 몇잔 마시고 나오면 살짝 알딸딸한 것이 그렇게 거리가 아름다울 수 없었다. 낮술 중에서도 아주 이른 낮술이었다. 영어 한마디 못해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안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맥주 양조장과 펍을 전전하며 여행하는 유럽은 정말 아름다웠다. 갓 태어난 싱싱한 맥주를 몇잔 마시고 나오면 살짝 알딸딸한 것이 그렇게 거리가 아름다울 수 없었다. 낮술 중에서도 아주 이른 낮술이었다. 영어 한마디 못해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안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토요판]이런, 홀로!?

어느 솔로 맥덕의 간증

“취미가 어떻게 돼요?”

“저는 맥주 좋아해요.”

눈앞에 있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맥주를 좋아한다는 대답이 대단히 흥미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이후의 대화는 자연스럽고 편해집니다. 주제가 정해졌으니까요. 업무 미팅 때도, 동호회 활동 때도 제 취미는 꽤 괜찮은 대화의 소재가 됩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습니다. 소개팅 자리에서 맥주를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오해를 사 처음 만난 상대의 온갖 술주정을 보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분위기 맞추느라 마신 술에 취해 제가 주접을 떨어 몇날 며칠을 ‘이불킥’ 하며 보내기도 했고요. 친구들은 소개팅에서 맥주를 좋아한다는 말도 하지 말고 술도 먹지 말라 충고하지만, 몇번의 경험 끝에 저는 소개팅을 할 때 반드시 술을 마시겠다고 다짐합니다. 같은 취향을 가졌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참을 수 있는 단점을 가졌는지, 참을 수 없는 단점을 가졌는지 파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거든요. 또 내 장점을 끌어내는 사람인지, 단점을 끌어내는 사람인지도요. 30대 중반이 되니, 나와 맞는 사람을 파악하기 위해 공들이는 시간도 아깝게 느껴집니다.

이른 낮술이 주는 여행의 기쁨

맥주에 빠져든 계기는 책입니다. 15년 전, 낭만주의 소설과 같은 문체로 번역된 ‘맥주’라는 얇은 책을 읽고 상상 속의 맥주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향이 있고, 맞춰야 하는 온도가 있고, 지역 문화가 스며든 그것에 말입니다. 사회 초년생 때 이력서에 자랑스럽게 한 줄 적었던 국내 굴지의 광고회사 인턴 경력도 맥주 덕분에 쌓았습니다. 유럽 양조장 기행을 가기 위한 알바와 휴학을 반대하던 부모님이 그 광고회사 인턴 합격 소식에 바로 허락하셨기 때문이죠. 물론 그 굴지의 광고회사에서 돈은 못 모았고, 라디오 작가 알바를 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그때는 돈을 벌기 위해 일했지만, 지금은 모두 특이한 경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직접 번 돈으로 맥주 양조장과 펍을 전전하며 여행하는 유럽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양조장 투어는 아침 일찍 시작합니다. 갓 태어난 싱싱한 맥주를 몇잔 마시고 나오면 살짝 알딸딸한 것이 그렇게 거리가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낮술 중에서도 아주 이른 낮술인 거죠. 영어 한마디 못해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그 좋았던 기억 덕에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맥주 양조장 투어를 적극 추천합니다.

맥주 양조장 투어의 좋은 점은 첫째,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겁니다. 게스트하우스 아침 식탁에서 양조장 투어를 한다고 말하면 재미있을 거 같다며 합류한 일행들이 적지 않았어요. 둘째, 생각보다 돈이 안 듭니다. 맥주는 배부른 술이거든요.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 든든하게 먹고 출발해 맥주를 마시다 보면 음식이나 간식 값이 별로 안 들어서 의외로 식비를 많이 아낄 수 있었습니다. 셋째, 더 아름다운 풍경과 추억을 담을 수 있습니다. 유명 관광지인 독일 쾰른성당의 첫인상은 거무튀튀하고 스산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광장에서 쾰슈 맥주를 마시며 다시 보는 쾰른 성당은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넷째, 현지인들과도 친해질 기회가 많이 생깁니다. 이탈리아 로마를 여행할 때였어요. 여행객들이 대부분 지친 표정을 짓고 있는 이곳에서 이렇게 발랄한 표정을 짓는 여행자는 처음 봤다며 길 가던 현지인이 근사한 에스프레소를 대접해주었습니다. 영국 런던의 어느 펍에서 ‘런던 프라이드’라는 맥주를 마시며 행복해하고 있을 때는, 옆 테이블의 영국 할아버지가 이것도 마셔보라며 ‘존 스미스 엑스트라 스무드’라는 맥주를 시켜주기도 했어요. 또 독일의 어떤 펍 사장님은 제게 맥주보다 사과로 만든 ‘사이다’(cider)가 더 훌륭한 술이라며, 무한정 공짜로 주기도 했답니다. 맥주보다 맛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겠다면서요. 그때 처음으로 사이더(Cider)라는 술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맥주가 아니었다면 대화도, 정보도 없었겠지요.

다섯째, 유명 여행지가 아닌 특색있는 소도시도 가볼 수 있어요. 라우흐맥주(rauchbier)라는 독일 밤베르크에서 생산되는 훈제 맥주가 있는데요, 훈제 맥주만을 목적으로 갔지만, 장난감 마을같이 조성된 아기자기한 그 풍경에 반했습니다. 알트맥주를 마시기 위해 방문한 독일 뒤셀도르프의 활발한 거리 풍경도 잊히지 않습니다.

이런 여행기를 풀고 있자니, 이 사람 엄청 맥덕이다 싶겠지만, 솔직히 스스로를 맥덕이라고 선언하기엔 민망한 구석이 있습니다. 예전엔 ‘상면 발효’, ‘하면 발효’ 정도만 알면 그럭저럭 제대로 아는 맥덕 취급을 받을 수 있었죠. 그런데 요새는 워낙 고수가 많아졌어요. 맥주가 대중화되고,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얻을 수 있는 고급 정보의 양도 많아졌습니다. 얄팍한 지식으로 맥덕이라고 말하기 민망합니다. 그냥 “취미가 맥주 마시기다”라는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사실 맥주의 참기쁨은 머나먼 여행지가 아닌 일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도 물론이고요. 맥주를 마실 때, 맛과 멋에 가장 신경을 쓸 때는 혼자 마실 때입니다. 혼자 마실 때 온전히 맥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몸짓과 말에 집중할 에너지를 순전히 맥주에 쏟을 수 있으니까요.

전 혼자 마실수록 더 좋은 맥주를 마시려고 하고, 어떤 맥주인지 찾아보기도 하고, 안주도 꼭 만들어서 챙깁니다. 주재료가 될 수 있는 냉동 닭고기, 돼지고기, 생선 등을 구비해놓습니다. 귀찮을 때는 소금을 뿌려 호박이나 가지, 양배추 같은 채소와 함께 굽기만 해도 훌륭한 안주가 됩니다. 끼니는 대충 때워도 안주는 정성스레 만들어야죠. 퇴근 뒤 그렇게 만든 따뜻한 안주와 함께 맥주 한잔 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가끔 한잔이 두잔 되고, 두잔이 세잔 되고, 세잔이 여섯잔이 되어 편의점으로 출동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건 불가항력입니다. 친구는 이런 저를 보면서 계속 솔로로 살 것 같다고 하더군요. 혼자서도 잘 논다고요. 음, 일부 맞는 거 같습니다. 재미도 주고, 위안도 주고, 맥주가 남자친구 수준입니다.

“꼭 가고 말 거예요”

게다가 이렇게 마셔대니 살이 찝니다. 예전에는 일년에 두어달 정도 금주 기간을 가졌습니다. 다이어트 기간이기도 하고요. 몸을 정화하는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맥주를 마시기 위한 대승적인 선택이었지요. 30대 중반이 된 요즘은 그런 노력이 왠지 좀 귀찮습니다. 금주 기간을 가지지 않은지 꽤 된 것 같습니다. 덕분에 덩치도 좀 커졌어요. 건강을 위해서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데, 큰일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너무 좋은데!

국내에 많은 브루어리가 생겼고, 수입 맥주가 아무리 많이 들어와도 세계는 끊임없이 맥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맥주 양조장 기행을 다녀온 직후, 22살의 저는 목표 하나를 세웠습니다. 30대에, 40대에, 50대에 이렇게 10년에 한번씩 맥주 양조장 기행을 한다는 목표를요. 1년에 100만원씩, 10년 동안 1000만원을 모으면 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어려워 보이지 않더라고요. 물론, 아직 30대의 여행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계속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왠지 여유가 없네요. 전세 계약을 하며 받은 대출을 갚고…, 음, 그것밖에 없는 거 같은데 말이죠. 아직은 막막해 보이지만,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꼭 가고 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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