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이런, 홀로!?
엄마와의 여행
엄마와의 여행
내가 엄마는 모르는 낯선 삶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은, 할머니와 엄마의 삶 덕분이다. 지반처럼 나를 떠받친 그 삶을 딛고 나는 삶의 지평을 넓혀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엄마와 떠난 3박4일 방콕행
‘예의바른’ 사이가 된 지 15년
엄마는 내 눈치를 살폈다
“빨리 좋은 남자를 찾아”
그 잔소리가 싫어 피해왔다
엄마와 할머니가 살아온 삶
나의 낯선 삶은 그 덕분인 건데… 나에게 엄마는 열아홉살까지 살았던 소도시만큼이나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다. 결혼하자마자 아버지와 함께 장사를 하면서 두 아이를 길렀고 여느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잘못인지 알면서도 딸보다 아들을 더 사랑했던 나의 엄마.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속담의 굽은 소나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속담을 처음 들을 때만 해도 내가 굽은 나무가 될 줄은 몰랐다. 너무 올곧은 나무와 함께 자라면 상대적으로 굽은 나무가 되는 것을 어린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오빠는 나뿐만 아니라 동네와 학교 아이들까지 굽은 나무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세상 모든 아이들의 아버지인 것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자라는 내내 좌절감만 쌓아 올린 나는 스무살이 되자마자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향을, 집을, 그리고 엄마를 떠났다. 그 이후로 엄마를 그리워하다가 가끔 궁금해했고 나중에는 적당히 무심해지는 법을 익혔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와 물리적으로 멀어질수록 관계는 오히려 호전됐다. 기억에 따르면 엄마의 그늘 아래서 살던 나는 ‘고집이 세고 좀처럼 말을 안 듣는 계집애’였다. 집을 떠났더니 ‘타지에서 고생하는 딸’이 됐고 완전히 독립한 뒤에는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됐다. 엄마는 딸이 없는 친구들에게 여자한테는 딸이 있어야 한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뜬금없는 전개로 관객을 당황케 하는 영화처럼 희한한 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호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서른여섯살인 딸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시로 엄마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엄마는 나와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눈을 크게 뜨고, 빨리 좋은 남자를 찾아!” 엄마가 그 끔찍한 잔소리가 적힌 티셔츠라도 입고 나타날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피해버렸다. 사실은 친구에서 근심거리로, 근심거리에서 애물로 내 지위가 자꾸만 추락할까봐 두려웠다. 이제 더 이상 ‘엄마의 무엇’ 같은 것은 되고 싶지 않다. 누구의 무엇도 아닌, 오직 나인 채로 살고 싶다. 여행 둘째 날 밤, 우리는 센타라 그랜드 호텔 56층에 자리한 칵테일 바로 갔다. 이름이 ‘레드 스카이’인 이 바는 방콕의 멋진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붉은 조명이 비추는 바에서 엄마와 단둘이 칵테일을 마신다는 사실, 게다가 이곳이 외국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낯설어서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극적으로 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남녀처럼.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비혼은 엄마가 생각하는 것처럼 외롭고 비참함을 견뎌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롭고,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일 수 있다고. 나는 내가 원하는 상대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받을 것이며 내가 믿는 진짜 사랑을 반드시 찾아낼 것이라고. 나는 절대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엄마가 살아본 적 없는 낯선 삶’에 대한 변호였다. 그러자 이번엔 엄마가 내가 살아본 적 없는 삶을 내세워서 나를 공격했다. “네가 딸을 낳아 키우는데 그 딸이 결혼도 않고 혼자 산다면 그땐 너도 내 마음을 알 거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중국 남자들이 담배를 피워댔고 연기가 바람을 타고 우리가 앉은 자리로 날아들었다. 붉게 물든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강풍이 불면서 엄마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다만 ‘살아보니 결국엔 남편과 자식밖에 없다’는, 엄마 인생의 교훈이 가슴에 박혔다. 엄마가 그 교훈을 얻기까지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도. 결국 56층에서의 극적인 교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틀의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여행 마지막 날 드디어 우리 사이에도 ‘친밀한 적대감’이 싹텄다. 짧은 여행이지만 외국에서 모든 일정을 함께했더니 마치 함께 살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엄마는 실로 오랜만에 나를 나무랐고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이리 가는 거 맞니? 넌 길을 잘 못 찾는 거 같다.” “네가 살찐 걸 어떻게 날씬하게 찍어?” 그리고 엄마는 향이 강한 타이 음식을 맛있게 먹었고 수영장에서 엉터리 헤엄을 치다가 셀카를 여러 장 찍었다. 타이 마사지를 받고 나서는 공주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피하려던 엄마의 삶 그런데 그 순간에 즐거움 때문에 슬퍼지는 구태가 연출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제 세상에 없는 우리들의 엄마,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엄마는 제주도 여행이 할머니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됐다고, 이미 아는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따지고 보면 엄마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내와 엄마로서 헌신하는 삶, 그것은 내가 은연중에 때로는 드러내놓고 피하려던 삶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 포함돼 있다. 내가 엄마는 모르는 낯선 삶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은, 할머니와 엄마의 삶 덕분이다. 지반처럼 나를 떠받친 그 삶을 딛고 나는 삶의 지평을 넓혀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더 해가 뜨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제야 우리의 간격을 조금이라도 좁힐 방도를 알 것 같았다. 이제 와서 어떻게 선산을 지킬 것이며 애써 선산을 지킨들 무슨 소용인가? 그보다 엄마가 경험하지 못했던 삶의 영역으로 엄마를 데리고 가야겠다. 자유와 즐거움과 오직 나만을 위한 사치가 있는 곳으로, 가벼운 산책을 하듯, 먼 곳으로 떠나듯 둘이서 그렇게. All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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