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런,홀로!?
홀로의 초보운전
홀로의 초보운전
나는 남이 아닌 나 스스로 만든 자유를 느끼도록 하는, 1평이 안 되는 좁은 공간을 사랑하게 됐다. 초보딱지를 떼는 날, 영화 <매드맥스>의 '멋진 언니' 샤를리즈 테론이 흙먼지 날리며 사막을 달렸던 것처럼 오프로드를 달릴 꿈을 꾼다. 게티이미지뱅크
“차 있는 남자를 만나”라고 했다
운전 연수를 해주겠다는 아빠는
“착한 남자친구가 해줘야 하는데…” 툭하면 “빵!” 마트 주차는 고단하고
‘낄끼빠빠'를 못해 길을 잃지만
나만의 공간에서 자유를 얻었다
초보 떼는 날 오프로드를 달리리라 여자라 서툰 게 아니다 우선 나로 말하자면 대학 1학년 때 연애를 시작한 이후 14년 동안 차 있는 사람과 연애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기질상 걷는 것을 사랑하기도 하거니와, 애틋한 마음이 커지고 보면 어김없이 뚜벅이였다. 차를 사기로 한 것도 애인과 좀더 편한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차가 있긴커녕 심지어 돈도 벌지 못했다. 시험준비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긴 했지만, 실상은 벌이가 없는 백수와 다를 바 없었다. 돈 없는 애인과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봄·여름·가을의 시간을 걷는 건 낭만적이다. 문제는 겨울. 뚜벅이 커플에게 겨울은 흡사 반팔만 입은 채로 시베리아에 떨어진 것과 같다. 영화 보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추위를 피한 데이트 코스가 반복됐다. 일상을 벗어나 쉼을 만끽하고 싶은 날의 지루함. 입사 이후 10년 동안 차가 없어도 불편함을 못 느끼던 내가, 백수 애인을 만난 뒤 차를 사기로 했다. 차를 사겠다 결정하고,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그 짧은 사이에 우리는 헤어졌지만 흠흠. 학교 다닐 때 운동장 흙 좀 밟았기로서니 운동 신경과 운전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5분 빨리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는 구호가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도로 연수를 받을 생각에 뒤진 인터넷엔 “백프로 믿어봐” “국내 최강 친절한 강사진” “운전이 제일 쉬웠어요” 따위의 광고글로 도배가 돼 있었다. 믿어달라는 말은 더 못 믿겠는 삐딱한 심성. 운전학원 대신 ‘경력 30년’ 아빠한테 최대한 굽신거리며 부탁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번에 날아와 가슴에 꽂히는 말. “넌 운전 가르쳐줄 남자친구도 없냐.” 아쉬운 입장에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원래 그런 건 남자친구한테 배우는 게…” 말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착한 놈들을 만나면 되지”가 자르고 들어왔다. 학원 강습료가 비싼 건,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될 비용이 포함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현재 있지도 않은 내 미래의 애인에게, 차도 있어야 하는데다 성내지 않고 운전도 잘 가르쳐주는 남자여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초보에게 ‘가로 2.3m 주차선' 안에 자동차를 넣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대신 옆차를 긁기는 얼마나 쉽던가. 후진 주차 시 울리는 센서는 얼마나 야멸차던가. 아파트 주차장은 양호하다. 출퇴근 시간만 피하면 얼마든지 핸들을 보정해가며 주차할 수 있었다. 정 안 되면 다른 빈자리를 찾아 나서도 된다. 문제는 마트 주차장. ‘차선 가운데에 차를 놓는다. 주차하려는 자리의 끝선을 1m 정도 지나친 상태에서 후진하려는 반대 방향으로 운전대를 다 감아서 차의 각을 세운다. 반대쪽으로 다 감고 천천히 후진하면 쏙 들어간다.’ 이런 공식은 다 외웠다. 문제는 ‘변형’에 약하다는 것. 각이 살짝만 틀어지거나, 30㎝만 지나쳐도 차는 주차구역 안으로 쏙 들어가지 않았다. 마트에선 주차를 시도도 해보기 전에 주차장으로 차들이 줄지어 밀고 들어왔다. 뒤에서 울리는 “빵!” 한 번에 가슴은 1m씩 덜컥 내려앉았다. 급기야 뒤차에서 “아줌마,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아줌마’라는 말에 반응할 정신도 없다. 나는 지옥으로 등기 이전한 기분이었으니까. 보다 못한 뒤뒤차에서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의 발에 기름을 붓고 머리칼로 닦을 수도 있겠다는 심정이었는데, 그러면 그렇지, 훈훈할 리가 없지. “이런 건 남친한테 해달라고 하세요.” 의인이 ‘오지라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처음 만난 뒤뒤차 차주는, 현재 있지도 않은 내 미래의 애인에게, 차도 있어야 하는데다 성내지 않고 운전도 잘 가르쳐주고, 내가 마트에 가고 싶은 시간에 맞춰 주차도 해줄 수 있는 남자라는 조건을 붙였다. 나는 애인을 운전기사로 두는 것이 즐겁지 않다. 애인을 운전 강사로, 발레파킹 직원으로, 자동차 정비기사로 만들고 싶지도 않다. 남을 통해 얻는 몸의 편안함은 마음엔 불편함일뿐더러, 나 스스로를 남성 의존적인 포지션에 두고 싶지도 않다. ‘여자니까 봐줍니다’ ‘아내는 뒷자리’ 유의 자동차 광고가 만들어지는 이유를 주변인들을 통해 깨달았다. 그들은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운전이 미숙하다는 낡은 성차별에 묶어두고, 보조석으로 앉을 자리를 제한했다. 여성 운전자 비율이 40%가 넘는데도, 사람들의 인식은 ‘여자는 집에서 솥뚜껑 운전이나 해’라는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나는 길을 잃기도 한다. 도로에서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가 능숙하지 못해 한강 이북에 있는 홍대~서강대 ‘10분 거리’를, 한강을 4번이나 건너며 1시간 반 만에 가기도 한다. 내비게이션 보는 게 익숙지 않아 200m 더 가서 좌회전할 걸 50m 앞에서 하기도 한다. 혼자 심야영화를 보러 갔다가 주차를 못해 다시 집으로 가기도 한다. 그래도 나를 욕할 사람은 없다. 이탈한 경로는 늦더라도 결국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고, 내가 책임지면 그만이며, 스스로에게 손가락질하고 낄낄대면 그뿐이다. 물론 나는 또, “젊은 아가씨가 무슨 운전을 그렇게 험하게 하냐” 같은 운전하지 않았으면 겪지 않았을, 이제껏 경험하지 않았던 종류의 여성혐오를 겪기도 한다. 운전이 서툰 중년의 여성을 비하하는 ‘김여사’라는 관용어가 있는 나라에서 이 정도의 혐오는 애교 수준이지만, 나는 창문을 내리고 말한다. “젊은 아가씨라서가 아니라 초보라서 운전이 서툰 건데요.” 매드맥스의 퓨리오사처럼 지하철역이 아닌 도로에 나서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네 바퀴로 움직이는 철 덩어리는 내 스스로 자유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나는 주체적으로 방향을 주도할 수 있다. 움직이고 싶을 때, 움직이고 싶은 곳으로, 움직이고 싶은 속도로 길을 떠나고, 잠시 쉬고 싶을 땐 멈춰 설 수 있다. 뜻대로 안 되는 인생을 살면서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유다. 이 공간 속을 흐르는 음악은 내가 그리던 세계로 언제든 떠날 수 있게 만든다. 흰 천과 바람 대신 기름과 이 네 바퀴 무생물만 있다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이 안에서 평소 입에 담지 못했던 욕을, 깜빡이 안 켜고 들어오는 앞차를 핑계 삼아 내뱉는다. 노래방에선 부르지도 못할 걸그룹 트와이스의 ‘티티’(TT)를 마치 쯔위인 양 귀여운 척하며 부르기도 한다. 세계와 함께 가면서도 단절된 이 공간에서 나는 내면을 단단하게 하는 시간을 갖는다. 나는 남이 아닌 나 스스로 만든 자유를 느끼도록 하는, 1평이 안 되는 좁은 공간을 사랑하게 됐다. 태어난 지 3주밖에 안된 ‘뚜꾸’ 엉덩이엔 “초보를 사랑해주세요”라는 딱지가 주홍글씨처럼 붙었다. 주인이 아직 미숙한 탓에 수없이 얼굴이 붉어진다. 잠시 머뭇거리면 여지없이 울리는 클랙슨 소리에 딸꾹질도 한다. 그럼에도 주인은, 초보딱지를 떼는 날, 영화 <매드맥스>의 ‘멋진 언니' 샤를리즈 테론이 흙먼지 날리며 사막을 달렸던 것처럼 ‘뚜꾸'와 오프로드를 달릴 꿈을 꾼다. 역촌동 매드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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