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런, 홀로!?
가족, 점점 불편해지는
가족, 점점 불편해지는
어쨌거나 한때 나를 제일 잘 알았던 사람들이,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이제는 나와 맞지 않는,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된 건 슬픈 일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엄마 기억 속 나는 과거의 나일뿐
가족과 떨어져 산 시간이 늘수록
모르는 사이가 돼가는 게 슬프다 가족 사랑하지만 ‘가족주의’엔 회의
때론 ‘옳고 그름의 문제’로 갈등도
다른 곳에서 다른 방향으로 걷는
‘가족을 얼마나 더 만나게 될까’ “너 그걸 먹나?” 엄마는 딸의 성격을 약간은 흉보듯 또 약간은 자랑하듯 애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애인에게 딸 이야기를 하는 엄마는 행복해 보였지만 저는 슬펐습니다. 엄마가 말하고 있는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의 나였습니다. 고등학생 이후 성격과 가치관이 매우 크게 바뀌었지만, 엄마에게 딸은 고등학생 때쯤의 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도 잊고 있던 제 모습이었습니다. 엄마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애인은 갸우뚱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말하는 딸은 애인이 보는 지금의 제가 아니었으니까요. 서울에 올라와서 입맛도 많이 변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에 올라와서가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가 맞습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어릴 땐 도저히 입에 못 대던 훌륭한 술안주들을 찾아 먹기 시작했습니다. 닭발, 순대, 야채곱창, 양꼬치, 돼지껍데기 등, 어릴 때 엄마를 닮아 가리는 게 많았던 저는 이런 음식들을 전혀 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전히 가장 맛있는 밥은 엄마가 방금 끓여준 두부된장찌개지만, 세상에는 엄마의 두부된장찌개만큼이나 맛있는 음식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의 기억 속 저는 여전히 가리는 게 많은 딸입니다. 대화 도중 닭발을 좋아한다고 침 흘리며 말하면 엄마는 깜짝깜짝 놀랍니다. “니가 그거를 먹는다고?” 엄마는 낯선 눈으로 저를 보며 말합니다. 엄마는 가끔 제가 싫어하거나 못 먹는 음식을 헷갈리기도 합니다. 매일 함께 밥을 먹지 않으니 쉽게 잊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줄 알고 해준 음식을 제가 먹지 못하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이럴 땐 코가 시큰하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욱신합니다. “이거는 왜 안 먹노? 원래 안 뭇나?” “응 엄마… 나 원래 안 먹어.” 얼마 전 제 부주의로 동생이 상처받고 화가 난 일이 있었습니다. 아홉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데다 동생이 11살이 된 이후로 계속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어쩌면 부모님보다도 서로를 잘 모르는 사이가 된 듯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동생이 화를 냈을 때, 저는 처음으로 높다란 벽을 느꼈습니다. 동생이 화가 났을 때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 어떤 태도로 상대를 대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주 보는 사람들과는 문제가 생겼을 때 이미 알고 있는 경험에 기반해 그들의 반응을 예측하고 그에 맞게 적절히 행동할 수 있지만, 동생에게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동생도 한참 성장하고 단단해질 때지만 저와 함께 살지 않으니 아마도 제가 부모님께 느끼는 이질감을 동생도 저에게 느낄 것 같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살기 시작한 게 20살이었습니다. 정신없이 수능과 입시만 바라보고 달려가던 고등학생 때와 달리 20살 이후부터는 다들 그렇듯 엄청난 곡선 그래프를 그려왔습니다. 20살 때는 이런 사람이었다가 21살 때는 저런 사람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공부를 했다가 저런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27살이 된 지금은 25살 때와도 아주 다릅니다. 그 시간 동안 저는 단단해졌지만 그만큼 변하기도 많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일년에 서너번 보는 가족과는 전화를 자주 한다고 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관과 신념을 갖고 세상을 걷는지를 공유하긴 쉽지 않습니다. 그런 건 각잡고 하는 이야기보다 일상에서 드러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하다못해 드라마를 함께 보며 인생과 일상의 중요한 것들을, 그리고 지금의 나를 이야기할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저는 가족주의에 비판적이고 아직까지도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엔 회의적인 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절절한 감정을 강요하는 드라마는 봐도 봐도 불편합니다. 제 개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가족보다는 혼자 사는 게 훨씬 편한 사람입니다. 더는 대구가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저에게 이제 ‘내 집’은 서울에 있는 혼자 사는 집입니다. 대구에 며칠 있다 보면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때가 많습니다. 사실 가족들은 제 주변 사람들 중 저와 가장 맞지 않는 편에 속합니다. 성격뿐 아니라 일상에서 지향하는 가치관이나 언행 등 모든 부분에서 크게 다릅니다. 물론 가족끼리 정치 이야기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모두가 공감할 것입니다. 하지만 때론 저에게 다름의 문제가 아닌 옳고 그름의 문제인 것들에서 부닥치는 일도 많습니다. 아직도 저는 경상도 특유의 엄격한 가부장제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무뚝뚝함에는 자주 답답해하고 버럭버럭 높은 언성에는 여전히 항상 놀랍니다. 28년 동안 워킹맘인 엄마가 오롯이 집안일을 감당해온 것도, 친척들이 모인 날 여자들만 음식을 준비하고 나르고 정리해야 하는 것도 여전히 적응되지 않습니다. 어른이 왔을 때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았다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 수저와 물컵에 물을 따르지 않았다고 장난스레 뒤통수를 맞는 것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견해도 크게 다릅니다. 가족에게 여자인 딸이 하는 동거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취하기 위해 27살이 되어 부모님을 설득해야만 합니다. 딸이 잘사는 집안의 남자를 잘 만나 결혼을 하는 게 제 행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길 바라시고요. 또, 결혼을 하면 오로지 두 사람만의 일이므로 상대방의 부모님에게 서로 져야 할 책임과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는 저에게 비혼에 대한 고려는 어쩌면 한국에선 당연합니다. 이처럼 가족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의무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한때’ 나를 제일 잘 알던 사람들 가족과 떨어져 산 시간이 함께한 시간보다 짧지만 그 시간 동안 저는 가족과 아예 다른 곳에서, 또 아예 다른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거나 쉽게 용인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며칠 함께 일상을 공유하다 보면, 정말 우린 맞지 않는 사람들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한때 나를 제일 잘 알았던 사람들이,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이제는 나와 맞지 않는,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된 건 슬픈 일입니다. 아주 예전, 가족 관련 인터뷰 영상을 제작할 때 인터뷰이가 해줬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처럼 가족과 떨어져 사는 친구가 고향에 내려갔다가 아버지로부터 문득 “앞으로 죽기 전까지 이렇게 너를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가족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래서 며칠만 있어도 힘들다는 이유로 잘 가지 않던 대구를, 일을 시작하고부턴 더 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저는 앞으로 가족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요. 혜화붙박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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