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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날 옥죄던 ‘와이어’를 벗고 자유를 만났다

등록 2017-05-14 10:10수정 2017-05-15 10:20

[토요판] 이런, 홀로!?
브래지어와의 이별
가슴을 떠받친다는 명목으로 철제 와이어가 내장된 띠로 몸통을 조이는 브래지어. 와이어가 없어서 안 입은 듯 편안하다고 광고하는 브래지어도 있지만, 단언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브래지어는 불편하다. 게티이미지뱅크
가슴을 떠받친다는 명목으로 철제 와이어가 내장된 띠로 몸통을 조이는 브래지어. 와이어가 없어서 안 입은 듯 편안하다고 광고하는 브래지어도 있지만, 단언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브래지어는 불편하다. 게티이미지뱅크

만약에 내가 ‘혼자 살기 운동본부’의 홍보담당쯤 돼서 티셔츠를 만든다면 이런 슬로건을 적어 넣을 것 같다.

‘옷을 벗고 고독을 입으세요’.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외출복을 훌훌 벗어버리는 것이다. 죽어서도 예쁘고 독특한 수의를 입고 싶지만 집에서는 옷이라는 존재를 지워버린다. 짤막한 샤워가 끝나면 가운을 입고 나와서 로션을 대충 바른 후에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엉금엉금,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이케아표 더블베드가 사랑과 이해와 관용으로 이 못난 주인을 품어주면 환각에 가까운 편안함이 밀려온다. 그래, 이 순간을 위해서 고된 하루를 살아낸 거다. 개의치 않고 옷을 벗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싱글 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사실 처음부터 자유롭게 벗고 지냈던 것은 아니다. 보는 눈, 즉 룸메이트 없이 혼자 살게 된 후에도 한참 동안은 옷을 벗지 못했다. 나에게도 눈이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옷을 벗으면 집 안에 놓인 거울이나 창문에 몸의 실루엣이 비치고 시야를 아래로 향하기만 해도 허연 몸이 보인다. 그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리 혼자라도 옷을 벗고 있다는 사실은 어쩐지 음란하게 느껴졌다. 또 패션지나 광고가 세뇌하는 것처럼 매끈하지 않은 몸이 보이는 게 싫었다.

‘철갑을 두른 듯’ 불편한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나는 이 몸으로 태어났고 이 몸으로 살아왔으며 이 몸의 역사를 빠삭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내가 내 몸을 보는 것이 불편할까? 나는 대체 몇 살 때부터 이 몸을 수치스럽고 초라한 것으로 여기게 된 걸까? 내 몸의 주인은 나인데,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니까 그다음은 쉬웠다. 원할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옷을 벗었다. 옷을 입지 않고 지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이미 시도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사람들이 그토록 목욕을 좋아하는 것은 청결에 대한 강박과 개운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옷을 벗으면서 해방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르긴 몰라도 현대인이 집착하는 건강에도 좋을 것이다. 인터넷의 의학전문 기사를 보면 싱글은 잠재적인 환자 집단이다. 외로움과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서 커플보다 심장병, 뇌졸중, 돌연사, 고독사의 위험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발표된다.(싱글은 일찍 죽는다! 커플은 장수한다!) 옷을 벗으면 적어도 순환계에서 발생하는 병에 걸릴 확률은 내려가지 않을까?

여자들이 증오하는 기괴한 물건
어느 겨울 노브라를 시도했다
약간의 공포는 늘 찾아오지만
잊었던 해방감을 다시 찾았다

애플힙·하의실종은 환영받고
와이존과 유두는 가려야 한다
내 몸의 주인은 오직 나
작은 투쟁은 지금 시작됐다

나는 점점 더 과감해졌다. 집 밖에서도 자유를 느끼고 싶었다. 몸을 옥죈다는 죄목으로 색출해야 할 대상을 찾자마자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이 떠올랐다. 브래지어.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 기괴한 물건을 증오한다. 가슴을 떠받친다는 명목으로 와이어가 내장된 띠로 몸통을 조이다니. 나는 열두 살 무렵부터 아동용 브래지어를 찼는데 애국가 2절을 들을 때마다 내 신세가 오버랩 돼서 괴로웠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정말이지 불편해도 너무 불편하다. 와이어가 없어서 안 입은 듯 편안하다고 광고하는 브래지어도 있지만 이 자리에서 단언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브래지어는 불편하다.

처음 노브라를 시도한 것은 어느 겨울이었다. 두꺼운 상의에 외투를 껴입는 겨울은 브라와 작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옷이 얇아지는 여름에는 노브라로 지내는 것이 조금 곤란하다. 하지만 실리콘 소재의 니플패드를 이용하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장비들이 땀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기록적인 혹서가 맹위를 떨쳤던 2016년 여름엔 니플패드를 붙이고 외출했다가 패드 하나는 배꼽 근처에서, 다른 하나는 겨드랑이 쪽에서 발견되는 촌극이 벌어진 적도 있다. 그럼에도 틈틈이 노브라로 돌아다닐 기회를 엿봤다. 일단 답답하지 않아서 좋았고 음식을 먹고 체하는 일이 줄어서 좋았다. 여성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가슴이 처지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믿어도 좋다.

이렇게 노브라로 살면서 내내 행복했노라고,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나의 노브라 라이프는 아직까지 불완전하다. 밖에서는 여전히 브라에 의존하고 있다. 심지어 브라가 없다는 이유로 패닉에 빠질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수영장에 다니는데 어쩌다가 실리콘캡을 집에 두고 오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대중탕의 열탕 매니아처럼 물속에 푹 잠겨서 얼굴만 내놓고 한 시간을 버텼다. 기껏 체육관에 도착했는데 브라톱이 없을 때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음란함의 결정체인 가슴을 옷으로 가렸지만 유두의 형체가 드러나면 끝장이다. 경보 사이렌이 광광 울리고 수영장과 체육관이 폐쇄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거리낌없이 상의를 벗어젖히고 그것이 당연시되는 남자들의 자유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이것은 브래지어를 입느냐, 벗느냐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억압과 엄격한 시선, 그에 따른 수치심은 불필요하고 답답한 속옷을 잔뜩 만들어냈다. 치마를 입을 때면 필수로 따라오는 속바지를 떠올려보라. 속옷도 아니고 겉옷도 아닌 이 물건이 존재하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몸을 가릴 목적으로 속옷을 입었는데, 속옷을 가릴 용도로 속바지를 덧입어야 하다니. 더욱 이상한 것은 속옷과 겉옷의 중간 역할을 하는 속바지마저 관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유튜브에서 ‘속바지’를 검색하면 이 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제 속바지를 가리는 또다른 바지, ‘겉바지’라는 것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바지를 입으면 이런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이다. 근래 여성들 사이에서는 와이존을 가리는 신종 속바지가 인기다. 와이존은 유두와 마찬가지로 절대로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신체부위다. 그런데 또 타이트한 청바지 아래로 드러나는 애플힙은 자랑거리다. 동시에, 레깅스 아래로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엉덩이는 가려야 한다.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다리를 내놓는, 하의실종 패션은 환영받는다. 하지만 가슴골이 보이는 클리비지룩은 천박하다. 이 부조리하면서 일관성 없고 쓸데없이 디테일한 억압의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마치 교복 안에 숨겨진 원색의 브래지어를 백 미터 밖에서도 알아보고 달려오던 학년주임들이 모여서 투표로 정한 것만 같다. 세상은 도처에 학년주임이 널린, 거대한 학교인가?

그럼에도 나는 순전히 편안함에 매료돼서, 신체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서 간헐적인 노브라를 고수한다. 노브라로 돌아다니는 일이 긴장감과 약간의 공포, 걱정을 유발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나만의 작은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노브라, 여자들의 미래

“브라 맡기고 가세요.”

지난 3월8일 청계천 소라광장을 지나는데 진행요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말을 걸었다. 그곳에는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러 행사 부스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브라 보관소’였다. 탈의실에서 브라를 벗고 나와서 노브라를 몸소 체험해보라는 취지였다. 그날도 나는 노브라였기 때문에 그곳에 맡겨둘 브라가 없었다. 다음 순간, 누군가가 ‘여기서 브라를 불태웁시다!’라고 외치고 즉석에서 브라를 산더미처럼 쌓아서 화형식을 하는 장면을 상상해봤다. 짤막한 망상은 거기서 그쳤지만 광장의 브라 보관소가 준 여운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모든 투쟁은 전 세계에 파장을 미칩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저기에서. 지금이 아니라면 곧. 이곳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리고 수전 손택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 당장이 아니면 어떻고 브래지어를 불태우지 않으면 또 어떤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여성들이 간헐적 노브라 상태를 실천하고 있고 그 수가 조금씩 늘어날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티셔츠의 슬로건을 다시 써야겠다.

“노브라는 여자들의 미래다.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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