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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혼자 하는 여행’ 불쾌함에 지친 나는 어서 돌아가고 싶었다

등록 2017-05-07 09:43수정 2017-05-07 10:07

[토요판] 이런, 홀로!?
여전히 두려운 홀로여행
어떤 사람들은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감수하고 싶지 않다. 감수해야 한다는 표현으로 내가 겪는, 겪을 폭력을 퉁치기 싫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떤 사람들은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감수하고 싶지 않다. 감수해야 한다는 표현으로 내가 겪는, 겪을 폭력을 퉁치기 싫다. 게티이미지뱅크

디지털미디어 <버즈피드>에서 만든 ‘특권이란 무엇인가’라는 영상이 있다. 여러 인종, 성별, 성적 지향, 경제 계층의 사람들이 같은 출발선 위에 선 후 질문에 맞춰 앞과 뒤로 움직인다. 질문은 사회의 여러 약자들이 충분히 겪어봤을 법한 상황을 묻는다. 가령 ‘공공장소에서 혐오 표현, 비난 등의 두려움 없이 애인과 애정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한 발 앞으로’라는 질문에 이성애자들은 한 발 앞으로 가지만 성소수자들은 그 자리에 남는다. 질문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흑인 등 사회의 소수자들이 뒤로 가게끔 고안돼 있다. 그중 인상 깊었던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성범죄에 대한 걱정 없이 혼자 여행을 다닐 수 있으면 한 발 앞으로’였다. 이 질문에 모든 여성 출연자들은 그 자리에 멈춰 있어야만 했다.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현지인이
길을 안내해줬다…든든했는데
그는 우연인듯 나를 건드렸다
무례함엔 한국인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들과 함께 간 파리 몽마르트르
난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여성 홀로인 여행자들은 두렵다
성범죄 위험 없는 곳은 없을까

나는 여행을 정말 좋아한다. 친구들이나 애인과 함께 하는 여행도 좋지만 혼자 하는 여행도 좋아한다. 쉼 없이 말을 할 필요도 없고 가고 싶은 곳을 내 마음대로 갈 수 있고 쉬고 싶을 때 언제든 카페에 눌러앉아 오래 쉴 수 있다. 여행지에서 현지인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어하는 나에게 혼자 여행은 딱이다. 4년 전, 유럽을 한 달 반 동안 혼자 여행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오랜 시간 동안 다녀온 여행이었다. 무엇이든 혼자 헤쳐나가고 알아가는 법을 배우게 됐다. 그러나 조그마한 아시아 여자가 홀로 여행한다는 것이 늘 낭만적이고 편한 것은 아니었다.

파리, 암스테르담…로마에서도

당시 프랑스 파리는 다른 도시에 비해 치안이 위험한 편이었다. 사소한 소매치기부터 강매, 폭행, 강도 등. 남성들도 범죄 대상이었고 그들도 두려워했다. 여성인 내게는 성폭력의 두려움도 더해졌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두려움이라고 생각했으나, 여행을 다니는 게 가능한 두려움과 아예 불가능한 두려움은 다른 차원임을 알게 됐다. 도저히 밤에 홀로 갈 수 없는 곳들이 있었다. 이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함께 갈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동행 사이트를 뒤져봤으나 나와 완력이 비슷할 여성과 둘이 여행하는 것은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것 하나 믿고 낯선 남성을 그것도 낯선 곳에서 만나는 것 역시 부담이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다른 위험을 만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들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살면서 배워온 게 ‘조심해야 한다’였기 때문이다. 나에겐 동행을 위해 만난 익명의 한국인 남성이나 파리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 위험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한인 민박집에 머무르게 됐다. 한인 민박집에서는 함께 어울리다 자연스레 여행을 같이 가기도 하니까.

낮의 에펠탑, 개선문, 샹젤리제, 루브르 박물관 등 비교적 사람이 많은 대로변의 관광지들은 충분히 혼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밤의 에펠탑과 몽마르트르 언덕은 도저히 혼자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며칠 내로 여러 명의 여자나 한두 명의 남자와 동행을 이루지 못한다면 나는 파리에 와서까지 몽마르트르를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민박집에서 유쾌한 오빠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밤의 에펠탑을 보고 밤의 파리를 거닐고 몽마르트르도 다녀왔다. 그들은 나를 잘 챙겨주었고 지하철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장난스레 소매치기로부터 날 보호해주겠다며 자주 날 웃겼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고 동시에 부러웠다.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 지켜주어야 할 대상이라는 가부장적 구닥다리 관념을 깨부수어야 한다고 늘 말했지만 그때의 나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비교적 치안이 안전하다고 했다. 여행 이틀째 밤, 운하의 야경을 보기 위해 거리로 혼자 나왔다. 지도를 한참 쳐다보고 있는데 한 현지인이 말을 걸었다. 딱 봐도 관광객처럼 보이는 내게 어딜 찾고 있냐고 물었다. 그는 가는 방향과 비슷하니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에게 가지는 경계심은 당연히 컸다. 그러나 그는 굉장히 친절했고 운하를 가는 길에 있는 여러 관광지들을 안내해줬다. 무료 가이드를 받는데다 오히려 덩치가 큰 현지인 남성과 함께 가니 밤거리에서도 위험하지 않겠다 싶어 안도했다.

그러나 운하에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이 조금씩 가까이 붙는 걸 느꼈다. 그는 운하가 얼마 남지 않은 길목에서 실수인 척 내 엉덩이를 손으로 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걸음걸이에 맞춘 손의 반동이 우연히 내 엉덩이를 건드린 것처럼. 여느 성추행 피해자들이 그렇듯 우연이라고 실수일 거라고 내가 예민해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횟수는 점점 늘어갔고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운하를 앞두고 나는 그에게 급하게 인사를 한 채 발걸음을 서둘렀다. 다행히 그 사람은 사라졌다. 나는 한참이나 그 기억을 지우려고 애썼다. 그 사람의 실수일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2013년 11월 암스테르담의 현지인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했음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마지막 여행지는 이탈리아 로마였다. 파리만큼이나 치안이 불안하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한인 민박에 묵었다. 이탈리아 여행 내내 베네치아에서 만난 좋은 언니·오빠들과 즐겁고 안전하게 여행했다. 그들은 일정상 로마를 먼저 떠나게 됐고 나는 혼자 민박집에 앉아 긴 여행의 마지막 날을 정리하고 있었다. 민박집에는 숙소를 왔다 갔다 할 때 자주 마주쳤던 한 한국인 남자 무리가 있었다.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종종 그중 한 명이 쳐다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아침을 먹은 뒤 방에서 준비를 하던 도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종종 쳐다보던 그 남자가 “친구와 비행기 일정이 달라 밤에 떠나니 함께 로마 시내를 둘러보자”고 했다. 크게 내키지 않아 머뭇거리다 어차피 금방 들어올 테니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와 함께 시내로 나갔다.

그와 걷기 시작한 지 10분 정도 됐을 때 나를 쳐다보던 시선이 착각이 아님을 깨닫게 됐다. 그는 노골적으로 들이대기 시작했다. 분명 나는 불편함을 바로 드러냈지만 그는 무례했다. 우연히 나온 당시 남자친구 이야기에도 장기간 장거리 연애를 했으니 곧 헤어지지 않겠느냐며 무례하게 굴었다. 여행지에서의 설렘을 가장한 무례함을 계속해서 저질렀다. 불쾌함에 지친 나는 어서 돌아가고 싶다며 민박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는 길에 그는 나에게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지금은 다년간 길거리의 무례한 남성들을 겪으며 어떻게 효과적으로 피해야 하는지 노하우를 깨달았지만, 당시의 나에게 그런 지혜는 없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길에서 나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국에 돌아온 후에 불쾌할 정도로 연락을 해댔고 나는 바로 그를 차단했다.

여자인 친구와 둘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도시를 한 달 동안 여행한 적이 있다. 우리는 해가 저문 시간에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거리를 마음 편히 다닐 수 없었다. 이른 저녁 시간에도 길을 걸을 때 항상 뒤를 살폈고 주변을 경계했다. 밤에 총격과 칼부림 따위가 일어나는 도시도 아니었지만 우리에겐 그 외의 위험이 항상 존재했다. 하지만 같은 도시를 이후 애인과 함께 여행하면서 아주 다른 느낌을 받았다. 위험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남자들이 없었고 길거리에서의 불쾌한 추파 역시 없었다. 말을 쉽게 거는 현지인도 한국인도 없었다. 애인이 나를 보호하려 했든 말든 상관없이 남성의 존재 자체로도 나는 이미 보호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안전했다. 혼자 여행할 때나 여자인 친구와 여행할 때 항상 사방을 살피고 경계하느라 피곤했던 경험과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또다른 ‘두려움’이 싫다

어떤 사람들은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감수하고 싶지 않다. 감수해야 한다는 표현으로 내가 겪는, 겪을 폭력을 퉁치기 싫다. 치안이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라도 여성은 성범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자 여행을 가지 못하는 것도, 여행을 가더라도 동행을 못 구하면 특정 시간대의 특정 장소는 포기해야 하는 것도, 특정 장소에 혼자 가더라도 잔뜩 긴장한 채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도 어쨌든 억울하다. 어떤 사람들은 받지 않는 제약이 나에게 들러붙는 느낌이다. 불편하고 두렵다. 한국인 남자 동행을 구하는 것조차 불안하다. 사실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그 두려움은 배로 늘어난다. 홀로 하는 여행은 낭만적이고 행복하지만 여행에서조차 나는 위험하다. 여전히 ‘홀로 여행’을 꿈꾸지만 여전히 나는 두렵다.

혜화붙박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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