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 준다는 일본인 말에 속아…”
세계 곳곳서 피해 증언 앞장
지지 않은 ‘동백꽃 할머니’로 불려
생존 피해자 이제 38명만 남아
세계 곳곳서 피해 증언 앞장
지지 않은 ‘동백꽃 할머니’로 불려
생존 피해자 이제 38명만 남아
고 이순덕 할머니.
2007년 정기 수요집회에 참석했던 고 이순덕 할머니.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죄 없는 죄인으로 김제에서 만주로 끌려가…”
1918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했다. 1남 1녀 중 장녀였다. 이순덕 님은 타지에 일하러 나가 계신 부모님을 대신해 집안 가사 일을 도맡아 했다.
1937년, 저녁을 짓기 위해 밭두렁에서 쑥을 캐고 있던 중 생면부지의 한국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런 일을 하느니 나를 따라오면 신발도 주고 기모노도 주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데로 데려다 주겠다.” 이순덕 님은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힘든 삶을 꾸려나가고 있던 터라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가야겠다고 간청하였으나, 남자는 시간이 없다며 이순덕 님을 강압적으로 끌고 갔다. 이순덕 님은 무서운 마음에 울면서 끌려갔다. 위안부 징집을 위한 취업사기였다. 이리읍의 여관에 당도했을 때, 그곳에는 각 지역에서 모인 15~19세 정도의 어린 처녀 15명이 있었다. 이순덕 님은 소녀들과 열차를 타고 중국 상해로 떠났다. 끔찍한 위안부 생활의 시초였다.
당시 이순덕 님의 부모님은 행방불명된 딸을 찾다가 화병을 얻어 작고했다. 홀로 남은 남동생은 작은 어머니 댁에 얹혀살았다고 한다.
이순덕 님의 ‘위안부’ 생활은 험난했다. 머리, 가슴, 둔부, 등에 구두 발길질을 당하고, 칼에 의한 상흔도 생겼다. 그 후유증으로 눈이 잘 안보이게 되었고, 정신이 몽롱한 부실한 몸이 되었다. 위안소에서의 만행은 이순덕 님의 몸과 영혼까지 갉아먹었다.
1945년, 해방 후 일본군은 사라졌다. 이순덕 님은 조선 사람들 틈에 끼어 귀환할 수 있었다. 망가진 몸을 이끌고 고향에 돌아온 이순덕 님은 동생과 동네 사람들에게는 식모살이를 하고 왔다고 말했다. 이후 상흔을 안고 기구한 삶을 살았다.
이순덕 님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의 회원을 통해 피해자 신고를 받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유족회를 통해 악몽 같았던 과거를 신고했다. 그 후 수요 시위, 인권캠프 등에 활발히 참여하며 당신의 한을 풀고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애썼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역사의 치부를 안고, 아픔을 참을 수 없었던 이순덕 님은 이렇게 외쳤다.
“식민지하의 생활고로 겪었던 고통으로 죄 없이 죄인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일본국은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시달린 후유증을 보상하라.”
이순덕 님은 4월4일 아침 7시40분 영면하셨다.
부디 평화롭고 따뜻한 곳에서 당신의 상처 입은 영혼을 위로받기를 희원한다. 숱한 불면의 밤과 끔찍한 악몽을 겪지 않아도 되는 너른 안식의 날을 소망한다.
고인의 영혼은 이렇게 안식을 찾지만, 살아남은 우리는 고인의 이름을 기억하고, 고인의 뜻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날까지 깨어있는 눈으로 이 역사를 지킬 것이다.
위로가 이순덕 님과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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