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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동백꽃 같았던…최고령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할머니 별세

등록 2017-04-04 10:47수정 2017-04-04 20:23

“쌀밥 준다는 일본인 말에 속아…”
세계 곳곳서 피해 증언 앞장
지지 않은 ‘동백꽃 할머니’로 불려
생존 피해자 이제 38명만 남아
고 이순덕 할머니.
고 이순덕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최고령이었던 이순덕 할머니가 4일 오전 7시30분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는 4일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동백꽃 이순덕 할머니(100세)께서 오늘 아침 7시 30분 경 운명하셨습니다”며 부고를 전했다. 이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38명으로 줄었다.

1918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이 할머니는 1934년 열일곱의 나이에 “쌀밥, 좋은 옷을 준다는 일본인의 말에 속아” 일본군에 끌려갔고, 만주와 상하이를 옮겨다니며 고초를 겪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위안부’ 문제가 불거진 뒤 세계 곳곳을 돌며 증언 활동을 펼친 이 할머니는 지난 1998년 5년5개월간의 법정 투쟁을 통해 처음으로 일본 법정으로부터 30만엔 가량의 배상금 지급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윤미향 대표는 페이스북에 부고를 전하며 “(고인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 1심에서 승소를 이끌었던 일본 관부재판의 마지막 원고셨다”고 전했다.

2007년 정기 수요집회에 참석했던 고 이순덕 할머니.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2007년 정기 수요집회에 참석했던 고 이순덕 할머니.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평소 ‘위안부’ 활동가들은 이 할머니가 추운 겨울동안 지지않는 동백을 닮았다며 ‘동백꽃 할머니’로 불렀다. 이 할머니는 마포구에 위치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인 ‘평화의우리집’에서 지내오다, 지난 2014년 6월 노환이 심해지면서 인근 요양병원에 입원해 지냈다.

이 할머니의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제14호실이고, 6일 오전 발인 예정이다. 일반인의 조문도 가능하다.

다음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공개한 이 할머니의 약전.

“죄 없는 죄인으로 김제에서 만주로 끌려가…”

1918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했다. 1남 1녀 중 장녀였다. 이순덕 님은 타지에 일하러 나가 계신 부모님을 대신해 집안 가사 일을 도맡아 했다.

1937년, 저녁을 짓기 위해 밭두렁에서 쑥을 캐고 있던 중 생면부지의 한국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런 일을 하느니 나를 따라오면 신발도 주고 기모노도 주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데로 데려다 주겠다.” 이순덕 님은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힘든 삶을 꾸려나가고 있던 터라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가야겠다고 간청하였으나, 남자는 시간이 없다며 이순덕 님을 강압적으로 끌고 갔다. 이순덕 님은 무서운 마음에 울면서 끌려갔다. 위안부 징집을 위한 취업사기였다. 이리읍의 여관에 당도했을 때, 그곳에는 각 지역에서 모인 15~19세 정도의 어린 처녀 15명이 있었다. 이순덕 님은 소녀들과 열차를 타고 중국 상해로 떠났다. 끔찍한 위안부 생활의 시초였다.

당시 이순덕 님의 부모님은 행방불명된 딸을 찾다가 화병을 얻어 작고했다. 홀로 남은 남동생은 작은 어머니 댁에 얹혀살았다고 한다.

이순덕 님의 ‘위안부’ 생활은 험난했다. 머리, 가슴, 둔부, 등에 구두 발길질을 당하고, 칼에 의한 상흔도 생겼다. 그 후유증으로 눈이 잘 안보이게 되었고, 정신이 몽롱한 부실한 몸이 되었다. 위안소에서의 만행은 이순덕 님의 몸과 영혼까지 갉아먹었다.

1945년, 해방 후 일본군은 사라졌다. 이순덕 님은 조선 사람들 틈에 끼어 귀환할 수 있었다. 망가진 몸을 이끌고 고향에 돌아온 이순덕 님은 동생과 동네 사람들에게는 식모살이를 하고 왔다고 말했다. 이후 상흔을 안고 기구한 삶을 살았다.

이순덕 님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의 회원을 통해 피해자 신고를 받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유족회를 통해 악몽 같았던 과거를 신고했다. 그 후 수요 시위, 인권캠프 등에 활발히 참여하며 당신의 한을 풀고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애썼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역사의 치부를 안고, 아픔을 참을 수 없었던 이순덕 님은 이렇게 외쳤다.

“식민지하의 생활고로 겪었던 고통으로 죄 없이 죄인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일본국은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시달린 후유증을 보상하라.”

이순덕 님은 4월4일 아침 7시40분 영면하셨다.

부디 평화롭고 따뜻한 곳에서 당신의 상처 입은 영혼을 위로받기를 희원한다. 숱한 불면의 밤과 끔찍한 악몽을 겪지 않아도 되는 너른 안식의 날을 소망한다.

고인의 영혼은 이렇게 안식을 찾지만, 살아남은 우리는 고인의 이름을 기억하고, 고인의 뜻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날까지 깨어있는 눈으로 이 역사를 지킬 것이다.

위로가 이순덕 님과 함께 하기를!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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