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소개팅을 했지만 한번도 낭비였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들과 소통하며 얻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들’에 대한 이해는 모두 내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토요판] 이런, 홀로!?
오늘도 만나러 간다
36명과 소개팅을 했다
낭비라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에 충실하던 직장인
‘강제휴식’중이던 영화배우
매력적인 기운의 골프선수
나의 편견·고정관념 깨며
스스로 돌아보는 기회였다
오늘도 만나러 간다
36명과 소개팅을 했다
낭비라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에 충실하던 직장인
‘강제휴식’중이던 영화배우
매력적인 기운의 골프선수
나의 편견·고정관념 깨며
스스로 돌아보는 기회였다
어쩌다 소개팅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돌이켜 봤다. 올해 서른여덟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사람을 소개팅으로 만났다. 지금까지 서른여섯명이다.
내 스마트폰 주소록에 아직 남아 있는 이름들을 찾아 더하니 이런 숫자가 나왔다.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나는 직업을 갖고 있다. 스마트폰 주소록을 사람의 직업과 만난 과정 등에 따라 분류한다. 이름 옆에 ‘친구’ ‘가족’ ‘회사’ ‘거래처A’ ‘동호회B’ 이런 식이다.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들 옆엔 ‘소개녀’(소개팅으로 만난 여성)라고 적어뒀다. 나는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것은 열심이지만 지우고 정리하는 데는 게으르다. 내 휴대전화에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이 남아 있는 다른 이유는 없다.
추정컨대 그들과 함께 먹은 피자와 파스타, 고기와 술의 가격을 합하면 소형차 한 대 뽑을 돈은 족히 되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만나 연애하고 헤어진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두 번의 만남으로 끝이 났다. 그렇지만 그들과의 짧은 만남을 결코 돈 낭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잠깐이었지만 그들과 소통하며 얻은 배움과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이해는 내가 결제한 금액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배우도 만나고 골프선수도 만나고
몇년 전 사귀었던 D는 야근이 많기로 악명 높은 어느 대기업에서 근무했다. 소문대로 D도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경우가 잦았다. 소개팅 날짜를 잡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선자에게서 연락처를 받은 지 한 달 만에 겨우 가능한 날을 ‘발견’했다.
어느 평일 밤 9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그런 탓에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자연스레 “바쁘시죠?”와 “힘들진 않으세요?”로 말을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D의 모습에선 일에 찌든 피곤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신세 한탄을 하면 잘 들어주고 공감해줘야지’라는 나의 사전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됐다.
D는 자신의 일을 즐기는 듯 보였다. 분명 피곤할 텐데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날 무슨 얘길 나눴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와 그녀의 웃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D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그녀에 대한 나의 신뢰로 이어졌다.
시간관념이 철저했던 D는 항상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항상 책이나 신문이 쥐어져 있었다. 하루는 외근을 나갔다 일이 일찍 끝나 나를 보러 회사 앞으로 오겠다고 했다. 당시 D는 거의 일주일 동안 매일같이 야근을 한 상황이었다. “보러 오니깐 좋지?”라는 그를 보면서 나는 헤벌쭉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시간이 없어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3개월로 결제한 헬스장도 가야 하는데 ‘시간이 없고’, 부모님 모시고 여행도 가야 하는데 ‘시간이 없고’, 신문이나 책도 읽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못한다. D를 만나면서 나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 뒤에 숨어온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됐다.
E는 지난해 5월 만났다. E는 배우였다. 누구나 알아보는 정도의 배우는 아니었지만 포털에서 이름을 검색하면 꽤 많은 기사와 사진이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만나던 날 하늘색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 차림의 E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우리는 브런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배우와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상황이 낯설었다. 어색함을 없애려 질문을 던졌다.
“요즘 쉬시면서 시나리오 검토하고 계시겠네요?”
E는 “풉”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E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나는 “시나리오 검토 중”이라는 말은 극소수의 인기 배우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는 “나오는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죄다 지원하고 그러다 캐스팅되면 그냥 한다”고 했다. 그녀는 현재 “타의에 의한 강제 휴식기”에 있다고 했다. ‘강제 휴식기’엔 모델을 비롯한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번다고 했다.
E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화려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연예인들에 대한 나의 편견이 한 꺼풀씩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설경구처럼 배역에 따라 살을 찌웠다 뺐다 하는 배우들이 대단하다고 했더니 E는 “출연료가 얼만데요”라고 했다. 그는 “배우로서 설경구씨 정도의 대우를 받는다면 격렬한 베드신도 안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인기 세습’에 관해서도 대화를 나눴다. 당시 <에스비에스>(SBS) ‘아빠를 부탁해’에 출연한 연예인 자녀들을 두고 ‘인기 세습’ 논란이 일고 있었다. 세습된 인기로 배역을 따내는 연예인과 자녀들을 보면 화가 나겠다고 물었더니, E는 “내 부모가 유명했다면 나도 그랬을 수 있다”고 했다. E는 “앞으로 2~3년 동안 열심히 해본 뒤 그래도 길이 열리지 않으면 연예계를 떠날 생각”이라고 했다. 그녀의 분투를 빌어주고 싶다.
F는 유능한 프로 골프선수였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누적상금도 상당했다. F와의 소개팅을 주선한 선배는 “잘되면 넌 인생 역전”이라며 나를 응원했다. 골프채 두어 번 잡아본 것이 전부인 내게 F와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나: 골프를 오래 치셨는데 아직도 재미있으세요?
F: 네. 잘 맞을 땐 재미있어요.
나: 그렇죠. (잘 맞은 공이) 앞으로 쭉 나갈 땐 기분 좋죠.
F는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내게 함께 온 F의 친구가 말했다. “앞으로 쭉 나가는 건 당연한 건데….” 공이 잘 맞으면 ‘이글’과 ‘버디’를 하는 F와, 공이 잘 맞아야 겨우 앞으로 날아가는 나는 그렇게 달랐다.
사진 속 운동선수로서의 F와 실제 만난 F의 모습에도 차이가 있었다. 필드에서 검게 그을린 그녀도 매력적이었지만 눈앞에서 웃고 있는, 운동으로 다져진 그녀는 또다른 매력을 느끼게 했다.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가 F에게 있었다.
나의 소개팅은 언제 끝날까
F에게 호감이 생겼다. 연락처를 줄 수 있냐고 묻자 F는 내 휴대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어주었다. 헤어지기 전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F의 손은 차갑고 굳은살로 가득했다. 손톱도 짧게 잘려 있었다. 그녀의 지금을 만든 시간이 느껴졌다. 이후 나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F는 1년의 대부분을 국외에서 지내는 사람이었고, 난 장거리 연애에 자신이 없었다. 물론 ‘연애’란 단어조차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 당시 그녀가 날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나를 걱정하는 이들은 이제 소개팅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냐며 ‘한 사람’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그런 조언을 들을 때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났지만 여전히 계속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왜 아직 그 ‘한 사람’을 찾지 못했을까, 나에게 ‘한 사람’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어떤 사람이며,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를 돌아본다. 내가 만남 중독자는 아닐까 싶어 스스로 움찔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다시 소개팅에 나선다. 그 ‘한 사람’이든 혹은 누군가든 만나길 기대하면서. 서른여섯차례의 소개팅과 그들과의 시간 역시 온전히 내 ‘젊은 날’의 일부다. 그들 중 얼굴 표정과 웃음소리와 말투가 또렷이 기억나진 않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로부터 수학과 영어 배우듯 배운 것은 아니지만, 난 그들을 통해 사람을 알아갔고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됐다.
열혈 소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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