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4가구 중 1가구는 혼자 삽니다. 굳이 수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여러분 주변엔 결혼적령기(라고 알려진)를 맞았거나 이미 지나버린 젊은이가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 또한 여러분이기도 하고요. 그런 여러분과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외롭고 쓸쓸하지 않은, 혼자서도 잘 사는 홀로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기사에 대한 의견이나 사연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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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뺨을 맞고 잠에서 깼습니다. 놀라서 눈을 뜨니 갓 돌이 지난 두살배기 조카가 웃으며 손을 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한 대 더 맞기 전에 얼른 조카를 안아 들고 거실로 나가니 이 모습을 본 엄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 애를 안고 있어야 할 나이에….” 즐거운 설, 나흘간의 연휴 첫날이 밝았습니다.
전 서른다섯 살입니다. 아직 결혼은 안 했죠. 네 맞습니다. 저는 서른다섯 결혼하지 않은 여성입니다. 저는 부모님과 결혼한 오빠와 결혼한 남동생과 위아래층으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스물아홉에 일찌감치 결혼한 오빠는 열세 살, 열 살 딸 둘에 네 살짜리 아들 막내를 두고 있습니다. 서른에 결혼한 남동생은 작년 1월 아들을 낳았습니다. 오늘 제 따귀를 때려 깨운 그 아이죠. 문득 오빠보다 제가 먼저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고민을 하던 15년 전 엄마가 떠오르네요. 그때 저희 엄마는 그런 고민을 했었습니다. 기우였죠.
저희 집은 이렇게 삼대가 함께 살고 있는 요즘 보기 드문 집입니다. 부모님과 오빠 부부 내외, 남동생 부부 내외, 네 명의 조카까지 식구만 총 11명에 달합니다.
5명 오빠네도 10만원, 1명 나도 10만원
언제나 그렇듯 음식 장만으로 명절 연휴가 시작됐습니다. 새우를 튀기고, 오징어를 튀기고, 굴전을 부치고, 동그랑땡을 부치고, 깻잎전을 부치고, 부치고 또 부칩니다.
간을 보려 갓 튀겨낸 새우를 하나 집어 들어 입에 넣었습니다. “아 뜨거!”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입에서 튀어나온 새우를 손에 받아 든 절 보며 아빠 입에서도 비명이 튀어나왔습니다. “서른다섯이나 처먹고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냐.” 아마도 서른다섯 딸이 새우튀김 먹다가 입천장이 데어 까지기라도 했을까봐 걱정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결혼한 오빠와 동생의 아이들은
언제나 고모방에서 산다
모래를 피아노에 던지고
“고모, 노처녀야?”라고 물으며
“남자 안 만나면 애들 보라”는 엄마
“언제까지 이러고 살거냐”는 아빠
11명의 밥을 차리고 상을 치우다
설연휴가 갔다, 독립은 언제쯤일까
설 음식 장만이 끝나고 나니 어느새 하루 반나절이 훌쩍 지났습니다. 11명분의 밥상을 차리고, 밥을 먹고, 상을 치우고 나니 오후 반나절이 또 훌쩍 지났습니다. 이제 방에 들어가 좀 누워볼까 하는 찰나 엄마가 방긋 웃으며 절 바라보며 말씀하네요. “남자 만나러 나갈 거 아니면 빈둥대지 말고 애들이랑 좀 놀아줘.”
아니나 다를까 조카들이 하나둘 제 방으로 모여듭니다. 첫째 조카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며 게임을 하고 있고, 둘째 조카는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고 있고, 셋째 조카는 책상에 올라앉아 연필을 집어 던지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막내 조카를 무릎에 앉히고 둘째 조카 옆에 앉았습니다. 둘째가 두드리는 피아노 건반 사이에서 모래가 나오네요. 지금 연필을 던지고 있는 조카가 던진 모래병 탓입니다. 제가 사하라 사막에 갔을 때 기념으로 가져온 붉은 모래가 담긴 병이었습니다. 지난 추석이었습니다. 지나가버린 시간을 그리워하던 절 위해서였을까요. 제 방을 사막으로 만들어 준 조카. 유난히 고왔던 모래가 담긴 병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피아노 건반에서 아직도 튀어나오는 모래를 보며, 또 이렇게 지난 여행의 추억에 잠겨봅니다.
문득 피아노를 치던 둘째가 절 돌아보며 묻습니다. “근데 고모, 고모가 노처녀야?” 잔망스럽기도 합니다. 어디서 배워온 것일까요. “야 쉿!” 스마트폰만 바라보던 첫째가 고개를 들고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둘째를 째려봅니다. 학교에서 배워온 모양입니다. 아, 조기교육. 대답을 찾지 못한 전 아직 말도 못하는 두 살 조카에게 조기교육을 시도해 봅니다. “고모 해봐 고.모. 고오모.”
전날 준비해놓은 음식으로 차례를 지내느라 설날 아침부터 분주했습니다. 어느덧 어린이가 된 첫째, 둘째 조카들이 의젓하게 차례를 지내는 사이, 아직 잠을 깨지 못한 셋째 조카는 상 옆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움직이질 않아서 그렇지 언뜻 절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막내 조카는 차례상 밑으로 기어이 한 번은 들어가 봐야 하겠는지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저 상 앞에 조상님이 앉아 계시다면 떡국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실 것 같지만, 포기를 모르는 막내 조카의 발목을 잡아끄는 사이 차례가 끝났습니다.
드디어 세배 시간. 줄맞춰 서서 참새 같은 입을 벌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합창하며 세배를 하는 조카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엄마의 시선이 제 앞에서 멈춰 흔들립니다. “손자도 있고 손녀도 있고, 내가 이제 아무 걱정이 없는데….”
또다시 11명분의 밥을 차리고, 밥을 먹고, 상을 치우고, 세뱃돈을 주느라 텅 비어버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려니 이번에는 오빠가 말을 겁니다. “이번 달 돈 안 들어왔더라. 확인하고 돈 넣어라.” 저희 집은 ‘가족계’를 하고 있습니다. 남동생이 결혼하면서 식구가 늘어나자 가족 생일에 경조사까지 각자 챙기기는 어려우니 매달 돈을 모아 비용을 대신하기로 한 거죠.
부모님은 선뜻 매달 20만원씩을 쾌척하겠다며, 다른 식구들은 ‘가족별’ 10만원씩 낼 것을 통보했습니다. 오빠네 다섯 식구가 10만원, 동생네 세 식구가 10만원, 그리고 저 혼자 한 가족으로 10만원. 당연히 부모님과 ‘한 가족’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저는 당시 “뭔가 계산이 이상한 것 같다”며 “조정이 필요하다”고 적극 항의했지만, 엄마는 “그럼 네가 결혼을 해서 애를 낳으면 해결된다”고 일축했습니다.
11명분의 끼니를 다섯 번 차리고 먹고 치우고 나니 설 연휴도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문득 이틀간 신발조차 신은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대로 있다간 이번 연휴뿐만 아니라 앞으로 모든 명절 연휴는 이렇게 끝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몰려왔습니다. 늦은 밤 엄마와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 엄마에게 넌지시 “올해 추석에는 나 혼자 여행을 갈까봐. 황금연휴래”라고 말을 건네 봤습니다. 엄마는 콧방귀를 뀌고는 “여행을 갈 것이 아니라 시집을 갈 때”라고 응수했습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30대 비혼 인구 비율이 36.3%에 달하는데, 30대 3명당 1명은 결혼을 안 한 셈이니 내가 결혼을 안 한 것이 그렇게 별다른 일은 아니다”라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작년이었다면 모르지만 아침에 떡국을 먹으며 나이도 한 살 더 먹은 제게 지혜라는 것이 조금은 생긴 덕일 겁니다.
제 생에 가장 많은 덕담을 들은 날은 남동생이 결혼하던 날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엄마의 배려로 굳이 남동생 옆에 서서 하객을 함께 맞았습니다. 그날 결혼식장을 찾은 300여명의 하객은 부모님과 인사를 하고, 남동생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는, 제 손을 붙잡고 “남동생 먼저 장가를 보내다니 어떻게 된 일이냐” “만나는 남자가 있기는 한 것이냐”며 답이 없는 질문들을 던져 주었습니다. 제 30여년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관심과 사랑이 너무 뜨거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협을 느낀 날이기도 했죠.
다들 혼자 또는 함께다, 나만 빼고
그날을 생각하니 어쩐지 좀 전에 본 조카가 또 궁금해집니다. 동생에게 “○○이는 뭐하냐”는 메시지를 보내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올라와서 “잠깐만”이라며 아이를 내려놓고 사라지겠죠. 제가 지금 무슨 일을 한 걸까요.
조카를 기다리며 열어본 스마트폰에는 “시댁에서 하루 종일 음식 하고 설거지만 하다 연휴가 다 갔다” “결혼하라는 잔소리 듣기 싫어 큰집에 안 갔다” “다음 명절에는 기필코 여행을 가겠다”는 친구들의 메시지가 가득합니다. 결혼을 해 누군가와 함께인 친구들은 함께라서, 결혼을 안 해 혼자인 친구들은 혼자라서 힘이 들었답니다.
뉴스에는 ‘혼밥’ ‘혼술’에 이어 ‘혼설족’이 늘고 있다는 기사가 줄이어 나오네요. 누군가는 시험, 취업 준비 때문에, 또 누군가는 각종 잔소리를 피하려 가족을 찾는 대신 혼자 지내는 명절을 택했답니다. ‘혼설’을 택한 이들은 ‘집밥이 그립다. 다음 명절에는 꼭 집에 갈 것’이라고도 하고 ‘혼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니 좋다’고도 합니다. 모두들 각자의 이유로 혼자 또는 함께를 선택하고 있나봅니다. 저만 빼고요.
오늘도 잠자리에 누워 스마트폰을 켭니다. 오늘의 부동산 앱에는 어떤 집이 나왔을까요. 머릿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눈으로는 신상 방들을 살펴보며 잠이 듭니다. 부모님은 “결혼하기 전에 독립은 없다”고 하십니다. 차라리 쫓겨나기라도 했으면…. 내년 설에는 독립, 가능할까요.
이런, 홀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