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희 정의기억재단 이사장이 2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전쟁과평화여성박물관에서 일본 정부와 맺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한일합의’에 대해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해 12월28일 한-일 합의 소식을 언론 통해 접한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하죠. 그날부터 이틀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몇십년간 쌓아올린 탑을 정부가 한순간에 무너뜨린 거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만난 지은희 일본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정의기억재단) 이사장은 새삼 의분을 감추지 못했다. 시민들 역시 ‘12·28 합의’에 분노했다. 합의 댓가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를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대학생들은 24시간 소녀상을 지켰고 수요시위에는 수천명이 몰렸다. 정의기억재단은 그런 분노한 시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박물관에 설치된 소녀상 앞에 앉은 지 이사장은 단호한 목소리로 ‘한일합의’ 무효를 주장했다.
그는 여성운동계의 ‘거목’과도 같은 존재다. 이대 사회학과를 나와 시멘트 관련 회사에 다니던 1969년 영양실조와 과로로 쓰러지는 여성 노동자들을 목격하고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83년 여성평우회 공동대표, 98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공직에 입문해 참여정부 때 제2대 여성부 장관을 지내고 덕성여대 총장을 연임했다. 지난 한일 합의는 그를 다시 시민운동으로 불러 들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입니다”.
지 이사장은 한일 합의를 “거짓말과 기만 위에 쌓여진 합의”라고 정의했다. “정부는 한일합의 발표 직후 ‘정부는 최선을 다했다’, ‘일본 정부가 사죄했다’ 등의 거짓말로 국민을 속였지요.”
최근 12·28 한일 합의를 박근혜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결정했다는 의혹이 <한겨레> 보도로 제기됐다. 주무장관인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석달만 시간 여유를 주면 개선된 합의를 이끌어내겠다’고 박 대통령에게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겨레> 11월22일치 1면) 외교부는 이런 의혹을 부인했지만, 지 이사장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최근 시국을 돌아보면 그 합의도 박 대통령이 한 것인지, 최순실씨가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와 의논했는지 의심스럽다”며 “‘한·미·일 군사 혹은 안보 협력 강화를 위해 제물로 바쳐진 것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사드, 그리고 위안부 피해 문제가 아니겠냐”고 지적했다.
정부가 설립한 ‘화해·치유재단’은 최근 일본이 내놓은 거출금을 피해 할머니 23명에게 현금으로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급액이 6000만원, 4000만원 등으로 제각각이라 차등지급 의혹도 불거졌다. “차등이 아니라 분할 지급하느라 그랬다”고 재단쪽은 부인했다.
지 이사장은 “할머니들에게 무슨 기준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하는지 기가 막히는 일”이라면서 “할머니들의 상황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들에게 이 위로금을 어떻게 설명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일부 피해자들이 위로금을 받았다해도 일본에 사죄·배상 요구를 하는 데 변수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 8월22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설립 허가를 받은 정의기억재단은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 문서 등 옛 자료를 발굴하고 피해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맡고 있다. 피해 할머니 29명과 유족 8명을 대리해 한일합의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피해 할머니 12명과 함께 서울중앙지법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각 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도 냈다.
정의기억재단은 한일합의 1년을 맞는 새달 28일 피해 할머니·유족들과 일본 정부를 한국 법원에 세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 이사장은 “내 나이 일흔이 넘도록 거리에 나서게 만드는 이 정부를 보면 한숨이 나오지만, 수십년간 포기하지 않는 시민들을 보면 가슴이 벅차 오른다”며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가져오면서 역사의 진전은 일어난다. 느려 보여도 언제나 기억하고 행동하면 정의는 온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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