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에 3년을 살아도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는 이웃들, 사오십 평생을 기다려 찾아간 혈육들의 차가운 눈빛 때문에 북한이탈주민들은 수면제 처방 없이는 잠을 못 자는 우울증 환자가 돼가고 있다. 2일 오후, 장하나 전 의원이 북한이탈주민의 일자리 창출 및 마을공동체 실현을 위해서 지난해 문을 연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카페 ‘공간 이음’에서 북한이탈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눈물 깃든 현장이 도처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성과 합리가 아닌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갈등 공간이 전국에서 부스럼처럼 솟아 가라앉지 않습니다. 해법을 찾지 못한 갈등이 오래 묵어 삶을 곪게 하는 사태는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19대 국회의원 장하나·김광진씨가 갈등의 현장을 찾아갑니다. 청년 비례대표로 정치를 경험한 두 전직 의원이 현장 속에서 정치를 성찰하며 현직 국회의 역할을 고민합니다.
“아파트 양옆에 있는 두 집은 서로 음식이 오고 가고 이웃간의 정을 나누는 게 뻔히 보이는데 우리 집만 건너뛰어요. 처음에는 먼저 인사를 건네도 받아주지 않는 것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지금은 기대도 않죠. 단지 말투 때문에, 북에서 왔다는 이유로 끝없이 경계하는 거죠. 남한 사람들은 좀처럼 ‘곁’을 주지 않네요.”
북한이탈주민인 정영화(가명)씨는 2014년 10월 한국에 왔다. 만 2년이 지났는데도 여태 옆집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남한 사람들 때문에 정씨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북에서는 쉴 새 없이 농사일을 해도 배고픔을 해결하기 어려워서 다들 악만 남았고 그래서인지 말투가 곱지 않았어요. 남한 사람 말투가 북과는 정반대로 너무나 온화해서 마냥 신기했는데 이제는 그게 진심인지 그냥 겉치레인지 믿음이 안 가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카페’
정씨는 북을 떠나 중국에서 십 년 가까이 살다가 한국에 온 경우인데 오히려 중국인들은 곁을 내주더라며 그 시절을 추억했다. 이제 중국어에도 능통한 정씨에게는 중국인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비록 불법체류자 신분이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그때가 훨씬 살맛 났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계단 오르는 일부터 밥 짓고, 빨래하고 온갖 일들을 전기가 다 해주기 때문에 몸뚱이는 정말 편해요. 그런데 북에 두고 온 이웃들, 비록 말투는 거칠지만 콩 반쪽이라도 주고받던 마을 사람들 얼굴이 자주 떠올라요.” 또 다른 북한이탈주민의 말이다.
“한국에 와서 환영받지 못할 거라고 짐작은 하셨나요?” 나는 이들에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환영받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지만 친척들마저 그럴 줄은 몰랐죠.” 북한이탈주민 가운데는 남한 땅에 고향을 둔 분들이 꽤 많다. 한국에 혈육이 있다는 거다. 그런데 왜 외로울까?
북에서 국군 포로의 자녀는 대학 진학도 할 수 없고 당 간부, 행정 간부, 보안성 간부, 군대 간부 등의 사회적 지위를 절대 얻을 수 없다. 대대로 탄광노동자나 농민으로 살 수밖에 없는 처지는 그들이 탈북을 결심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고향 땅, 나의 뿌리는 저 멀리 남쪽에 있다’는 사실도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하는 데 큰 동기가 된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그것은 탈출이 아니라 단지 본능에 따른 귀향일지도 모른다. 한국에 온 후 국방부를 통해 한국에 있는 친척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만나게 되는 이유다.
그러나 가끔씩 텔레비전에 나오는 오래전 이산가족찾기 영상처럼 뜨거운 눈물의 상봉이 전부는 아니다. 눈물도 잠시, 추석에도 설날에도 고향집에 초대받지는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북한이탈주민 ㄴ씨는 한국의 친척들이 그렇게 냉담한 이유를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재산이라도 나눠 달라고 할까봐 그런 거죠. 그래서 이미 친척들의 소재를 파악했지만 일부러 연락하지 않고 있다는 사람도 많아요. 괜히 뭔가 필요한 게 있어서 연락했다고 오해받을까봐 일단 남쪽에서 자수성가한 다음 만나겠다는 거죠.”
“인사해도 받아주지 않는 이웃들
돈 달라고 할까봐 피하는 친척들”
정 붙일 곳 없는 북한이탈주민들
극심한 우울증 수면제 달고 살아
“차라리 배고픈 북한 자꾸 떠올라”
인권상황 열악한데 국회는 무심해
“다 내려오라”는 무책임한 대통령
지난해 노원구에 문 연 ‘공간 이음’
90만원 받지만 4대 보험에 공부도
북한이탈주민 자립 돕는 둥지 역할
목숨을 내놓고 시커먼 두만강에 몸을 던졌다. 캄보디아, 베트남의 정글을 며칠이고 걸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또 넘겨 다다른 낯선 땅 어딘가에 가족이 있다는 거, 얼마나 큰 기대와 설렘과 위안이 됐을까? 하지만 목숨을 건 대가는 가혹하기만 하다. 옆집에 3년을 살아도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는 이웃들, 사오십 평생을 기다려 찾아간 혈육들의 차가운 눈빛 때문에 어느덧 수면제 처방 없이는 잠을 못 자는 우울증 환자가 되어 있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4월 서울 노원구에 문을 연 ‘공간 이음’이라는 카페는 북한이탈주민에게 특별한 보금자리다. 정 붙일 곳 없는 그들의 둥지다. 북한이탈주민의 70%가 여성이고, 70%가 함경북도 출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공간 이음’은 네 명의 함경북도 출신 여성이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서울노원지역자활센터가 남북하나재단과 함께 자활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었다. 주 40시간 근무에 4대 보험을 공제하고 받는 실수령액은 90만원이 채 안 된다고 하니 아무리 자활근로라지만 서울 물가를 생각하면 생계가 걱정되는 금액이다. 그래서인지 카페가 문을 연 지 1년 반이 된 지금 이미 많은 동료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물론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해서 나간 것이다. 지금은 건강 문제로 힘든 일을 할 수 없는 두 명의 창립 멤버와 학업을 병행하기 위해 일하는 틈틈이 책을 펼쳐 볼 수 있는 이곳을 선택한 두 명의 청년이 ‘공간 이음’을 지키고 있다. 돈벌이만을 놓고 볼 때 좋은 일자리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적어도 정착 초기의 북한이탈주민에게 이곳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동안 매우 안전한 완충지대가 돼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카페’라 부르고 싶다. 이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도 바로 그 점 하나다.
만약 20대 총선에 당선됐다면
국회의원 임기 중에 합동심문센터 안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 문제를 제기했었다. 합심센터는 국가정보원 관할로 한국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이 맨 처음 가게 되는 곳이다. 합심센터에서는 누구나 예외 없이 미성년자까지도 독방에서 지내며 최소한의 법률적 조력도 받지 못한 채 기한 없는 심문(조사)을 받는다. 아무런 혐의 없이 단지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이유로 피의자보다도 못한 처우를 받는데 그 자체가 위헌적이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이러한 합심센터의 문제점에 공감하고 나섰지만 국정원은 무소불위 또는 치외법권에 다름없었다. 국정원에 의한 간첩 조작 사건까지 벌어졌지만 아직도 운영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
북한이탈주민들이 합심센터의 인권 침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에 해결이 쉽지 않은 점도 있다. 합심센터를 거쳐 하나원에서 3개월의 교육을 마치고 나오면 전국 어디에 터를 잡든 간에 담당 형사가 배정되고, 정부로부터 임대아파트를 포함한 각종 정착 지원을 받아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꺼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이익을 당할까 걱정하는 이들에게 ‘신분을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제아무리 국회의원이라 한들 안심시키지 못했다. 국회의원실과 교류한 것이 어떻게든 담당 형사와 국정원의 귀에 들어갈 거라고 믿었고, 나 역시 ‘전혀 들키지 않을 거다. 불이익이 전혀 없도록 하겠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에 결국 제보자를 구하지 못하곤 했다.
공간 이음은 서울노원지역자활센터가 남북하나재단과 함께 자활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었다. 주 40시간 근무에 4대 보험을 공제하고 받는 실수령액은 90만원이 채 안 된다고 하니 아무리 자활근로라지만 서울 물가를 생각하면 생계가 걱정되는 금액이다. 그러나 북한이탈주민들을 더 힘들게 하는 건 생활의 곤궁함보다 외로움인지도 모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 이후 합심센터 등 북한이탈주민과 관련된 문제를 꾸준히 다루지 못했다. 그러나 우연한 만남은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만들었다. 당내 경선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지난 총선 때 나는 노원구 갑 지역구에 도전했었다. 선거 운동을 위해 참석한 지역 행사에서 수십 곳의 홍보 부스마다 인사를 드렸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공간 이음’을 알리는 부스였다. 임대아파트 단지가 많은 지역구였기 때문에 그곳에 거주하는 사회적 약자들(소위 수급자, 장애인, 조손가정 또는 한부모 가정 등)의 문제에 대해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던 때였지만 그곳에 함께 살고 있는 북한이탈주민의 이야기는 미처 듣지 못했다. 마치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사실 그들이 거기에 있는데 그걸 헤아리지 못했던 것뿐이다. 부끄러웠다. 3만명, 인구의 0.06%. 그들의 삶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당연할 만큼 적은 수지만 황당한 ‘통일 대박론’이 횡행하는 시대에 국회의원이나 되는 나의 무지와 무관심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바로잡기 위해 곧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켜 ‘공간 이음’의 모든 구성원과 함께 간담회 형식의 만남을 가진 게 사연이라면 사연이다. 지금은 네 명이지만, 1년 전만 해도 성원은 열 명 가까이 되었다. 만약 20대 총선에 당선됐다면 북한이탈주민의 삶에 대한 의정활동을 본격적으로 해봤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이 글로나마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절실하게 나누고 싶었다.
하나원을 나와 낯선 도시, 낯선 임대아파트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으면 무슨 생각이 날까? 헤어진 가족 생각,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던 기억,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한없는 외로움이 사람을 짓누를 것이다. 손발이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이유다. 1년 전 간담회 때도 입을 모았던 이야기다.
“잠이 안 와요. 우울하죠.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북한에서 입에 풀칠하기 위해 삭신이 남아나지 않던 때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죽고 싶다는 생각,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하나원 동기 말고는 친구가 없어요. 동기들은 천안, 평택, 인천 등 전국 각지로 흩어져 카톡이나 주고받을 뿐이죠. 곁에 아무도 없어요. 외롭고 또 외롭죠.” 정씨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의 이야기다.
신변보호는 안중에도 없는 정부
지난 4월 통일부가 중국의 북한식당 직원 13명의 집단 탈북을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개한 바 있다. 북한이탈주민 당사자와 북에 남은 가족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 탈북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 원칙에 반한 일이다. 게다가 합동심문센터에서 이들의 신원과 탈북경위 등을 조사하기도 전에, 입국 하루 만에 탈북 사실을 전격 발표한 것은 도저히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파행이다. 당시 언론들도 통일부의 무리하고 무책임한 발표가 4·13 총선에 영향을 주기 위한 정치 행위일 거라는 분석, 그리고 이로써 남북 관계는 더욱 경색될 거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통일부 발표 때문에 당시 입국한 13명과 북에 있는 가족들 신변이 위험해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미 한국에 정착해 있는 3만명의 북한이탈주민들이 이로 인해 피눈물 흘린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나 역시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북한이탈주민과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 사이를 잇던 가느다란 끈이 하루아침에 끊어졌다. 이전에는 소위 브로커를 통해 북에 있는 가족에게 돈도 보낼 수 있었고, 전화 통화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국제전화가 가능한 중국 휴대전화가 브로커를 통해 가족에게 전달되고 두 사람이 함께 신호가 잡히는 집 근처의 높은 산에 올라 통화를 했었는데. 통신 상태가 안 좋기 때문에 통화는 5분을 넘기기가 힘들고, 한 통화당 브로커에게 지급하는 비용은 20만원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4월 이후 북한 당국의 감시가 삼엄해져서 여전히 통화도 송금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상황인데 ‘남한으로 다 내려오라’고 호언장담하던 박근혜 대통령은 무엇을 책임질 것인가? 국회는 이 한심한 정부에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장하나 전 국회의원
*‘하나와 진이의 갈등 속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장하나·김광진 전 의원과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