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여성살인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인정하고 재수사할 것을 요구하는 20대 여성들이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현판에 F학점 모양으로 테이프를 붙이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016 한국, ‘여혐’과 마주서다
⑤ 어떻게 극복할까
‘내가 겪은 여혐’ 공론화 커질수록 변화 빨라진다
⑤ 어떻게 극복할까
‘내가 겪은 여혐’ 공론화 커질수록 변화 빨라진다
27일 낮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정문 현판에 낙제 학점을 뜻하는 ‘F’ 모양의 빨간색 스티커가 여러 장 붙었다. 스티커를 붙인 이들은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정신질환자에 의한 묻지마 살인’으로 규정한 경찰과 검찰에 항의하기 위해 모인 여성들이다. ‘20대 페미니스트’라고 자신들을 밝힌 여성 10여명은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여성 폭행 사건을 경찰과 검찰이 ‘묻지마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며 “강남역 사건 등 계속되는 여성 관련 범죄들을 ‘여성혐오 범죄’로 인정하고 재수사하라”는 내용의 퍼포먼스를 펼쳤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이후,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여성혐오’를 말하기 시작했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자발적 ‘포스트잇 추모’ 물결은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혐오와 위협, 폭력을 각자의 ‘언어’로 표출하는 도화선이 됐다. 이번 사건의 뿌리에 여성혐오가 깔려 있다는 주장에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몬다’는 반발 등 ‘성 대결’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피의자 김아무개(34)씨의 ‘조현병’ 망상이 왜 ‘여성’을 겨냥한 살인으로 이어진 것인가에 대해 우리 사회를 냉정히 성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트위터와 페이스북 ‘강남역 10번 출구’ ‘강남역 10번 출구 자유발언대’ ‘강남역 살인사건 공론화’ 등에서는 지금 이순간에도 자신이 겪은 여성혐오 피해 경험을 말하고, 공유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 거리에서도 여성들은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 ‘자유발언대’를 통해 분노와 공포의 순간을 털어놓고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 페이스북 운영자인 이지원(24)씨는 “여성들이 자기 삶으로 증명하는 여성혐오가 실제로 존재했구나를 수많은 포스트잇을 보며 가슴 깊이 느꼈다”고 말했다.
‘나도 겪었다’는 피해경험 공유
여성혐오 대책 토론회 등
공론화 커질수록 변화 빨라져
공용화장실 개선·치안 강화 등
근본대책 될 수 없어
일상의 성평등 위해 교육 등 필요 여성혐오 범죄의 원인과 대책을 논의하는 토론회는 이례적으로 북적이고 있다. 지난 26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강남역 살인사건 긴급 집담회: 대한민국 젠더 폭력의 현주소’ 토론회장에는 주최 쪽인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예상한 것보다 4배나 많은 400여명이 참가했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촉발한 ‘반 여성혐오’ 움직임이 “기존의 단체 중심 여성운동이 아니라 개인이 제안하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실천으로 이뤄졌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는 “본인의 경험을 자각하고, 몸과 마음으로 공감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점이 이전과 다른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공용화장실 개선이나 정신장애인 관리, 밤길 치안 강화 등이 우리 사회 여성혐오의 근본 대책이 될 순 없다고 지적한다. 이보단 이번 사건을 계기로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는 여성혐오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공론화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한다. 허민숙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는 “차별을 개인의 문제로 만들면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포기하고 자신을 책망하고 불운을 탓하게 되는데, (여성혐오가 공론화됨으로써) 여성들이 또다른 구성원이 나와 비슷한 피해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폭력이 왜 차별의 문제인지, ‘젠더(성) 권력’이 왜 여성혐오의 배경인지를 인지하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강남역 추모 현장에서 나타난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 회원들의 반발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차별 구조를 보여준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몰락한 백인 남성 노동자의 지지가 없었다면 트럼프도 없었듯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한국 남성’이 없다면 일베도 없다. 일베는 이런 한국 남성을 대표한다고 자처하기에 강남역에 갈 수 있었던 것”이라며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들에게 (너희는)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걸 알리기 위함”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여성혐오를 넘기 위해 우리 사회 약자를 혐오와 차별로부터 보호할 ‘차별금지법’ 제정 목소리도 나온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차별금지법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말하는 나라에서 당연한 것이며, 폭력이나 범죄들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을 규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필요하고 우선적으로 돼야 한다”며 “이런 법 제정은 실제적인 범죄 예방 효과보다는 국가·공동체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더 근본적으론, 청소년 시절부터 ‘김여사’ ‘슴만튀’(가슴 만지고 튀기) 등 여성혐오성 단어들을 유희로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일상의 성평등 정착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성인지적 인권 감수성을 높이려면 대상별, 연령별 성평등 인권교육 체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그것이 공교육에서 진행되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여성혐오 범죄는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다. 문제가 생기면 경찰, 구청 등 필요한 곳에 적극적으로 민원을 넣고, 항의 방문을 하고, 밤길 되찾기 시위에 나가고, 포스트잇도 붙이면서 무엇인가 변화를 만드는 게 핵심”이라며 “침묵을 깼으니 끝까지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미영 박수진 기자 instyle@hani.co.kr
여성혐오 대책 토론회 등
공론화 커질수록 변화 빨라져
공용화장실 개선·치안 강화 등
근본대책 될 수 없어
일상의 성평등 위해 교육 등 필요 여성혐오 범죄의 원인과 대책을 논의하는 토론회는 이례적으로 북적이고 있다. 지난 26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강남역 살인사건 긴급 집담회: 대한민국 젠더 폭력의 현주소’ 토론회장에는 주최 쪽인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예상한 것보다 4배나 많은 400여명이 참가했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촉발한 ‘반 여성혐오’ 움직임이 “기존의 단체 중심 여성운동이 아니라 개인이 제안하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실천으로 이뤄졌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는 “본인의 경험을 자각하고, 몸과 마음으로 공감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점이 이전과 다른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공용화장실 개선이나 정신장애인 관리, 밤길 치안 강화 등이 우리 사회 여성혐오의 근본 대책이 될 순 없다고 지적한다. 이보단 이번 사건을 계기로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는 여성혐오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공론화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한다. 허민숙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는 “차별을 개인의 문제로 만들면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포기하고 자신을 책망하고 불운을 탓하게 되는데, (여성혐오가 공론화됨으로써) 여성들이 또다른 구성원이 나와 비슷한 피해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폭력이 왜 차별의 문제인지, ‘젠더(성) 권력’이 왜 여성혐오의 배경인지를 인지하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강남역 추모 현장에서 나타난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 회원들의 반발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차별 구조를 보여준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몰락한 백인 남성 노동자의 지지가 없었다면 트럼프도 없었듯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한국 남성’이 없다면 일베도 없다. 일베는 이런 한국 남성을 대표한다고 자처하기에 강남역에 갈 수 있었던 것”이라며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들에게 (너희는)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걸 알리기 위함”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여성혐오를 넘기 위해 우리 사회 약자를 혐오와 차별로부터 보호할 ‘차별금지법’ 제정 목소리도 나온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차별금지법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말하는 나라에서 당연한 것이며, 폭력이나 범죄들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을 규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필요하고 우선적으로 돼야 한다”며 “이런 법 제정은 실제적인 범죄 예방 효과보다는 국가·공동체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더 근본적으론, 청소년 시절부터 ‘김여사’ ‘슴만튀’(가슴 만지고 튀기) 등 여성혐오성 단어들을 유희로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일상의 성평등 정착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성인지적 인권 감수성을 높이려면 대상별, 연령별 성평등 인권교육 체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그것이 공교육에서 진행되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여성혐오 범죄는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다. 문제가 생기면 경찰, 구청 등 필요한 곳에 적극적으로 민원을 넣고, 항의 방문을 하고, 밤길 되찾기 시위에 나가고, 포스트잇도 붙이면서 무엇인가 변화를 만드는 게 핵심”이라며 “침묵을 깼으니 끝까지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미영 박수진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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