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행복한 세상]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한 단층 상가건물 33㎡(10평) 정도의 작은 방 안에 커다란 식탁과 조리시설이 마련돼 있는 ‘나눔 부엌’이 들어서 있다. ‘청춘플랫폼’으로 불리는 이 공간은 커뮤니티 디자인 일을 하는 ‘블랭크’가 2013년 4월에 만들었다. 블랭크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청춘플랫폼에서 주민들과 밥을 먹었다. 함께 먹는 밥은 삭막한 도시에서 깊은 대화를 할 수 있게 돕는다. 20~30대 청년 8명으로 구성된 블랭크는 동네 공동체의 과제 해결을 도모하면서 수익도 얻는 소셜벤처다. 청춘플랫폼은 그 출발선이었다.
‘동네 안에서만 일을 해도 지속가능한 수익을 거두는 모델을 만드는 것’이 블랭크의 목표다. 주민 개개인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되어서, 작은 동네 안에서 하나의 경제권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블랭크의 김지은(31)씨는 “건축설계사무소를 다니던 5년 동안 회사는 급속히 성장했는데, ‘나’라는 존재는 점점 초라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회사가 커질수록 일에 대한 대가가 윗분들에게만 가고, 내가 소비하는 모든 것도 대기업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지은씨가 느끼는 현재 경제구조에서의 문제는 이런 것이다. 개인이 소비하는 돈이 주로 대기업 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하지만 대기업의 투자는 상대적으로 줄어들면서 청년들이 가고 싶어하는 ‘괜찮은 일자리’는 크게 줄었다. 기업으로 흘러간 돈이 다시 개인의 소득으로 돌아와서 소비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명문대를 가고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만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사회에서 이런 흐름을 거부하는 청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오늘공작소’는 사무실과 부엌을 공유공간으로 쓰면서 비용을 줄이는 실험을 벌이고 있고, 인천 서구 검암동의 ‘우리동네사람들’은 청년들끼리 모여 살며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전환’을 실험하는 이들은 묻는다. 모두가 상위 10%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실제는 가능한가? 무엇보다, 행복한가?
넌 대기업 다니니?…우린 새로운 길로 간다
블랭크가 꿈꾸는 모델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사례는 지난해 10월 이 동네의 오래된 작은 서점인 대륙서점을 리모델링한 경험이다. 1987년부터 30년 가까이 운영돼온 대륙서점은 찾는 이가 줄면서 절반만 불을 켠 채 문 닫을 날만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결혼해 이곳에 이사 온 지 1년 정도 된 오승희(33)씨는 블랭크가 청춘플랫폼에서 연 ‘골목영화제’에서 대륙서점 이야기를 듣게 됐다. “서점이 사라지게 되면 너무나 아쉬울 것 같다”는 한 주민의 말을 들은 오씨는 남편과 함께 대륙서점 운영에 뛰어들었다.
청춘플랫폼 ‘블랭크’
“주민들이 생산자며 소비자
작은 동네가 하나의 경제권” 공간공유 ‘오늘공작소’ “좁은 연립 넓고 값싸게 쓰자
부엌·작업 공간 등 함께 사용” 청년공동체 ‘우리동네사람들’ “수입 적어도 하고싶은 일 하게
재능나누며 필요 비용 최소화”
블랭크는 오씨 부부의 의뢰를 받아 대륙서점의 인테리어 설계를 맡았다. 새로 문을 연 대륙서점에는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커다란 탁자와 커피와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간단한 주방이 설치됐다. 주민들이 추천한 책을 추천사와 함께 진열할 수 있도록 했다. 첫 행사는 주민이 쓴 책을 소개하는 출판기념회였다. 매주 수요일에는 주민들과 독서모임을 열고, 올해부터는 책 쓰기 습작 모임을 열 예정이다. 아직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책을 중심으로 한 동네의 ‘지식문화 커뮤니티’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공간공유·마을공동체 사업 등
다양한 삶의 길 시도 블랭크는 죽어가던 서점을 커뮤니티 시설로 바꿔주는 설계를 해주면서 전환을 돕고, 설계비로 수입을 얻게 된다. 대륙서점이 지속가능한 수입을 올리게 된다면, 동네에서 대형 인터넷서점 등 외부로 유출되는 자본의 흐름을 일부라도 내부로 돌리는 전환이 이뤄지게 되는 셈이다. 블랭크는 2012년 서울시가 주최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에서 금상을 수상해 받은 상금으로 청춘플랫폼을 만들며 시작됐다. 그동안 청춘플랫폼에선 주민들과 함께하는 수많은 모임이 열렸다. ‘요리연구소’는 독거청년들을 위해 멸치 종류에 따라 어떤 요리에 쓸 수 있는지 기본적인 요리법을 알려주거나 양배추처럼 한 통을 구입하면 혼자 다 못 먹는 음식들을 서로 가져와 나누는 모임이었다. 통기타, 하우스맥주 만들기, 드라이플라워 만들기 모임 등도 진행했다.
모두 플랫폼에서 밥을 먹으며 주민들이 제안한 것들이다. 블랭크 김수연(29)씨는 “‘블랭크’라는 이름처럼 우리는 동네의 비어 있는 공간을 찾아 재생시켜 주민들이 활발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목표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블랭크는 지난해부터 99㎡(30평) 크기의 공유사무실인 청춘캠프도 운영하고 있다. 청춘플랫폼을 통해 알게 된 동네 청년들이 함께 들어와 일하는 공유 사무실이다. 수필·일러스트레이트 작가인 원대한(29)씨와 사진·일러스트레이트 작가 유수진(25)씨, 디자이너들의 모임인 프리키 등이 이곳에 들어왔다. 블랭크가 임차한 공간을 다른 청년들이 일부 비용을 함께 부담해 사용하면서 비용을 많이 줄였고, 동네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도 찾아보려 한다.
아직 초기단계이다 보니 직원들의 월급은 140만~150만원 수준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목표가 ‘성공’해서 대기업 수준의 월급을 받는 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김수연씨는 “공유를 통해 비용을 최소화한다. 일단 공유부엌(청춘플랫폼)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공간(청춘캠프)도 만들었다. 앞으로는 함께 살 수 있는 공유주택인 청춘스테이도 만들어보려고 한다. 비용을 최소화해 적은 수입으로도 대안적인 삶을 살며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공동대표인 김동리(33)씨는 “아직까지는 동네 바깥에서 건축설계 일을 벌여 주된 수입을 얻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동네에서 벌어지는 전환을 돕고 그에 따라 수입도 얻는 시스템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2014년 9월 등장한 ‘오늘공작소’도 눈여겨볼 만하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오래된 연립주택인 부흥주택의 방 한 칸 18~25㎡를 잠자고 쉬는 용도로만 정하고, 대신 바로 옆 건물에 공유공간인 ‘이글루’를 만들어 함께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건물 한 층을 빌려 꾸민 이 공간에는 조리공간과 함께 커다란 탁자를 둬 작업을 하거나 식사를 할 수 있게 했고, 샤워실을 설치해 연립주택의 좁은 화장실을 보완할 수 있도록 했다.
오늘공작소의 한광현(44)씨는 “학생들은 좁은 방에 식탁과 세탁기, 책상 등을 모두 두고, 공부하러 홍대 앞 카페에 간다. 좁은 방은 더 좁아지고, 쓸데없이 비용이 늘어난다. 이런 삶을 바꿔 비용을 줄이고, 활동 무대를 동네로 향하도록 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설명했다. 주거 용도로 연립주택을 이용하던 2명이 개인 사정으로 떠나면서 지난 2월에는 작업실로 용도를 바꿨다. 20㎡ 수준의 전용공간과 이글루를 함께 쓰면서 월 임대료 25만~30만원 수준으로 이용하다 보니 만족도가 높아 판화 예술가, 동네 카페 운영자 등 10명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한씨는 “이렇게 값싼 가격으로 나오는 작업실이 아니었으면 이 동네로 들어올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란 점에서 오늘공작소의 실험 1단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2012년 4월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건물 지하에 문을 연 ‘우리마을카페오공’은 상부상조의 정신을 모토로 하는 협동조합형 커뮤니티 카페다. 안에는 구두, 독서대, 사과잼, 액세서리 등 개개인이 만든 상품이 곳곳에 진열돼 있다. 커피숍처럼 각자가 만든 음료도 파는데, 가격은 2500~4000원 수준이다. 이 협동조합에는 현재 38명이 활동하고 있다. 재능을 나누면서 사는 데 필요한 비용을 최소화한다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수입이 적더라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는 취지로 시작된 일이다. 카페오공의 조정훈(36) 활동가는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면서 하기 싫은 일에 매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망’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청년 3명이 방 3개짜리 집을 함께 쓰면서 이름 붙인 ‘아현동 쓰리룸’ 거주자인 천휘재(31)씨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 동네에서 자신들처럼 공유주거로 살고 있는 다른 청년들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언뜻가게’를 열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전통시장인 뚝도시장에 자리를 잡은 청년모임 ‘컬처폴’은 “공동체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며 학생들을 상대로 한 ‘시장 속 경제학교’를 열어 시장으로 주민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최근 <숨통이 트인다> 책을 다른 이들과 공동으로 쓴 신지예(26) 오늘공작소 대표는 “한국 사회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장에 취업해 집을 사고, 결혼하고, 자가용을 구입하는 것이 ‘보통의 삶’이나 ‘정답’으로 여겨지는 사회다. 한국과 같이 경제적인 풍요를 이룬 사회에서는 이제 다양한 삶의 노선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는 “저성장 시대가 이어지면서 점점 취업의 문은 좁아지고 청년들의 어려움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답’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청년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블랭크 김수연씨는 이렇게 말했다. “동네에서 ‘마을 아카데미’를 열었을 때 대안학교 학생과 대화한 적이 있어요. 그 학생이 ‘대안학교 끝나면 대안사회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희 같은 청년들이 그럭저럭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대안사회로 한발 가까이 가는 셈 아닐까요?”
음성원 기자 esw@hani.co.kr
지난달 13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서 커뮤니티 디자인 일을 하는 청년 소셜벤처 블랭크의 직원들이 함께 사무실을 공유하는 청년들과 함께 청춘플랫폼 앞에 모였다. 청춘플랫폼은 블랭크가 동네 주민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각종 커뮤니티 활동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동네 경제권 만드는 ‘블랭크’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작은 동네가 하나의 경제권” 공간공유 ‘오늘공작소’ “좁은 연립 넓고 값싸게 쓰자
부엌·작업 공간 등 함께 사용” 청년공동체 ‘우리동네사람들’ “수입 적어도 하고싶은 일 하게
재능나누며 필요 비용 최소화”
공간공유 ‘오늘공작소’
다양한 삶의 길 시도 블랭크는 죽어가던 서점을 커뮤니티 시설로 바꿔주는 설계를 해주면서 전환을 돕고, 설계비로 수입을 얻게 된다. 대륙서점이 지속가능한 수입을 올리게 된다면, 동네에서 대형 인터넷서점 등 외부로 유출되는 자본의 흐름을 일부라도 내부로 돌리는 전환이 이뤄지게 되는 셈이다. 블랭크는 2012년 서울시가 주최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에서 금상을 수상해 받은 상금으로 청춘플랫폼을 만들며 시작됐다. 그동안 청춘플랫폼에선 주민들과 함께하는 수많은 모임이 열렸다. ‘요리연구소’는 독거청년들을 위해 멸치 종류에 따라 어떤 요리에 쓸 수 있는지 기본적인 요리법을 알려주거나 양배추처럼 한 통을 구입하면 혼자 다 못 먹는 음식들을 서로 가져와 나누는 모임이었다. 통기타, 하우스맥주 만들기, 드라이플라워 만들기 모임 등도 진행했다.
주민 커뮤니티 만든 ‘아현동 쓰리룸’
청년모임 ‘컬처폴’
청년공동체 ‘우리마을카페오공’
청년기획 특별취재팀
황보연 박승헌 최우리 음성원 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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