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행복한 세상] 응답하지 않는 헬정치
“청년위원회가 별거 있나? 뭐 그렇게 열심히 해. 선거 때 동원되는 게 청년위원회지.”
2014년 봄, 옛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전국 청년위원장이었던 안희철(32) 변호사는 당 최고위원회에 들어가기 전 인사를 건넨 한 국회의원의 말을 듣고 당황했다. 그해 6·4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안면이 없던 의원에게서 “선거운동에 몇명 동원할 수 있냐”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대학 시절 야학교사를 하다가 정치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에 이른 그는 2012년 ‘안철수 현상’에 발을 들였다. 이후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합당 과정에서 공동 청년위원장을 맡아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았지만 결국 1년도 안 돼 당직을 내려놨다.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씨의 좌절은 청년에 둔감하기만 한 현실 정치권의 수많은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새누리 “청년기준 45살” 결의문
더민주 대의원 20~30대 9%뿐
정의당·녹색당 등 진보정당은
당원중 20~30대 비율 36%대 선거때면 ‘비례 할당’ 떠들지만
‘일회성 이벤트’ 반짝 영입하고
끝나면 우릴 유령 취급해
“청년을 정당 미래로 보지 않아” 35살→45살→39살. 지난해 11월부터 최근까지 더불어민주당(더민주)은 ‘청년 비례대표’ 후보 나이 기준을 두 차례 바꿨다. 2012년 19대 총선과 마찬가지로 청년의 기준을 ‘만 35살 이하’로 정했지만 40대 당원들의 반발로 10살을 올렸다. 하지만 “45살이 무슨 청년이냐”는 비판에 결국 지난 20일 ‘만 39살 이하’로 6살을 낮춰 최종 확정했다.
새누리당 중앙청년위원회와 전국 시·도당 청년위원장 협의회는 지난 13일 “청년의 기준을 만 40살 이하가 아닌 45살 이하로 해야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최근 새누리당 공천특위가 청년 신인의 가산점 부여 기준을 만 40살 이하로 하기로 했지만 오히려 이를 늘려달라고 한 것이다. 더민주와 마찬가지로 40대 당원들이 반발한 탓이다. 정당판에서 청년은 기준도 실체도 모호한 유령 같은 존재다.
정치가 수많은 청년들의 외침을 외면한 지 너무도 오래다. 그사이 청년들은 냉소와 불안, 분노를 키웠다. 정치는 왜 아직도 응답하지 않는 걸까?
지금 정치에는 20~40대가 뻥 뚫려 있다. 1990년대 후반 386세대가 젊은피 수혈이라는 이름으로 정치권에 진입한 뒤 청년세대는 명맥이 끊겼다. 2012년 19대 총선 국회의원 당선자 300명 중 40살 미만은 9명이고, 초선의 평균 나이는 56.4살이었다. 더민주 대의원의 평균 연령은 58살이고, 이 중 20대는 2%, 20~30대의 경우 9%를 차지하는 데 그친다. 20~30대 당원이 없다 보니 청년위원회 운영을 위해 나이 기준을 45살까지 높일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의 경우 더민주와 비교해 당원 평균 연령은 비슷하고, 20~30대 당원의 비율은 다소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20~30대가 각각 36.6%, 36.2%를 차지하는 정의당, 녹색당 등 진보정당이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기존 정당에 청년들은 그다지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다. 최근 10여년 동안 각종 선거에서 20대 청년층의 투표율은 60살 이상 투표율의 절반을 웃도는 수준이었다. 전체 선거인 수 중 20대가 차지하는 비율도 16.4%(60살 이상 20.7%)에 그친다. 더민주의 우석훈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은 “2012년 대선 패배 뒤 야당에서도 50대 이상 정책 개발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청년이 중요하지 않다기보다, 전략적으로 그런 흐름이다”라고 말했다.
청년은 선거 때면 정당이 연출하는 ‘깜짝 이벤트’의 대상일 뿐이다.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이준석·손수조 마케팅’을 펼치고, 민주통합당이 오디션 선발 방식의 청년 비례대표제를 통해 김광진·장하나 의원을 국회로 데려왔다. 하지만 일회성 이벤트였다는 냉정한 평가가 따라온다. ‘2세대 진보정치’를 내걸고 정의당 당대표에 출마했던 조성주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소장은 “정당이 선거 때 청년을 반짝 영입만 하고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는다. 청년을 정당의 미래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당에서 청년들이 성장할 수 없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는 청년위원회가 중앙당이 아닌 각 지역위원회에 종속된 구조가 꼽힌다. 더민주의 한 청년 당원은 “청년위원회 활동을 하려면 기성 정치인인 지역위원장에게 잘 보여야 한다”며 “결국 우리를 선거 때 전단 돌리는 존재로만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당 구조가 이렇다 보니 제대로 된 청년정책이 나올 리 없다. 여성정치 발전을 위해 정당 국고 보조금의 10%를 사용하도록 법제화돼 있지만 청년에게는 독립적으로 잡혀 있는 예산도 없다. 당연히 청년 정책 발굴도 뒷전이다. 새정치연합 혁신위원(청년 몫)을 지낸 이동학 다준다연구소장은 “선거 때마다 청년 정책 요구를 당에서 다 들어줄 것처럼 나와 열심히 만들어 올리지만, 선거 끝나면 찬밥 취급이다”라고 지적했다.
우리 정치에선 쥐스탱 트뤼도(45) 캐나다 총리 같은 젊고 유능한 지도자를 기대할 순 없을까?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43살,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44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47살에 각각 총리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블레어나 캐머런 모두 20대 초반에 당에 들어가 정치인으로서의 훈련을 거쳤다. 유럽 국가들은 정당 내부에 ‘정치학교’를 운영하거나, 청년당원들에게 다양한 실무 경험의 기회를 주고 있다. 우리의 정치 구조가 바뀌지 않고선 외국처럼 지역 의회와 정당에서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 국가 지도자로 성장하는 모델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관후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은 “미국과 유럽은 사회적 문제를 대변하는 대중정당으로 발전하면서 20대 청년들이 정당에서 10~20년간 경험을 쌓은 뒤 40대 정치지도자로 성장하고 있다”며 “한국의 정당은 민주화·산업화 세력들이 대부분인데다, 명망가와 지역주의에 기댄 탓에 20~30대 청년들과 점점 유리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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