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행복한 세상]
고용신분제 사회의 서막
4년 학비 3천만·주거비 2700만원
생활비 2400만원에 취업자금까지
“지원 없으면 ‘판돈’ 감당 어려워”
‘눈높이를 낮추라’고 말들 하지만
비정규직서 정규직 이동 별따기
첫단추 잘못 꿰면 만회는 불가능
고용신분제 사회의 서막
4년 학비 3천만·주거비 2700만원
생활비 2400만원에 취업자금까지
“지원 없으면 ‘판돈’ 감당 어려워”
‘눈높이를 낮추라’고 말들 하지만
비정규직서 정규직 이동 별따기
첫단추 잘못 꿰면 만회는 불가능
“자기소개서를 쓰려고 보니 할 말이 없었어요. 아르바이트한 경험밖에 없는데 이력서에 빈칸은 왜 이리 많던지… 제가 봐도 다른 사람에 비해 경쟁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영숙(가명·25)씨는 공개 채용을 통한 기업 입사를 거의 포기했다. 그는 지방국립대 출신이다. 학교 간판이 취업에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눈치 빠른 친구들은 일찌감치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아니면 ‘약점’을 넘어서기 위해 부지런히 어학연수를 떠나고, 영어 점수를 만들며 스펙 쌓기에 몰두했다.
영숙씨는 그러지 못했다. 시간도 돈도 없었다. 톨게이트에서 요금 받는 일을 하면서 홀로 가계를 꾸려가는 어머니는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빚으로 겨우 대학 입학금과 자취방 보증금 100만원을 마련해줬다. 영숙씨는 수능시험이 끝나자마자 대형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입학 뒤 한달 동안 쓸 생활비 40만원을 벌어 집을 떠났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학비며 생활비 등을 온전히 혼자 마련해야 했다. 편의점, 패스트푸드 매장, 대형마트에서 학교 근로장학생까지 늘 일에 치여 살았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학교 수업 따라가기도 바빠 다른 취업 준비를 할 수 없었다. 늘 불안했다”고 말했다.
4학년에 접어들어서야 영어공부, 인턴, 봉사활동 같은 스펙 만들기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전공과 관련된 업체들에 지원했고 줄줄이 낙방했다. 기본 스펙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취업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잠깐 생각하다 곧 포기했다. 학원비며 교재비가 만만치 않은데다, 수험 기간 동안 필요한 생활비도 없었다. 결국 또 아르바이트 때문에 시험공부에 전념할 수 없을 게 뻔했다. 남은 선택지는 사실상 없었다. 그는 “이 스펙으로는 어지간한 기업에 취직하기는 어렵다”며 “소규모 업체 위주로 일자리를 알아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청년들의 취업 경쟁이 ‘불공정 게임’이 돼가고 있다. 청년 일자리, 특히 괜찮은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취업을 향한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취업 준비 기간도 길어지고 들어가는 돈도 늘어났다.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없으면 이 ‘최소한의 판돈’(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의 표현)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 게임은 후반부에 더 잔인해진다. 노동시장에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이들에겐 이후 만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는 바늘구멍만큼 좁다. 출신 계층과 일자리가 서로를 규정하는 ‘고용신분제 사회’의 서막이다.
■ 점점 늘어나는 판돈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해 5월 발표한 ‘4년제 대졸자의 취업 사교육 기간 및 비용’ 자료를 보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취업 준비생들은 첫 취업까지 정규 교육 외 취업 사교육에 평균 1.2년의 시간과 평균 510만원의 비용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학 입학 당시 부모의 월평균 소득이 100만~299만원인 취업 준비생들은 취업 사교육에 363만원을 들였지만, 부모 소득이 1000만원이 넘는 취업 준비생들은 취업 사교육에 1092만원을 쏟아부어 투자비용 차이가 3배 정도 났다.
영어학원, 해외연수, 컴퓨터 자격증 같은 스펙은 기본이다. 최근에는 취업컨설팅, 성형수술 등을 위한 비용도 추가되고 있다. 취업 준비생 이아무개(24)씨는 “여력이 되는 친구들은 한번에 5만원씩 하는 자기소개서 첨삭 학원이나, 취업 전략을 알려주는 컨설팅업체에도 다닌다”고 말했다. 100만원이 넘는 면접 대비 강좌도 있다.
기본적인 대학 교육 과정에만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유기홍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대학교육연구소가 지난해 9월 발표한 ‘대학생 삶의 비용에 관한 리포트’를 보면 4년제 대학 인문·사회계열을 다니는 데 드는 등록금은 3092만원이다. 여기에 주거비 2690만원, 생활비 2400만원이 추가된다.
영숙씨처럼 이 모든 비용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사람에게 ‘화려한 스펙’은 애초 불가능하다. 더 나은 기회를 잡기 위해 취업 준비를 계속하며 버티는 것도 어렵다. 기성세대가 흔히 비난하는 “눈높이를 낮추지 않고 백수로 지내는 청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서울 유명 사립대를 졸업하고 금융회사에 취업한 김아무개(32)씨는 대학 시절 부모의 도움으로 공부와 취업 준비에만 전념했다. 등록금과 자취방 전세금, 각종 시험 비용 등을 모두 지원받았다. 대학 2학년을 마친 뒤에는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있는 대학을 1년 동안 다녀왔다.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앞두고는 영어를 배우러 반년 동안 캐나다에서 지냈다. 돌아와서는 영어 점수, 제2외국어와 컴퓨터 자격증 등을 갖췄다. 김씨는 “그렇게 준비를 했지만 여전히 스펙이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지금처럼 자기소개서 첨삭 학원 등이 그때도 있었다면 그것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졸업하자마자 지금 다니는 회사보다 임금·복지 수준 등이 떨어지는 기업에 합격했지만 “더 나은 직장에서 첫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반년 동안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취업 준비 기간을 연장했다. 그는 “만약 다른 직장에 취직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준비했다면 지금 회사에 취업할 가능성은 훨씬 낮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의 경제력이 청년들의 미래 소득에 영향을 주는 모습은 최필선 건국대 교수(국제무역학)가 지난해 발표한 ‘부모의 교육과 소득수준이 세대 간 이동성과 기회 불균형에 미치는 영향’ 논문에서도 나타난다. 최 교수가 2004년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학생 1394명을 10년 동안 추적한 결과, 소득 1분위(하위 10%)에 속한 그룹의 자녀들은 고등학교 졸업 10년 뒤 월평균 162만원을 받았지만 소득 10분위(상위 10%) 집단의 자녀는 193만원으로 19.1% 높았다.
■ 첫단추가 끝단추 한국 노동시장은 ‘대기업 정규직-대기업 비정규직-중소기업 정규직-중소기업 비정규직’ 순서로 내려가는 피라미드가 고착화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고용노동부 자료(2013년 6월 기준)를 보면 대기업 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을 100%로 놓았을 때, 대기업 비정규직은 65.6%, 중소기업 정규직은 53.8%,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36.7%로 내려간다. 외국과 비교할 때 이 격차가 아주 크다는 것도 특징이지만, 한번 들어가면 아래로 떨어지기는 쉬워도 위로 올라가기는 어려운 현상도 두드러진다. ‘대기업 정규직’의 비율이 워낙 작아 경쟁이 치열한데다, ‘중소기업 출신’ ‘비정규직 출신’이라는 낙인효과까지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 고용정보원이 지난해 6월 펴낸 ‘청년 패널로 본 청년고용 현황 및 변화 추이’ 자료를 보면 2009년 중소기업에 취직한 1405명 가운데 1277명(90.9%)은 2013년에도 그대로 중소기업에서 일했다. 10명 중 1명 정도만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셈이다.
이동 통로가 좁다 보니 상황에 떠밀려 저임금·불안정 일자리에 취업한 청년들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비슷한 수준의 일자리만 떠돌게 된다.
여성민우회와 공동으로 20~30대 청년 여성 20명의 노동 이력을 조사한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대학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거나 생계를 위해 급하게 취업한 이들은 일단 취업한 뒤 상향 이동을 위해 다시 학원 등에 다니면서 취업과 교육·훈련을 오가는 상태를 반복하는데, 결국 전문성 축적 등이 어려워 (비슷하거나 더 낮은 노동 여건을 가진 직종으로) ‘횡단적 하향 이동’을 거듭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김영 부산대 교수(사회학)는 “대학 생활과 취업에는 등록금과 사교육 등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고, 가족의 지원 없이 스스로 비용을 충당해야 하는 청년들은 학업과 생계형 취업을 반복하는 경로를 밟게 된다”며 “이런 모든 과정이 계층이 재생산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승헌 기자 abc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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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이 부족한 학생들은 일찌감치 공무원 시험 준비에 나서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운 취업 준비생들에겐 이런 비용도 부담이 크다. 사진은 지난해 12월29일 저녁 서울 노량진 학원가 모습.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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