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행복한 세상]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문 탓에 ‘(이른바) 명문대 졸업=높은 임금을 받는 안정적인 직장 취업’이라는 공식은 이미 옛말이 되고 있다. 대학 서열은 여전히 취업에 상당한 변수지만, 상위권 대학이 과거처럼 보증수표는 되지 못한다. 상위권 대학 졸업생들이 어쩔 수 없이 눈을 ‘낮추면서’, ‘고용 피라미드’에서 상대적으로 아래쪽에 자리잡은 취업준비생들은 더 밀려나는 연쇄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취업 컨설팅 업체인 문장건축소의 이진호 대표는 “요새는 소위 ‘스카이’(SKY,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졸업식에도 ‘생존자’(취업자를 가리키는 은어)들만 온다. 졸업하고도 취업이 안 돼 졸업식장에 오지 않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취업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어느 직장에 취업했는지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제는 기업 이름값을 따지지 않는다”고 전했다.
실제 상위권 대학 재학생들 사이에는 2000년대 중반 정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대기업 정도는 들어갈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해도 들어가기 어려울 수 있다’는 긴장감이 팽배하다. 고려대에 다니는 김아무개(25)씨는 “최근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정규직으로 취업하면 잘 갔다고 평가한다. 하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인지도가 떨어지는 기업이라도 일단 가겠다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서울 중상위권 대학을 졸업한 박아무개(29)씨는 대학 졸업 뒤 3년 동안 은행 창구 직원으로 일했다. 정규직이 아닌 무기계약직이었다. 흔히 말하는 ‘텔러’다. 그는 “집안사정이 어려워 빨리 취업해야 하는데, 대기업 공채에서 번번이 떨어지니 눈높이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 시중은행 인사담당자는 “최근에는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에서도 무기계약직인 은행 창구직에 지원하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수도권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소규모 건설업체에 입사한 박아무개(30)씨는 “중견업체 이상은 가던 서울 4년제 대학 졸업생들이 중소업체까지 눈높이를 낮추면서, 서울 바깥 대학 졸업생들의 설 자리는 더욱 줄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충청도에서 대학을 다니며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이아무개(24)씨는 “지난해 정보통신(IT) 관련 중소기업에 원서를 넣어 봤는데, 서류 전형조차 통과되지 않았다”며 “이제는 전공과 상관없는 직종에도 일단 원서를 내 볼 생각”이라고 털어놨다.
배경에는 좋은 일자리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는 노동시장 변화가 있다. 그 변화는 기성세대보다 처음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에게 더 직접적이고 가혹하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월간 <노동리뷰> 1월호에 실린 ‘최근 비정규직 노동시장의 변화’ 연구를 보면, 지난해 8월 기준 임금근로자로 신규채용된 15~29살 청년층 가운데 64%가 비정규직이었다. 신규채용뿐 아니다. 이 연구원 김복순 전문위원의 지난해 보고서 ‘청년층 노동력과 일자리 변화’를 보면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청년층의 ‘상위 일자리’(임금 수준 1~10분위 가운데 8~10분위)는 23.4%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김 위원은 “사라진 상위 일자리는 금융보험업, 교육서비스업, 제조업 등에 집중돼 있다”며 “반면 같은 기간 하위 일자리인 1분위 일자리는 크게 증가했는데, 주로 도·소매업과 서비스직 중심이었다”고 설명했다.
일부 기성세대는 ‘청년들의 눈높이가 높다’고 쉽게 말하지만, 이미 현실 속에서 한줌의 좋은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청년들은 대다수가 저임금·장시간노동·불안정 일자리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박승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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