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위로하는 고사리 손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소녀상 지키기 2차 토요시위’에서 어린이들이 소녀상에 꽃을 놓고 있다. 이에 앞서 시민 1000여명(경찰 추산 600명)은 서울광장에서 ‘일본군 위안부 한-일 합의 무효선언 국민대회’를 열고 주한일본대사관 앞까지 행진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경찰이 최근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비 소녀상’ 주변에서 노숙 농성 중인 대학생 8명(10일 기준)에게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출석요구서를 보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한·일 협상안 폐기 대학생 대책위원회’(대책위)는 “소녀상 철거를 막겠다”며 지난달 31일부터 이곳에서 노숙 농성과 문화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경찰 “피켓·구호 등장하면 집회”
경찰이 문제 삼은 것은 지난 31일과 2일, 4일에 열린 문화제와 기자회견이었습니다. 경찰은 “실질적인 집회인데 48시간 이전에 관할 경찰서에 집회신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의무(집시법 6조)를 지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대학생들이 ‘미신고 불법집회’를 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대책위 쪽에선 이 행사들이 “신고 의무가 없는 기자회견과 문화제”라고 맞서고 있습니다. 같은 행사의 성격을 주최 쪽과 경찰이 달리 보고 있는 것이죠.
현행 집시법은 ‘집회’에 대한 별도의 정의 없이 ‘시위’에 준해 집회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집시법은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도로, 광장, 공원 등 일반인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는 장소를 행진하거나 위력 또는 기세를 보여, 불특정한 여러 사람의 의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압을 가하는 행위’를 시위로 정의하고 있고요. 다만 문화제 같은 ‘학문, 예술, 체육, 종교, 의식, 친목, 오락, 관혼상제 및 국경 행사에 관한 집회’는 집시법 적용의 예외로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다니는 소녀상 앞(장소)에서 가수와 무용수가 나와 노래와 춤(예술)을 추며 소녀상 이전 반대를 주장(공동의 목적)한다면, 이건 집회일까요, 문화제일까요?
“피켓과 구호가 등장하면 집회로 본다.” 서울지방경찰청의 장경석 수사부장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강신명 경찰청장이 ‘준법 집회’를 강조한 이래 경찰이 줄곧 강조해온 집회와 문화제를 가르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아이돌 걸그룹인 에이핑크 콘서트 현장에서 “영원히 함께해, 영원히 사랑해 에이핑크”라는 구호를 외치는 삼촌 팬들에게도 집시법을 적용해야 하는 걸까요. 장 부장은 “물론 단순히 구호만 외쳤다고 다 집회로 보는 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거죠. ‘종합적인 상황’을 구성하는 요소는 과연 무엇인지 또 궁금해집니다.
콘서트서 소리 지르면 불법집회?
이와 관련해 경찰은 지난 7일 노동당 당원 20여명이 국회 앞에서 진행한 ‘노동개악 중단 국민탄압 중단 기자회견’에 대해서는 미신고 집회란 규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부·여당에 대한 규탄 발언과 구호 제창, 펼침막이 등장했는데도 말이지요. 경찰은 그저 노동당의 기자회견이 “집회라고 볼 수준까지는 아니었다”고만 해명했습니다. “손팻말과 구호 등은 다양한 행사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표현 수단인데, 이를 근거로 집회를 규정한다면 필연적으로 경찰의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박주민 변호사)는 얘기가 썩 틀린 말 같진 않게 들렸습니다.
최근에는 적법한 신고를 거친 집회에 대해서도 사소한 규정을 빌미삼아 압박하는 경우도 눈에 띕니다. 지난 2일 대책위가 개최한 토요시위는 정상적으로 집회 신고를 한 경우입니다. 하지만 경찰은 신고서에 적힌 참가인원(100명)보다 많은 500명이 집회에 참가했다는 것을 문제삼아 경찰 출석을 요구했습니다. 또 노숙 농성에 나선 대학생들이 겨울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침낭을 가지고 온 것을 두고 “신고되지 않은 물품은 반입이 금지돼 있다”며 침낭 사용을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경찰 논리대로라면, 개인적으로 들고 다니는 손난로나 핫팩도 ‘불법 시위용품’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자의적 ‘불법’ 딱지가 논란 불러
물론 많은 전문가들은 주최 쪽이 문화제 또는 기자회견이라고 주장하는 행사의 상당수를 실질적인 ‘집회’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사들이 집회냐, 문화제냐를 따지기보다는 행사 주최 쪽이 왜 집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지난해 경찰은 ‘교통 방해 우려’(집시법 12조), ‘공공질서 위협 우려’(집시법 5조), ‘장소 중복’(8조) 등 온갖 이유를 들어 민주노총 등의 민중총궐기 대회에 대해 집회 금지통고를 했습니다. 주최 쪽은 1차 때는 금지통고된 집회를 강행했고, 2, 3차 때는 법원에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내고 문화제란 형식으로 우회해서 집회를 진행했습니다. 이성용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헌법과 현행법이 보호하는 것은 집회·시위의 자유이지, 문화제의 자유가 아닌데, 참가자들이 자신들의 행사가 집회가 아니라고 우겨야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집회’를 ‘집회’라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 이 상황이 더 문제는 아닐까요.
허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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