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행복한 세상]
25살 지혜씨의 절망 키워드
25살 지혜씨의 절망 키워드
부모세대 같은 삶 기대했지만
입학과 함께 찾아온 건 우울증 대학생·취업준비생·직장인
73%는 “삶의 무게가 무겁다” 청년세대의 ‘희망 컨베이어 벨트’가 끊어지고 있다. 남은 인생이 훨씬 더 많은 청년들에게 이전 세대들이 당연시했던 ‘소박한 삶의 궤적’은 이제 위태롭게 이어지거나 어느 순간 끊어지는 컨베이어 벨트에 놓였다. <한겨레>는 ‘대학내일 20대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지난달 20대 대학생과 취업준비생, 직장인 등 청년 215명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 통화, 온라인 등을 통해 심층 인터뷰했다. <한겨레>가 만난 청년 72.5%는 “삶의 무게가 무겁다”고 말했다. 중심에는 ‘취업’이 있다. ‘청년’ 하면 떠오르는 단어로 청년들은 ‘취업, 취업 준비, 취업난’(49.8%)이나 ‘실업’(10.8%)을 꼽았다. 이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업이 청춘을 옥죄면서 ‘연애’(4.0%)나 ‘자유’(4.4%) 같은 말은 뒷전으로 밀렸다. 부모의 경제력 같은 애초 선택할 수 없는 조건들도 그 어느 시절보다 깊게 청년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청년들은 ‘가정형편 및 가족 부양’(19.9%) 문제나 ‘경제적 어려움’(11.8%) 등 타고난 조건에 힘겨워했다. 그래도 단단한 벽 너머의 ‘희망의 사다리’를 찾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맞섰다. 그래서 나이에 비해 빨리 지쳤고 고단했다. 우리는 이들이 삶의 단계마다 맞부딪치는 절망감을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걸까. 무기력
희망은 우울증으로 “난 바닥”
청년의 감정 ‘무기력’ ‘무감각’ “대학 졸업하고 취직해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이 지경까지 오니 캐릭터를 삭제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20대 초반을 일하고 공부하며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 한계가 오더라고요.” 지혜씨의 삶은 서울 중상위권 4년제 대학 졸업장을 받은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지난 2월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받았다. 대표로 답사도 했다. 커피 전문점은 그만뒀지만 다시 잡은 일자리도 계약직이었다. 그 뒤 다시 취업에 도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병원을 다녔다. 그나마도 한번에 4만~5만원씩 드는 돈이 부담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계약직으로 일하며 모아둔 돈도 떨어졌다. 신용불량자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취업이 안 되니 방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무기력이 무겁게 쌓여 “바닥 깊숙이 박힌 기분”이었다. 희망과 열정의 무게가 고스란히 무기력의 크기로 돌아왔다.
눈앞에 놓인 계단을 차곡차곡 올라가면 번듯한 직장과 따뜻한 가정, 안정된 생활이 올 줄 알았다. 그 소박한 삶의 문턱이 그리 높을 줄은 예전에는 몰랐다. 지난 12월29일 지혜씨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바라본 동네풍경이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알바만 두탕, 바꾸고 싶은건…
중하층 “경제력” 상층 “외모” “늦여름 오후였어요. 학교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예요. 도서관 책에 청구기호를 붙이기 위해 필름지를 자르다가 손을 베었어요. 피곤해 졸았거든요. 한푼이 아쉬워 닥치는 대로 일할 때인데 ‘뭔가 잘못됐다’, ‘주객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혜씨는 2010년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편의점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다. 근로 장학생으로 선발돼 평일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일했다. 시험 기간에는 친구들이 공부를 하느라 빠지면 대신 일을 해주고 돈을 더 벌었다. 저녁에는 카페 야간 청소를 하면서 자정 가까이에 퇴근했다. “부모님이 등록금 440만원을 내주고, 40만원짜리 월세방과 용돈 30만원을 지원해 줬어요. 중산층이 여력을 짜내 지원할 수 있는 최대치라 생각해요. 고맙고, 또 죄송스러웠어요.” 그래도 늘 형편은 빠듯했다. 입학 뒤 1만원짜리 복사카드를 사고 책 두권을 제본하니 용돈이 10% 넘게 사라졌다. 휴대전화 요금부터 교통비 등 들어갈 데가 많았다. 샴푸 값 아껴보려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학교 화장실 휴지를 훔쳐 오기도 했다. 일에 치이다 보니 살이 훅훅 빠져나갔다. 좋았다. 예뻐진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살이 빠지니 싼값에 고를 수 있는 옷의 범위가 넓어져서다.
지혜씨의 원룸 방문 앞에는 ‘나가라! 일터로! 나에겐 빚이 있다’라고 그가 직접 써놓은 글귀가 붙어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가정 꾸리는 삶 엄두도 못내
“부모만큼은 못 살것 같아요” “부모님이 지원해준 학비며 생활비를 생각하면 저는 들인 비용 대비 효용이 떨어지는 사람이에요.” 지혜씨는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집을 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졸업 뒤 커피전문점을 관두고 다시 계약직 일자리를 찾아 인턴으로 일하면서 한달에 127만원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최고의 연봉을 찍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반년 뒤에는 계약이 끝난다. “엄마는 지금 제 나이에 저를 낳았는데, 저는 결혼은 잘 모르겠고, 그냥 지금처럼 생활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만 살 수 있어도 다행이라 생각해요.” 청년들은 지혜씨처럼 부모 세대만큼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상층인 청년 66.7%는 부모만큼의 경제적 지위를 누릴 가능성이 높은 편이라고 낙관했지만 중간층과 중하층, 빈곤층 청년들은 그만큼의 경제적 지위를 누릴 가능성도 낮다고(각각 55.2%, 60.0%, 52.9%)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부모 세대는 열심히 하면 그만큼 결과가 나왔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이전과는 경쟁의 구도, 경제 수준 등 환경이 모두 달라졌다’며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꿈의 끈
공부 하고싶은 욕심 많지만…
“기쁨” “열정” 생각은 하지만… “욕심은 많아요. 공부도 하고 싶고. 그래서 언젠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지혜씨는 지금 당장은 올해를 잘 살아 낼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고 했다. 계약직으로 하루 종일 일하면서 따로 취업 준비에만 몰두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생활비를 벌려면 일을 그만둘 수도 없다. 그래도 나중에 시각장애인에게 미술품을 전시하는 것처럼 문화와 기술을 융합해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물론 전제는 붙는다. ‘언젠가는’이다. 무기력과 좌절 속에서도 청년들은 ‘기쁨’(9.5%)과 ‘활력’(6.3%) 등 긍정적 감정을 아주 잃은 것은 아니다. 많지는 않지만 여전히 ‘열정’이나 ‘도전’ 등 긍정적인 단어를 ‘청년’과 연결해 떠올렸다. 신윤정 청년허브 기획실장은 “청년들은 돈이 없으면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대외활동, 인턴, 스펙 경쟁 등에 나서고 있다”며 “겉으로 보이는 피곤하고 무기력한 모습은 오히려 그 원천에 끊임없이 미래를 위해 달리는 희망과 활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승헌 황보연 최우리 기자 abc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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