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우병우, 문무일. ‘성완종 리스트’ 수사로 얽혀있는 세 사람이다. 모두 검사 출신이거나 현직 검사지만 처지가 확연히 다르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사시 24회)는 20년 넘게 쌓아올린 영광이 잿더미로 변할 위기에 놓여있다. 목숨을 건 방어에 나설 수밖에 없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사시 29회)은 제 발등을 찍은 ‘기획 사정’의 기안자로 지목받고 있다. 그래도 더이상 정권이 흔들리지 않도록 수사를 ‘조율’해야 하는 고역스러운 위치다. 문무일 검사장(사시 28회)은 망자의 유언을 집행해야 하는 운명을 떠안았다. 검찰을 살리기 위해 칼날은 멈칫거릴 수 없다.
세 남자에게는 모두 ‘과거’가 있다. 성완종 사건에서 이들이 맡은 배역은 묘하게도 과거의 역할과 겹친다. 그 ‘기시감’이 이들의 발목을 잡거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지만, 과거를 극복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다 알다시피 우병우(48) 민정수석은 2009년 봄 대검 중수부 중수1과장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신문했다. 그리고 노무현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박연차 게이트’를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6년 전의 박연차 게이트는 여러모로 성완종 사건과 많이 닮았다.
박연차와 성완종 둘 다 초등학교 학력밖에 없는데도 자수성가한 기업인이다. 여야를 가리지 않는 마당발이기도 하다. 두 사건 모두 ‘일정표’가 검찰 수사의 중요한 실마리다. 박연차 회장의 일정표는 비서실 여직원 이아무개씨가 3~4년 동안 거의 날마다 기록한 것으로, 박 회장의 전화 통화, 약속, 면담 내용 등 구체적인 행적은 물론 정·관계 인사에게 건넨 것으로 추정되는 돈의 액수까지 자세히 적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성완종 회장의 일정표에도 이완구 총리, 이병기 비서실장 등 성완종 리스트에 올라있는 인물들과 만난 기록이 담겨있어 앞으로 검찰 수사에서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다.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이나 성완종 회장의 경남기업이 검찰의 집중 포화를 받기에는 규모가 작다는 점도 비슷하다. 태광실업은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의 신발 주문생산(OEM) 업체로 재계 순위 600위권에 불과했다. 경남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원외교와 관련해 성공불융자를 받은 기업이 모두 46개인데, 경남기업은 금액 기준으로 46위인 것으로 알려졌다. 꼴찌다. 그러니 둘 다 “왜 하필이면 나냐?”고 억울해 했지만 그 대답은 “전직 대통령을 잡아 넣기 위해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직전 정부의 대통령을 상대로 한 ‘승부수’
박연차·성완종 모두 ‘가족 별건 수사’로 압박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왼쪽)과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
결정적으로는 수사 기법이 닮은 꼴이다. 특히 ‘별건 수사’가 그렇다. 성완종 회장은 북한산에 오르기 전 새벽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검찰이) 자원 쪽을 뒤지다 없으면 그만둬야지, 제 마누라와 아들, 오만 것까지 다 뒤져서 가지치기 해봐도 또 없으니까 또 1조원 분식 얘기를 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6년 전 검찰이 박연차 회장의 입을 열게 한 가장 주요한 수단도 그의 세 딸과 외아들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박 회장이 아들 명의로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해외 법인을 통해 편법증여하려 한 정황을 포착해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으며 회사 경영권을 맡고 있던 첫째 딸을 소환해 조사하는 등으로 압박의 강도를 높여갔다. 결국 박연차 회장이 ‘잘못하면 자식이 다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무너졌다는 것이다.
6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담당 검사가 다른 데도 왜 이리 비슷할까? 직전 정부의 대통령을 상대로 한 ‘승부수’이기 때문에 비슷한 속성을 띌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우병우 민정수석의 영향력과 과거의 경험 등 개인적 특성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검 중수부가 폐지됐으니 대형 특별수사는 서울중앙지검 3차장과 그가 지휘하는 특수부가 맡는 구조다. 이 팀을 구성하는 인사에 우병우 민정수석의 입김이 적잖이 미쳤다. 최윤수 3차장(48·22기)은 우 수석과 서울법대 84학번 동기다. 우병우 수석이 사법연수원 3기수 위지만 둘은 사석에서 말을 트고 지낼 만큼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임관혁 특수1부장(49·26기)은 2005년 우 수석과 법무부 법조인력정책과에서 함께 근무한 경력이 있는데 우병우 수석이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고 한다. 임관혁 부장은 직전에 특수2부장을 지냈다. 서울중앙지검에서 부장검사로 재직하면 다음 인사 때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것이 김진태 검찰총장의 ‘하방인사’ 원칙이지만 임 부장검사는 예외가 됐다. 그리고 이런 예외는 우병우 민정수석의 ‘요청’ 때문에 발생했다는 게 한 검찰 고위층의 설명이다. 성완종의 비극은 바로 그 최윤수-임관혁 수사선 상에서 발생했다.
<한겨레> 사회부의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이순혁 기자가 쓴 책 <검사님의 속사정>을 보면 2009년 우병우 중수1과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신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충격적인 것은 당시 대검 간부들과 수사팀 검사들이 CCTV를 통해 조사 광경을 라이브로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 전 대통령의 답변이 있을 때마다 담당분야 수사검사들이 우병우 과장에게 메신저를 통해 ‘그러면 ~을 물어봐라’는 등의 이야기를 건넸다고 한다.
6년 전 우병우 중수1과장이 대검 간부들의 ‘아바타’였다면 이번에는 그가 최윤수-임관혁을 아바타로 사용한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CCTV를 통해 조사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지는 않았겠지만, 수시로 보고를 받으며 수사 방향을 지시했을 가능성 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두 사건이 어찌 이리도 비슷하게 반복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병우 민정수석은 과거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희생양으로 삼았듯이 이번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이명박 전 대통령을 타깃으로 삼은 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쯤되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하인’인지도 분간하기 힘들어진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된다. 첫번째는 비극으로, 두번째는 희극으로”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프랑스 혁명기 삼촌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비극적인 몰락을 의미한다면 조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는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자아냈다는 의미이다. 이 말의 본뜻을 조금 비틀어서 우리 상황에 대입해보면 “우병우의 기획 수사는 반복된다. 첫번째는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으로, 두번째는 이명박 대통령의 희극으로”쯤 될 것이다. 성완종의 죽음이 일어난 지 며칠 만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측근들을 거느리고 유유자적 4대강을 구경하는 모습을 보니 드는 생각이다. 특히 이 전 대통령은 천연덕스럽게도 방명록에 “21C 인류에 가장 주요한 것이 물입니다”라고 썼다고 하니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다.
성찰과 반성이 없는 경험은 비극적 상황을 받아들이는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같은 역사를 반복해서 만들 뿐이다. 우병우 민정수석은 과연 6년 전의 경험에서 무슨 교훈을 얻은 것일까. 혹시 그 비극적 상황을 ‘성취’로 받아들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혼란스럽다. 그가 선사한 희극을 보면서 고마워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도 헷갈릴 뿐이다.
김의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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