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전남 순천 별량중 3학년 1반 학생들이 새학기 학급 운영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광복 1945, 희망 2045] 다시 교육부터
교육갈등 접점 찾기 ③
순천 별량중의 ‘배움 공동체’ 수업
교육갈등 접점 찾기 ③
순천 별량중의 ‘배움 공동체’ 수업
1% 찾고 99% 살리는 교실…서로 묻고 가르치는 아이들 소하는 “초등학교 때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중학교는 달랐다. 공부에 관심이 없어도 수업에는 참여해야 했다. 교사들은 “너의 배움은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초등학교 때는 모른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공부 잘하는 짝꿍이 가르쳐줄 때도 있었다. 별량중에선 4~5명씩 모둠을 이뤄 수업을 해도 “이게 왜 이렇게 되는 거냐”고 묻지 않으면 먼저 가르쳐주지 않았다. 홍천 교사(과학)는 “배공 수업에서는 질문했을 때 가르쳐주는 게 원칙이다. 질문하지 않았는데 가르쳐주면 잘하는 아이는 자기가 희생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못하는 아이는 주눅이 들어 권력관계가 생긴다”고 했다.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모르는데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잘못이다’라는 인식을 교사와 학생들이 공유하는 교실에서 모르는 게 많았던 소하는 가장 많이 질문했고, 가장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선행학습을 하거나 일부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유리한 강의식 수업에서라면 99% 속에 묻혀 있었을 소하를 발견한 것은 ‘학생 한 명 한 명의 배울 권리를 실현한다’,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학으로 삼는 배공 수업이다. 성적 위주 벗어나 ‘토론식 수업’
모든 학생에 질문·대답 기회 줘
“다른 친구들 의견 듣다보면
미처 생각 못했던 것도 알게 돼”
잠재능력 자극 ‘숨은 인재’ 발견도 여느 학교에서 기초학력 미달 학생들은 수업에서 배제되고,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을 따로 모은 ‘부진아반’에서 교사의 지도를 받는다. 별량중에서 이런 학생들은 수업에 참여하고, 교사가 아닌 친구들한테 더 많이 배운다. 교사들이 “지금의 소하를 만든 게 정운이”라고 할 정도로 소하가 학습부진을 벗어나는 데는 별량중에 수석으로 입학한 정운이의 역할이 컸다. 정운이는 “소하랑은 1학년 때부터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면서 친해졌다. 소하는 도전의식이 있는 아이”라고 했다. 배공 수업을 창안한 일본의 사토 마나부 교수는 “1만개가 넘는 교실을 관찰했지만 교사의 지도력으로 학력 저하를 극복한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서로 배워가는 속에서 학력 저하를 극복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배움의 공동체>, 손우정)”고 했다. “최적의 교육 내용과 방법을 제공해 학습동기를 유발함으로써 학습자의 잠재능력과 자질을 최대로 신장함을 의미한다”는 미국수월성교육위원회의 정의를 보면 별량중의 수업은 소하를 위한 ‘진짜 수월성 교육’이다. 하지만 김영훈 교장을 비롯한 별량중 교사들, 그리고 배공 수업을 하는 다른 학교의 교사들은 한결같이 배공을 성적 위주의 수월성 교육의 프레임으로 보는 것을 경계했다. 이형민 교사(영어)는 “성적이라는 것으로 아이의 미래나 현재를 판단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아이들과 함께 배우려고 했을 뿐 성적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이런 수업을 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우등생과 열등생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질문과 대답이 열려 있는 별량중에서는 소하와 같은 뜻밖의 인재를 발견하는 일이 쉽다. 올해 처음 별량중에 부임해 배공 수업을 시작한 정규채 교사(과학)는 “수업한 지 2주일 정도밖에 안 됐는데, 벌써 과학 쪽으로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몇몇 보인다”고 했다. 이날 ‘전하량 보존 법칙’을 수업하던 중에 우석이는 “전하량은 보존되는데 왜 건전지는 닳는 거냐”는 질문을 했다. 우석이는 “과학과 수학이 좋다”고 했다. ■ 99%를 살리는 수업 소하를 가르쳐주느라 전교 1등 정운이는 손해를 본 것이 아닐까? 정운이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질문하는 소하한테 배운 게 많다”고 했다. 지난해 별량중을 졸업하고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예준이도 “그렇지 않다”고 했다. “모둠활동을 할 때 잘하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 의견을 따라갈 수 있는데 선생님이 그걸 지양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도 다른 애들 의견을 듣게 되고, 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생각하게 됐어요. 엉뚱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애들한테 듣게 되니까요.” 3년 내내 배움의 공동체 수업을 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예준이는 지난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실시한 모의고사에서 상위 0.01%에 들었다. 친구들과 배움을 공유한 3년이 예준이의 잠재력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예준이는 “처음에 남들처럼 문제풀이만 하려고 할 때는 수학 성적이 안 나왔다. 중학교 때처럼 생각하면서 풀려고 한 뒤부터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고 했다. 99%의 아이들까지 포용하지만 수업의 수준은 높다. 교사들은 종종 ‘도전과제’, ‘점프과제’라는 이름으로 상위권 학생들도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를 제시한다. 배공 수업을 하는 강원 광정초 손유미 교사는 “어려운 문제를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해결하다 보면 학력에 상관없이 모든 아이들이 배운다. 기존의 수준별 수업은 하반에서 중·상반으로 실력이 좋아지는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다 같이 수준 높은 수업을 하니 전체적으로 수준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1%는 1%끼리 배워야 좋다는 기존의 수월성 교육과 달리 배공에서는 1%도 99%와 협력하면서 학습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 우리보다 훨씬 먼저 수준별 수업을 도입한 미국에서는 이미 1980년대에 많은 연구자들이 수준별 수업을 받은 상·중·하 동질 집단이 이질 집단보다 학력이 향상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수의 아이들만 인정받는 경쟁 중심의 수월성 교육과 달리 우열을 가리지 않고 협력하는 교실에서는 모든 학생이 탁월하다고 인정받는다. 별량중 아이들이 같은 반 친구의 장점을 적은 접착 메모지에는 ‘공부를 모르는 것에 대해 잘 도와준다’,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알기 쉽게 세세하게 설명해준다’, ‘세밀한 부분을 정확히 파악한다’ 등 학습과 관련한 칭찬을 받는 아이들이 20여명 가운데 절반 정도는 됐다. 손우정 배움의공동체연구회 대표는 “가르치는 활동, 배우는 활동은 모두 탁월해지는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배공이 추구하는 ‘탁월성’은 타인과 비교해서 우수하다는 ‘수월성’과는 다르다. 경쟁을 통해서 우열을 가리는 게 아니라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스스로 최고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때 학교가, 배움이 아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수월성 교육
“평준화 속에서도 수월성의 추구를 위한 시책이 강화되어야 하며”(동아일보 1977년 1월14일치), “평준화의 이상을 수월성의 추구 … 등과 관련하여 … 고교 평준화 정책에 대한 종합평가를 실시해야 한다.”(매일경제 1981년 6월29일치) 옛 기사를 통해 보면 한국 사회에서 수월성 교육은 평준화를 보완하는 개념으로 등장했다. 입학시험을 치러 성적 우수자들을 선발한 과거 비평준화 시절 명문고를 수월성 교육의 모델로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수월성 교육 정책은 대개 외국어고, 과학고, 자율형 사립고 등 성적 우수 학생을 선발하는 학교를 만들거나 일반학교에서도 성적에 따라 상·중·하로 학생들을 구분해 따로 교육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탁월성 교육
수월성과 탁월성 모두 영어(excellence)로는 같은 말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둘을 이해하는 사회적인 맥락은 다르다. 수월성 교육이 다른 사람과 경쟁해 누구보다 잘한다는 상대적 개념으로 쓰인다면, 탁월성 교육은 자기 자신과 경쟁해 자기 안에 잠재된 재능을 최대한 계발하는 절대적인 개념이다. ‘배움의 공동체’ 수업이나 ‘4·16 교육체제’는 소수의 성적 우수자를 위한 특권 교육이라는 인식이 있는 수월성 교육 대신 ‘탁월성’이라는 개념을 쓴다.
영재교육
영재교육진흥법(제2조)은 영재를 ‘재능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타고난 잠재력을 계발하기 위하여 특별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자’로 정의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영재를 ‘천재’로 엄격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교육받지 않아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천재’와 달리 영재는 잠재력을 발현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영재는 성적 우수자도 아니다. 따라서 영재교육과 수월성 교육은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 2004년 교육인적자원부가 발표한 ‘수월성 교육 종합대책’은 영재교육기관과 영재교육 대상자를 늘리는 사실상의 ‘영재교육 종합대책’이었으면서도 ‘수월성 교육’이란 말을 썼다. 영재교육과 수월성 교육을 혼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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