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해산 심리 위해 ‘RO 수사 자료’ 법원·검찰에 요청
재판서 채택 안된 증거들도 해산 심판 근거로 활용 우려
‘재판중인 사건의 기록은 요구할 수 없다’는 법 위반 논란
재판서 채택 안된 증거들도 해산 심판 근거로 활용 우려
‘재판중인 사건의 기록은 요구할 수 없다’는 법 위반 논란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청구 사건을 심리하고 있는 헌법재판소가 재판 중인 이석기 의원 등의 ‘아르오’(RO·혁명조직) 활동에 관한 수사·재판기록 복사본을 보내달라고 법원과 검찰에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재판 중인 사건의 기록은 송부를 요구할 수 없다’는 헌법재판소법 조항에도 불구하고, 헌재가 아르오 수사기록을 정당해산심판의 판단 근거로 삼으려 해 위법성 논란이 일고 있다.
헌재 관계자는 5일 “지난해 12월 첫번째 변론준비절차 기일 직후 법무부가 아르오 사건 수사기록 등에 관한 문서송부 촉탁신청을 했다. 이에 따라 법원과 검찰에 관련 기록 사본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헌재법 32조는 ‘재판부는 결정으로 다른 국가기관 또는 공공단체의 기관에 심판에 필요한 사실을 조회하거나, 기록의 송부나 자료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다만, 재판·소추 또는 범죄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의 기록에 대하여는 송부를 요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재의 요구는 이런 법조항과 정면 충돌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헌재 관계자는 “헌재가 적극적으로 (기록을 보내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당사자의 신청에 따라 헌재가 요청을 할 수는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법원과 검찰이 이에 따를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헌재는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사건 때도 재판 중인 사건의 기록 복사본을 보내라고 법원에 요구한 적이 있다. 당시 헌재는 ‘32조는 수사·재판을 방해하지 말라는 취지이므로 원본이 아닌 복사본을 요구하는 건 괜찮다’고 조문을 해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합진보당 변호인단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재화 변호사는 “헌재가 재판 중인 사건의 기록을 보내라고 요구하면 해당 사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헌재법 32조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고려해 확정 판결이 나지 않은 기록을 근거로 헌법재판을 하지 말라는 뜻도 담고 있다. 조만간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는 준비서면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헌재의 ‘요구’가 중요한 이유는 법원·검찰이 관련 기록을 헌재로 보내면 곧 증거로 채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헌재는 이번 사건에 민사소송법 절차를 적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민사재판에서 공문서는 ‘위조됐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 증거로 채택된다. 불법성 여부를 엄격히 따져 증거채택 여부를 가리는 형사재판과 다르다. 예를 들어, 아르오 사건 재판을 진행 중인 수원지법은 국정원이 제출한 녹음파일 47개와 녹취록 44개 가운데 녹음파일 15개와 녹취록 15개는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 등의 이유를 들어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헌재는 법원이 배제한 녹음파일·녹취록 15개도 증거로 삼을 수 있다. 형사재판에서 채택되지 않은 증거가 헌재의 정당해산심판 사건에서는 증거로 쓰이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헌재가 2004년 한국공법학회에 연구용역을 줘 발간한 ‘정당해산심판제도에 관한 연구’ 보고서는 “정당해산심판절차는 민사소송보다 형사소송과 유사하다”고 밝히고 있다. 연구에 참여했던 정태호 경희대 교수는 “민사소송법을 준용하면 입증 요구가 훨씬 낮아져 진보당이 불리하다. 헌법재판 성질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민사소송법을 적용하고 그 외 영역은 형사소송법을 적용해야 한다. 기계적으로 민사소송법을 따라간다면 법 해석을 잘못하는 것이다. 헌재가 양심을 걸고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on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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