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보도와 관련해 아이의 어머니라고 스스로 밝힌 여성이 9월10일 “제 아이는 채동욱 검찰총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한겨레>와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사에 보내왔다. 이 여성은 편지에서 자신의 실명을 밝혔으며, 편지 말미에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지장을 찍었다.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미국 워싱턴DC 형법에서부터,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지 찾아내기조차 힘든 내란음모와 여적죄까지. 최근엔 치정극의 막장에서나 만난다는 혼외자 문제에까지 손을 뻗은 ‘정통’ 법조기자, <한겨레> 사회부 김원철입니다. 요즘 ‘핫(hot) 플레이스’로 떠오른 대검찰청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드디어 ‘친절한 기자’에 입성하게 됐네요. 반갑습니다.
제 취미는 ‘드라마 종영 후 몰아보기’입니다. 최근 애청 드라마는 <무정도시>인데 주인공 이름이 ‘박사 아들’입니다. 본명이 있지만 모두 그를 ‘박사 아들’, 혹은 줄여서 ‘박사’라고 불러요. 아버지 없이 성장했는데 그가 영민하다 보니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가 박사임에 틀림없다’며 붙여준 별칭입니다. 자, ‘박사 아들’은 정말 ‘박사’의 아들일까요. 드라마에선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 질문이 요즘 한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총장 아들’은 과연 ‘총장’의 아들일까요?
지난 10일 오전 11시, <한겨레> 사회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임은수씨 손엔 자필로 주소를 흘려 쓴 익일특급 등기우편이 들려 있었습니다. 특별하다 생각 못한 은수씨는 이 편지를 바쁜 부장에게 건네기보다 먼저 읽어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2013.9.6일 조선일보에서….’ 편지 첫 문장을 읽은 은수씨는 곧장 사회부장에게 갔습니다.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아요.” 평소보다 ‘힘주어’ 말했습니다. 덕분에 오전 11시30분부터 <한겨레> 편집국에선 난상토론이 시작됐습니다. 편지가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됐다는 점,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 등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주민번호를 적고 지장을 찍은 점, 본인이 아니라면 알기 힘든 내용들이 많은 점 등으로 미뤄볼 때 가짜 편지는 아닐 거라 판단했습니다. <한겨레>는 고민 끝에 오후 2시30분, 편지를 보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편지 공개 뒤 의혹이 더 불거진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조선일보에 보내면서 왜 한겨레에도 보냈느냐’ ‘조선일보에 보낸 편지는 광화문에서, 한겨레에 보낸 편지는 마포에서 부쳤는데, 왜 다른 곳에서 나눠 보냈느냐’ ‘법률가의 도움을 받은 것 같다’ 등…. 정반대 주장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조선일보에만 보내면 내용을 왜곡할까봐’ ‘신문사 근처에서 부치면 더 빨리 도착할 줄 알고’ ‘곤란한 일이 닥쳤으니 법률가 도움을 받는 건 당연한 일’ 등…. 총장을 좋아하는 이들은 편지 내용이 진실이길 ‘믿고’, 총장을 싫어하는 이들은 거짓이길 ‘소망’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주장의 거짓 여부를 입증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핵심 당사자로 강하게 추정되는 이의 주장을 보도하는 건 불가피해 보입니다.
편지의 내용 중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현재로선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편지가 보여준 명백한 팩트가 있습니다. <조선일보>가 당사자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편지를 본 뒤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보도 전 접촉했던 여성이 당사자였는지 그제야 알게 됐다고 시인했습니다. ‘혼외 아들이 있다고 밝혀졌다’고 단언하려면 유전자 검사 결과, 또는 양 당사자 모두의 고백이 있었어야 합니다.
편지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드러내고 있습니다. ‘총장 아들’은 ‘총장’의 아들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애당초 ‘혼외자를 둔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하던 이 신문조차 ‘유전자 검사를 통해 진위가 밝혀져야 한다’고 두어발짝 물러섰기 때문입니다. 정정보도를 하지 않고 있을 뿐 오보를 인정한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13일 채동욱(54) 검찰총장은 결백을 주장하며 결국 물러났습니다. ‘총장’에 이어 이번에는 ‘총장 아들’ 차례입니다. 이제 우리는 11살 난 ‘총장 아들’의 머리카락에서 디엔에이(DNA)를 뽑아내야 합니다. 얽힐 대로 얽혀버린 실타래는 아이에게 이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뽑아 온 세상에 대고 흔들어댄 뒤 ‘정의가 실현됐다’ 말하려는 걸까요. ‘현재 제 바람은 어려움 속에 혼자서 키운 제 아이가 충격받거나 피해당하지 않고 남들처럼 잘 커가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편지의 모든 문장이 거짓이라 해도, 마지막에 담긴 이 문장만큼은 진실일 겁니다.
p.s: <조선일보>가 ‘아이의 아버지 직업이 과학자라고 한때 기록돼 있었다’고 보도하는 바람에 난데없는 기자들의 전화 공세에 시달렸을 ‘과학자 채동욱’님들에게. 특히 “미치겠어요. 저는 경상도 사람이라 서울에 가지도 않아요”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던 ㄱ대학교 채동욱 교수님, “저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인데 기자들이…”라며 억울해하셨던 또다른 ㄱ대학교 채동욱 교수님께, 모든 언론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꾸벅.
김원철 사회부 법조팀 기자 wonchul@hani.co.kr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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