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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다국적기업의 영업맨 ‘제2 고 과장’

등록 2013-06-23 13:31수정 2013-06-23 17:42

다국적기업의 영업맨들은 본사의 눈에는 투명인간이다. 투명인간 영업맨들은 글로벌 메커니즘 속에서 ‘밀어내기’ 전쟁을 벌인다. 누가 죽고 누가 죽이는지 알 수 없는, 말 그대로 스마트 전쟁이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다국적기업의 영업맨들은 본사의 눈에는 투명인간이다. 투명인간 영업맨들은 글로벌 메커니즘 속에서 ‘밀어내기’ 전쟁을 벌인다. 누가 죽고 누가 죽이는지 알 수 없는, 말 그대로 스마트 전쟁이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불멸, ‘운칠복삼’ 정신으로 오늘도 버틴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은 이 바닥에서 물색없는 소리다. 여기서는 운칠복삼(運七福三)이다. 뭐, 복칠운삼이라고 뒤집어도 뜻의 차이는 전혀 없다. 다들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딱 하나다. 누구나 직접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으니까. 안 그러고는 우리가 탄 이 아찔한 롤러코스터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노력과 성실? 그거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나는 영업맨이다. 옹근 7년이다. 그러나 늦깎이다. 30대 중반에 엔지니어링 부문에서 이쪽으로 갈아 탔다. ‘기업의 꽃은 영업’이라는 말에 혹하기에는 철든 나이였다. 말이 좋아 엔지니어링이지 영업 지원이었다. 마케팅에 필요한 기술 자료를 영업 쪽 요청을 받아 제공하는 일이었다. 선배들은 마흔이면 못 버티고 나갔다. 제 발로 나가기도 했지만, 예외 없이 돌아서서 욕을 했다. 내 앞의 시간도 사위어가는 촛불이었다.

이곳에선 기술 개발을 하지 않는다. 엔지니어링 고유 분야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걸 어디에서 하는지도 모른다. 본사만 정확히 안다. 아, 본사는 미국에 있다. 한국 법인은 형식상으로는 본사와 직접 관련도 없다. 세계 영업을 총괄하는 유럽 어느 나라 법인과 한국 고객을 연결해주는 에이전트일 뿐이다. 한국 법인은 장부상 비용을 쓰기만 할 뿐 매출도 없다. 당연히 세금도 안 낸다. 이쪽 분야 다국적기업 대부분이 그렇다.

얼마 전 드라마 <직장의 신>(KBS2 TV)에서 고정도 과장이 한때 ‘영업왕’으로 불리던 자기 과거를 쓸쓸히 추억하는 장면을 보았다. 영업왕이 어떻게 투명인간 취급받는 만년 과장으로 전락할 수 있느냐고? 벌써 잊었나, 운칠복삼! 특이한 건 그의 몰락이 아니라, 그러고도 그가 안 나가고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한둘 있기는 하다. 집에서만큼은 투명인간이 되기 싫어서 직장에서 이 악물고 버티는 투명인간.

고 과장이 어떻게 영업왕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도 시작은 찬란했다. 첫해, 전임자가 실적을 못 내고 손 털고 나간 분야를 맡았다. 그러고도 목표의 220%를 달성했다. 입소문 타고 스카우트된 난다 긴다 하는 영업맨들도 처음 몇 해는 헤매기 마련인데, 어제까지 기술 서적만 들여다보던 내가 낸 실적이었다. 비법이 궁금하면 들려줄 수 있다. 다만, 실망하지 말길. 꿈에도 예상치 못한 초대형 발주 두 건이 터진 것이다. 굴러 들어와도 실적은 실적이다. 뻔뻔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회사도 당연하게 여긴다. 통 큰 회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회사는 두둑하게 수당도 챙겨준다. 목표 초과분에 대해서는 3배까지 가중치를 부여해 지급한다. 물론 공짜는 없다. 회사는 이듬해 할당 목표를 크게 올린다. 그해 10억 원을 하면 17억5천만 원을 던진다. 역시 통이 크다 할 수 있다. 목표를 낮추는 협상도 하지만, 통이 확 줄어 기껏 2~3%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올해 그 분야에서 주문이 쏟아졌다고 해서 내년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 그 반대다. 우리 제품이 하루이틀 쓰고 버리는 소비재도 아니니, 이듬해 수요는 오히려 줄어드는 게 맞다. 영업맨 2년차, 나는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만났다. 주문이 줄줄이 취소됐다. 이 회사는 주 단위로 영업 실적을 점검하고, 다음 주 목표를 보고한다. 잇따라 목표에 미달했다. 매주, 아니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몇 차례 영어로 적힌 이메일이 날아왔다. 본사였다. 번역해보니 내가 ‘회사의 미래에 심각한 치명타를 가하고 있다’는 경고였다. 달걀로 바위 치기 신공도 아니고, 전세계에서 돈을 벌어들이는 본사에 내가 무슨 수로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단 말인가. 본사는 좀더 기회를 줄 테니 매주 본사로 실적을 보고하라고 했다. 황공하게도 멘토까지 붙여주었다. 문제는 멘토가 하필 입사 동기라는 사실이었다. 굴욕감을 삼켜야 했다.

그해 말 한국 법인 직원 20% 가까이가 잘렸다. 절반은 미국 본사에서 직접 명단이 내려왔다. 자르는 쪽과 잘리는 쪽은 얼굴 볼 일이 없었다. 서로에게 투명한 존재였다. 애초 고용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라고 했다. 평소에는 하위 5%에 해당하는 직원을 본인 동의 없이 해고할 수 있고, 경기가 안 좋으면 15%까지 확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경기가 좋으냐 안 좋으냐는 전적으로 본사가 결정한다. 이 어찌 투명하다 하지 않겠는가.

나도 ‘밀어내기’라는 걸 시작했다. 어느 우유 기업 영업사원의 3년 전 욕설 녹음이 공개돼 국민의 정의 감정을 일깨운 그것 말이다. 내가 보기에도 그 사람은 악질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영업맨 가운데 밀어내기 안 하는 사람은 박카스와 신라면 영업맨 말고는 없다는 게 이 바닥 정설이다. 살 사람들 앞에 두고 “줄을 서시오” 할 정도가 아닌 한 밀어내기는 필수다. 그러지 않고는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 목표란 그런 것이다.

연초가 되면 누구나 그해 목표를 채우기 위한 스케줄을 제출한다. ‘언제 누구와 얼마를 거래하겠다’는 식으로 규모와 아이템까지 제시한다. 우리는 그걸 ‘그림 그린다’고 표현한다. ‘소설 쓴다’고도 한다. 무슨 수로 1년을 깨알같이 예상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불가능하다는 건 우리도 알고, 매니저도 알고, 한국 지사도 알고, 미국 본사도 안다. 하지만 강력한 먹이사슬을 형성할 수 있다. 그걸 토대로 무시무시한 ‘쪼기’가 시작된다.

어려서 개천에 방뇨하다가 내 오줌이 태평양까지 흘러갈 수 있을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지금도 정답은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린 그림, 내가 쓴 소설이 미국 본사까지 간다는 건 안다. 영업맨 각자가 써낸 스케줄과 목표를 매니저가 취합하고, 그걸 다시 한국 지사가 취합해 미국 본사에 올린다. 미국 본사는 전세계에서 올라온 걸 모두 취합한 뒤, 그걸 토대로 일주일 단위의 영업 전망을 발표한다. 이에 따라 주가가 오르내린다.

그렇다. 우리의 터무니없는 그림 그리기의 최종 표적은 주식시장이다. 놀라운 건 우리는 난사를 했는데, 미국 본사에서는 가지런이 탄착군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매주 전망치가 얼추 맞아떨어진다. 좋게 말하면 집단 지성이지만, 영업맨들에겐 천당과 지옥의 차이다. 이렇듯 다국적기업에서 일하는 영업맨의 밀어내기는 글로벌 메커니즘 안에서 이뤄지는 셈이다. 밀어내기에 대한 미국 본사의 입장은 뭘까?

‘안 돼요 돼요 돼요….’

본사의 주가를 떠받치기 위해 오늘도 영업맨들은 소총수가 되어 밀어내기라는 총알 세례를 ‘을’에게 퍼붓는다. 더 약자에겐 ‘갑’이지만, 저 높은 곳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다. 보이지 않지만, 그럴수록 군령은 엄격하게 집행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스마트 전쟁이다. 죽는 사람도, 죽이는 사람도 서로를 볼 기회조차 없다. 그런데 여러분은 내가 보이나요? 기자 양반한테 안 보이게 해달라고 단단히 다짐을 받아두긴 했는데. 고 과장이나 나나 투명 망토가 있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이해해주기 바란다. 이 바닥에서는 그걸 ‘맨홀 뚜껑 뒤에 숨는다’고 한다. 존재감이 없으면 윗사람들이 살생부를 작성할 때도 눈에 띄지 않고 슬쩍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러려면 될수록 비용도 안 쓰고, 큰 거래도 안 해야 한다. 다만,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때를 기다릴 뿐.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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