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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이름도 호명되지 않는 대필작가 장씨

등록 2013-06-23 13:29수정 2013-06-23 13:50

유령, 먹고 살기 힘들어서 타인을 빌렸다
“직접 만나서 인터뷰하고 싶어요. 언제 어디로 찾아가면 될까요?”

“꼭 대면해야 합니까? 이메일이나 전화로 하면….”

이런 드문 상황, 대략난감이다. 서면 인터뷰라니! 그가 양해를 구한다. “제가, 투명인간이잖아요.” 좋다. 쿨하게 그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한다. 10년 넘게 대필작가를 하면서 세운 나름의 원칙이란다. “요즘엔 대필 청탁과 계약서 작성 과정에서도 대면 과정이 생략돼요. 이메일과 전화면 족하죠. 이젠 얼굴을 보이는 게 남우새스럽기도 하고….”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장수철(48·가명)씨는 1990년대 문예지로 등단한 시인이자 소설가다. 그 이름 뒤에 꼬리표가 하나 더 있으니 ‘대필작가’다.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 유령 작가가 그의 직업이다. 그가 서면 인터뷰를 고집한 이유는 분명했다. 의뢰인 이름 뒤 ‘유령’ 혹은 ‘투명인간’처럼 빌붙어 먹고 사는 존재여서란다. 책 출간과 동시에 그는 사라지는 운명이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기억하지 않는다. 대필작가조차 자신을, 동료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이들 사이에 연줄·인맥·친분 관계가 생길 리 만무하다. 동명의 영화 <고스트 라이터>에서 보듯 대필작가에겐 이름뿐 아니라 실체도 없다.

“지금껏 100편 이상 작품을 대필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대필, 윤색과 각색 등까지 포함하면 그렇습니다.(웃음)”

그가 보내준 인터뷰 답변지에서 가장 눈에 띈 건 대필작 목록이었다. A4 용지 반 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빼곡했다. (차마 여기서 밝힐 수는 없다.) 장르도 장편소설, 중국 역사소설, 한국·세계사 전집, 정치유머집, 에세이·산문집, 역사서, 자기 계발서 등 다양했다. 놀라웠다.

그가 투명인간이 된 시점은 1990년대 중반이다. 애초 대필은 전업작가의 보조수단이었다. “시인으로 등단한 지 2년 후 지인에게서 장편소설을 윤색해서 완성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죠. 등단 이듬해 첫아이가 태어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대필의 시작이었다. 그 뒤로는 알음알음 대필 의뢰가 쇄도했다. 점차 대필작이 늘었다. 2000년대 들어선 부업이 본업처럼 돼버렸다. ‘본업을 위한 최소한의 버팀목’, ‘한때의 외도’라고 보듬은 세월이 십수 년이다. 늘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작품을 갈망했다. 대필을 통해 살림이 핀 건 위안이다. 꿀이 흘러넘치는 독배처럼 얄팍한 원고료는 달고 맛났다. ‘돈 때문에 영혼을 파는 투명인간’답게 작가의 자존심과 정체성은 깔끔하게 버려야 했다. 그럼에도 산고의 결과물이 타인의 성과물로만 기억·유통될 때면 소주 한잔을 벗삼아 허탈감을 달랜다.

“작가와 작가지망생이 대필에 발 담그는 건 경제적 이유가 큽니다. 명망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를 제외하고 전업작가로 밥벌이가 녹록지 않아요. 내 책만으로 밥벌이가 가능하다면 대필할 이유가 없지요.”

신춘문예에 당선됐지만 돈을 벌기 위해 대필작가가 될 수밖에 없던, 드라마 <천일의 약속>(SBS)의 여주인공 이서연이 떠올랐다.

많은 이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대필’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질까. 그는 물색-계약-집필 순이라고 귀띔했다. 적임자 물색이 관건이다. 출판사와 의뢰인의 인맥이 총동원된다. 책의 콘셉트에 맞는 유능한 대필자 확보는 이들의 경제력과 인력풀에 비례한다. 장씨는 “지인들을 동원해 적임자를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자서전에 유능한 작가에게 경제 입문서를 맡기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대필의 세계도 장르별로 분업화·전문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대필자가 선정되면 이메일과 전화 등을 통해 계약서 내용을 조율한다. 송달 역시 이메일과 등기우편을 통한다. 계약 형태는 ‘출판(인세) 계약서’, ‘출판권 설정 계약서’가 아니다. ‘윤문 계약서’, ‘집필 계약서’, ‘외주 계약서’ 등 변형된 형태다. “‘비밀 유지’ 같은 구체적인 항목을 직접 기재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문서화하지 않아도 ‘보안’은 이 바닥에서 불문율이거든요. 의뢰인과 편집자, 대필자가 대면하는 일은 극히 없어요. ‘대필작가=투명인간’이니까요.”

대필은 주로 자서전, 평전, 재테크, 자기 계발서, 실용서, 에세이 장르에서 이뤄진다. 트렌드에 맞춰 속성으로 펴내야 하는 특성 탓이다. 출판계에서는 정치인과 기업인, 연예인의 이름으로 나온 자서전의 80% 이상이 대필이라는 풍문이 정설처럼 떠돈다. <마시멜로 이야기> <그림 읽어주는 여자> 등이 대리번역과 대필 논란을 낳은 대표작이다.

대필 기간은 원고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3~6개월이 일반적인데, 나는 주로 3개월짜리 작업을 했어요. 첫 달에 자료수집과 취재·인터뷰, 둘째 달에 집필, 셋째 달에 교정·수정 작업을 하지요.” 대필작가의 처우와 원고료는 경력에 따라 차등된다. A4 용지 50매를 기준으로 해 희곡·영화 시나리오는 1500만~3천만 원 선, 단행본은 수백만 원 선이다. 이 업계에서 명망(?)을 쌓은 이들은 대필이 본업이기도 하다.

“목돈을 챙길 수 있는, 운 좋은 경우도 있어요. 자금력이 뛰어난 출판사나 의뢰인을 만났을 때, 국회의원 출마를 앞둔 기업인의 자서전을 쓸 때이죠. 특히 후자의 경우 원고료와 상관없이 ‘잘만 써달라’고 읍소할 때가 많아 갑을 관계가 바뀌기도 하지요.”

인터넷에서 ‘대필작가’를 검색했다. 관련 사이트와 블로그가 실타래처럼 얽혀 나왔다. 국회의원과 지자체장, 교육감과 교육위원 등 선거 출마를 준비하는 사람만 전국적으로 2만여 명이다. 여기에 단행본, 논문, 자기소개서, 희곡, 시나리오의 대필까지 합치니 수요가 어마어마하다. 최근에는 저자들이 먼저 작품을 윤색하기 위한 대필자를 요청하는 추세란다. 여기에 ‘88세대’ 등 좁은 취업문도 한몫했다. 기업형 대필작가 그룹도 성업 중이다. 출판사마다 확보한 대필자 사진과 프로필을 홈페이지에 노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렇게 투명인간이 역설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대필을 매개로 투명인간을 양산하는 구조이다.

“대필작가로 선호도가 높은 직업군은 시인, 소설가, 방송작가, 출판 편집자나 기획자입니다. 언론사 기자,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 졸업자, 작가지망생, 각종 문예 관련 공모전 수상자, 남성보다 여성이 인기가 있고요.”

끝으로 그에게 물었다. 우리 출판계에 투명인간이 넘쳐나는 양태를 어떻게 보느냐고. “첫째는 먹고살기 힘들어서죠. ‘투명인간이 되더라도 글을 쓰겠다’는 욕망을 가진 작가 지망생들의 적극적인 의견 표출의 결과로 볼 수 있고요. 투명인간일 때라야 가능한 관음, 일탈, 세속 등의 욕망을 타인의 이름을 빌려 분출할 수 있는 것도 한 원인 아닐까요?”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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