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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투표 최소한의 의사표시, 비용 든다고 막다니…”

등록 2012-11-07 21:03수정 2012-11-08 20:09

서울지역대학생연합과 ‘네가지 없는 대학생들의 모임’ 주최로 7일 낮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대학생들이 대선 투표시간 연장을 촉구하고 있다. ‘네가지’ 는 반값등록금, 주거권, 청년일자리, 대학개혁을 뜻한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서울지역대학생연합과 ‘네가지 없는 대학생들의 모임’ 주최로 7일 낮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대학생들이 대선 투표시간 연장을 촉구하고 있다. ‘네가지’ 는 반값등록금, 주거권, 청년일자리, 대학개혁을 뜻한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뉴스쏙] 투표시간 연장 10만명 입법청원
10년간 투표 못한 정씨 ‘내 권리찾기’ 행동 나섰다
200여개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투표권 보장 공동행동’은 지난 1일 투표시간 연장을 위한 입법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시민들의 서명을 받은 지 2주일 만에 9만5000여명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과거 시민운동과 달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적극 호응하는 흐름이 감지된다.

정미영(40·경기 광명)씨는 서울 충무로의 작은 인쇄회사에서 10년째 일하고 있다. 오전 8시30분부터 저녁 6시30분까지 일한다. 작은 회사지만 좀체 쉬는 날이 없다. 지난 10여년간 투표를 거의 못했다. 제18대 대통령선거가 있는 올해 12월19일도 쉴 수 없다. 출근 시간을 고려하면 새벽 6시 투표도 빠듯하다.

지난 1일, 정씨는 작지만 의미심장한 ‘정치적 행동’에 나섰다.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투표권 보장 공동행동’이 투표 마감 시각을 현행 오후 6시에서 밤 9시까지 연장하는 법을 만들어 달라고 국회에 입법청원한다는 기사를 봤다. 인터넷 누리집(홈페이지)을 찾아 서명용지를 출력했다.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 9명도 설득해 동참시켰다. 같은 날 국회에 제출된 입법청원자 9만5000여명의 명단에 정씨와 그 동료들의 이름이 함께 올랐다.

■ 시민 직접행동이 시작되다 국회 등 대의정치기구가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시민들이 직접 시위·보이코트·청원 등에 나서는 것을 정치학자들은 ‘시민 직접행동’이라 부른다.

“국민한테는 투표가 최소한의 의사표시인데,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이 그걸 막으려고 비용이 든다느니 돈 얘기를 하고…. 정말 분했어요.” 정씨를 ‘직접행동’에 나서게 만든 것은 분노였다. 이런 분노가 투표시간의 제약으로 참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번지고 있다.

투표시간 연장 요구가 본격적으로 분출한 것은 9월 말이다. 9월18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새누리당의 반대로 투표시간 연장 법안이 부결됐다.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이 움직였다. 9월20일 포털사이트 다음의 온라인 서명운동 게시판에 ‘투표 좀 하자-투표시간 밤 10시까지 연장’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하루 만에 2000여명이 참여했다. 두달이 지난 지금까지 4만1000여명의 누리꾼이 서명했다. 그 동력을 발판으로 시민단체들은 2주일 동안 9만5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입법청원할 수 있었다.

이 게시판은 4년여 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발원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누리꾼들의 분노가 먼저 들끓고 시민사회단체가 뒤늦게 합류하고 정치권이 그다음에야 움직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누리꾼들이 먼저 행동했다. 전국 2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투표권 보장 공동행동’이라는 기구를 꾸려 입법청원 서명운동에 돌입한 게 10월16일이었으니, 이보다 한달여 앞서 누리꾼들의 자발적 서명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판 차티스트’ 운동이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차티스트 운동은 1830~50년대 영국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1832년 영국 의회가 개정한 선거법에서 세금을 내는 유산계급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자, 투표권을 차단당한 노동자들이 뭉쳤다. 1838년 노동자협회를 결성해 보통선거권 보장 등 6개 권리를 명시한 인민헌장(People’s Chart)을 발표했다. 투표권 자체를 쟁취하려 한 차티스트 운동과 차이는 있으나, 2012년 한국의 투표시간 연장운동도 큰 줄기에서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셈이다.

휴일근무에 사실상 참정권 박탈
비정규직 늘며 투표참여율 급감
“투표는 최소한의 의사표시인데
비용이 든다고 막으려 해 분통”

누리꾼들 행동에 시민들 결집
서명운동 2주만에 10만명 육박
한국판 ‘차티스트운동’ 될까

■ 저변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과거 촛불집회를 주로 여성·학생·직장인 등이 주도한 것과 달리, 투표시간 연장운동의 저변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누리꾼의 서명운동을 오프라인의 직접행동으로 처음 옮겨온 곳도 작은 노동단체다.

청년 비정규직 문제에 중심을 두고 활동해온 사회단체 ‘청년노동광장’은 10월4일부터 매일 낮 국회 정문 앞에서 108배를 올리며 투표시간 연장을 촉구하고 있다. 조양진성 청년노동광장 대표는 “100여년 전 노동자나 여성이 참정권을 요구하며 싸웠던 것처럼, 현재 벌어지고 있는 투표시간 연장운동은 투표날 일할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아르바이트 청년들을 위한 새로운 참정권 운동”이라고 말했다.

노동자 중심의 참정권 운동이 불붙을 조짐은 지난 4월 총선 때 일부 감지됐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총은 ‘참정권 방해 신고센터’를 운영했다. 8일 동안 780여건의 신고가 쏟아졌다.

“새로 시작한 게 아니라 해마다 이런 신고센터를 열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때와 달리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신고가 많았다”고 정호희 민주노총 대변인은 말했다. 센터에 접수된 신고의 대부분은 법정 공휴일인 선거일에도 노동자들을 출근시킨 사업주를 성토·고발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비정규직·단기직 등 고용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의 ‘불안정 노동자’들이 많았다. 정 대변인은 “경제적으로 소외받아온 노동자 계층이 정치적으로도 소외받는 현실을 알게 되면서 분노하는 목소리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일부’ 유권자의 문제가 아니다. 2001년 736만6000명이었던 비정규직 인구는 2007년 878만5000명으로 140만여명 늘었다. 비정규직이 총 유권자 4000만여명의 3분의 1에 육박한다. 비정규직이 급증하는 동안 총선 투표율은 2004년 60.6%에서 2008년 46.1%로 급락했다. 가난한 비정규직이 늘면서 투표에 참여하는 유권자의 비율도 줄어든 것이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정규직 노동자가 많았을 때는 투표권 행사가 쉬웠지만, 비정규직이 늘면서 작업장 내 노동자들의 지위가 하락했고 이에 따라 현실적으로 투표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인구가 엄청나게 늘었다”고 말했다.

서 위원이 2010년 쓴 ‘투표 불참 유권자 집단과 한국 정당체제’ 논문을 보면, 월 소득 200만원 이하의 저소득 비정규직일 경우 투표에 불참할 확률이 높고, 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납세액이 적은 자치구일수록 총선 투표율의 하락폭이 컸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64.1%가 ‘투표 참여가 어렵다’고 답한 최근 한국정치학회의 조사 결과도 나와 있다.

조성대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는 “그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박탈당하고 있었는데, 투표시간 연장은 형식적으로만 보장돼 있던 참정권을 제대로 보장받자는 운동”이라고 말했다. 영국 차티스트 운동이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하면서 비롯한 사회적 불평등을 참정권 확대를 통해 해결하려는 노동자들의 운동이었던 것처럼, 한국의 투표시간 연장운동은 비정규직 증가와 중산층 붕괴 등 양극화 시대를 맞아 소외된 유권자들이 정치 참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 세상을 바꾸는 참정권 운동 결국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저변의 거대한 흐름이 시민사회단체까지 움직였다. “그동안 투표권을 사실상 보장받지 못했던 시민들이 굉장히 자발적으로 빠르게 결집했고, 이를 그냥 묻히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시민사회단체가 공동기구를 꾸려 입법청원에 나서게 된 것”이라고 황영민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간사는 말했다.

입법청원 서명이라는 ‘작은 행동’은 시민들이 참여하기에도 비교적 수월하다. 사회학자들은 ‘직접행동에 동참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경제적·사회적 비용이 적을수록 사회운동이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다. 바로 이 대목에, 과거 촛불집회와 또다른 양상의 시민운동이 번질 가능성이 있다.

일찌감치 직접행동에 돌입한 사람들이 있다. 김찬회(34)씨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사회적 발언을 해온 창원지법 이정렬 판사의 팬카페(cafe.daum.net/2fan) 회원이다. 김씨는 카페 회원들과 함께 ‘팔도유람단’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판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뜻맞는 회원들끼리 투표시간 연장을 위해 뭉쳤다.

이들은 10월20일부터 전국의 대학을 돌며 투표시간 연장 서명을 받고 있다. 지역마다 모임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평일에는 2~3명, 주말에는 10여명 정도가 서명용지를 들고 다니는 일에 참여한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다”고 김씨는 말했다.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부터 2000년대 촛불집회까지 통틀어 참정권 확대를 내건 시민운동은 드물었다. 대통령 직선제 실시를 촉구했던 87년 6월항쟁이 거의 유일한 예외인데, 당시에는 다른 반독재 의제와 함께 직선제를 요구했다. 반면 투표시간 연장운동은 참정권 확대에 집중하는 시민운동이다. 홍재우 인제대 교수(정치학)는 “참정권 보장 차원에서 투표시간 연장을 요구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투표권 보장 공동행동’은 15일까지 투표시간 연장에 대한 정치권의 합의가 없을 경우, 17일 대규모 촛불집회를 열 계획이다. 민주노총은 참정권 침해 사례 신고센터(전화 02-2670-9100/02-2269-6161, 전자우편 kctu@hanmail.net) 운영을 시작했다.

진명선 윤형중 허재현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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