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군 고달면 호곡리 섬진강도깨비마을에는 6척 장신인 대장을 비롯해 도깨비 1000여마리가 숨어 있다. 사진 섬진강도깨비마을 제공
[뉴스 쏙]
예술공동체 ‘섬진강 도깨비마을’
예술공동체 ‘섬진강 도깨비마을’
봄볕 아래 섬진강을 지키던 6척 장신의 도깨비 대장이 벌떡 일어났다. 퉁방울 같은 눈으로 노려보더니 긴 창을 비껴들고 앞길을 막아섰다. 왁자지껄 소란을 피우던 아이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산그늘로 뒷걸음쳤다.
지난 19일 오전 전남 곡성군 고달면 호곡리 섬진강도깨비마을(dokaebi.co.kr) 들머리. 10여㎞ 떨어진 읍내에서 첩첩산중으로 체험학습을 온 곡성중앙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잔뜩 몸을 낮추었다. 아이들은 눈알을 부라린 도깨비 대장의 시야를 가까스로 벗어나 마을로 통하는 오솔길에 들어섰다. 숲길에서는 고개마다 도깨비들이 나타나 아리송한 수수께끼를 내고는 사라졌다. 아이들은 수수께끼를 풀며 20여분 만에 깊은 산속 도깨비공원에 이르렀다. 숲에 숨어 있던 심술궂고 장난스런 도깨비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방망이를 마구 휘둘러댔다.
“친구들아, 어서 와라.”
무섭고 우스운 도깨비 친구들의 표정을 사진에 담는 아이들의 얼굴도 덩달아 환해졌다. 마을의 도깨비 중 전시관 현관에 손을 벌리고 앉은 ‘닷냥이’는 인기를 독차지했다.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이고 얼굴이 닮은데다 왼쪽 뺨에 복점까지 갖고 있어 친근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닷냥이는 닷냥을 꿔주면 다음날 돈을 갚고도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날마다 돈을 갚아, 꿔준 사람을 부자로 만든다는 어리숙한 도깨비다. 김민수(10)군은 “닷냥이가 참 귀엽다. 집으로 데려가고 싶다. 엄마 아빠도 좋아하실 것 같다”며 웃었다.
이날 체험학습을 나온 3학년 학생 58명은 도깨비 1000여마리가 산다는 숲 19만8000㎡(6만평)에서 맘껏 뛰놀며 상상의 세계를 여행했다. 마을 안 공연장과 전시관에서는 엄지만한 새끼부터 6척 거구 대장까지 숱한 도깨비들이 아이들한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은 인형극장에서 마천목 장군(1358~1431·조선 개국공신)이 도깨비를 부려 섬진강에 어살(물길을 돌로 막아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장치)을 쌓는 장면을 보며 환호했다. 마 장군은 소년 시절 병든 어머니가 물고기를 원하자 겁없이 대장 도깨비를 동원해 섬진강을 가로막는 어살(도깨비살)을 하룻밤 만에 만들어내 아이들의 박수를 받았다. 이 줄거리는 <동국여지승람>과 <청장관전서>에 수록된 곡성 출신 마 장군의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공연이 끝나자 아이들은 전시장으로 이동해 상고시대부터 해방 이후까지 도깨비의 역사를 정리한 300여점의 전시품을 찬찬히 살폈다. 해설사인 나상진(25)씨는 “도깨비는 장난을 좋아하고 사람을 해치지 않는 대신 늘 당하기만 하는 착한 존재”라며 “생김새도 각양각색이어서 아이들한테 호기심과 궁금증을 유발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인솔해 온 임순화 교사는 “인형극이 지역의 인물과 유적을 소재로 했고 ‘효성이 지극하면 도깨비도 돕는다’는 교훈을 담고 있어 효과가 만점”이라고 말했다.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오자 남자아이들은 도시락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부근 계곡과 ‘둠벙’(물웅덩이)으로 뛰어들었다. 맑은 물에만 산다는 도롱뇽을 잡느라 바지가 젖는 줄도 모르고 물속을 누볐다. 여자아이들은 캐릭터 판매점에서 도깨비방망이 비눗물통을 사더니 오색이 영롱한 비눗방울을 숲 속으로 불어대며 좋아했다.
섬진강도깨비마을은 2001년부터 도깨비가 좋아 모인 사람들의 문화예술 공동체다. 애초 곡성지역 학부모들이 인형극반·동요요들반·동화구연반 등 동아리 활동을 하다 누리집을 개설하며 회원 가입자를 3700여명, 프로그램 협력자를 100여명으로 늘렸다. 30·40대 학부모들이 우리 문화의 보물창고인 도깨비로 아이들의 상상력을 펼치도록 해주자며 대거 동참했다.
도깨비마을은 15년 전 섬진강 중류의 산속에 터를 닦은 뒤 대리석과 도자기, 청동, 황감, 토기 등 여러 재질로 도깨비 형상을 세워나갔다. 주변에서 도깨비 설화와 전설을 발굴해 인형극 공연, 동화·동요 제작, 탁본 뜨기, 문양 찍기 등 체험활동을 하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마을의 독특한 풍경과 다양한 활동이 알려지면서 2006년엔 교육부가 주는 평생학습대상을 받았고, 2014년엔 사회적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직원 9명이 도깨비 해설가, 인형극 공연가, 체험활동 강사 등 분야별로 활동중이고, 신청이 몰려 일손이 부족하면 동아리에 참여했던 주민들의 지원을 받는다. 요즘 방문객은 한달 500명 안팎이나, 서울·부산 등지로 입소문이 번져 점차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2억여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어렵사리 자립의 기반을 다지는 중이다. 올해는 공익활동으로 생생문화재사업(문화재청), 토요꿈다락학교(전남문화예술재단), 체험활동 프로그램(곡성교육지원청) 등을 진행한다.
이 마을은 상고시대 치우천왕부터 해방 이후 마을 도깨비까지 우리나라 도깨비의 역사와 기상을 알리며 학교교육과 평생교육을 거들고 있다. 일제강점기 교과서에 실린 일본 설화 ‘혹부리 영감’이 우리 것으로 둔갑돼 여전히 인형극이나 아동극의 소재로 쓰이는 것을 바로잡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김성범(53) 촌장은 “도깨비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진짜로 도깨비를 아는 사람도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아이들이 도깨비를 불러내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꿈꾸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실린 <책이 꼼지락꼼지락>을 쓴 아동문학가이자 동요 창작자다. 20여년 전 도깨비에 꽂힌 그는 <도깨비를 찾아라> <도깨비살> 등 책을 쓰고 <섬진강, 도깨비마을 사람들> <호랑이는 내가 맛있대> 등의 음반을 만들었다. 전국 곳곳으로 강연을 나가 도깨비의 가치를 소개하고, 직접 조각을 배워 도깨비 형상을 제작하는 등 ‘도깨비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다. 앞으로 한·중·일의 도깨비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하는 꿈을 갖고 있다.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더 많은 세 나라가 서로 아웅다웅하는 걸 그치고 도깨비로 가까워지자는 뜻이다.
도깨비를 파는 사업에 나선 이 마을은 현재 동요·동시·요들 음반 9장을 제작해 보급하고 있고, 평균 40분 분량인 인형극 10여편을 언제든지 공연할 수 있다. 방문객의 호기심을 자극한 도깨비 숲길과 도깨비 공원을 조성했고, 2층짜리 전시관을 지어 300여마리의 도깨비 형상을 들여놨다. 더불어 도깨비 조형물, 닷냥이 저금통, 도깨비 목걸이, 휴대전화 고리, 방망이 비눗물 따위의 캐릭터 상품을 개발해 팔고 있다.
이 마을의 직원 조윤희씨는 “도깨비를 팔아 흑자를 내는 것이 1차 목표”라며 “남녀노소 두루 도깨비의 존재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마을은 지척에 있는 섬진강을 이용해 설화길 탐방과 자전거 여행 등 체험활동을 확대하기로 했다. 6월12일엔 문화와 생태를 잇는 생태숲 설화길을 개설해 탐방체험 행사를 마련한다. 200여명이 8개 조로 나뉘어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는 도깨비살을 찾아가고, 강변에서 서식하는 동식물의 생태에 대해 설명을 듣는다. 강변 양쪽에는 몇해 전 이미 자전거도로가 개설됐다. 주말이면 한가롭게 2인승 자전거를 타며 싱그러운 강바람을 즐기는 가족과 연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자전거를 타던 김평자(56·전남 순천시)씨는 “대장 도깨비 형상을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한밤중에 고개를 넘다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도깨비와 맞짱을 뜬 적이 있다고 자랑하시곤 했다”고 추억에 잠겼다.
곡성군도 지난달 인근 기차마을 안에 4차원 영상으로 도깨비불을 피우고, 오목·볼록 거울들로 도깨비굴을 체험하는 요술랜드를 열어 ‘도깨비 상품화’를 지역 특화사업으로 받아들였다.
곡성/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섬진강도깨비마을을 찾은 어린이들이 ‘닷냥이’ 도깨비 옆에서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곡성/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섬진강도깨비마을에는 크고 작은 도깨비 1000여마리가 숨어 있다. 사진 섬진강도깨비마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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