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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단기직에 저임금 쳇바퀴…대선 이야기가 낄 틈이 없었다

등록 2012-09-26 19:26수정 2012-09-26 21:20

지난 18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연결 다리를 시민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다. 뒤로는 구로디지털단지의  아파트형 공장들이 보인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지난 18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연결 다리를 시민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다. 뒤로는 구로디지털단지의 아파트형 공장들이 보인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012 대선 만인보 국토종단 민심기행
② 구로디지털단지: 꿈 잃은 여성노동자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전국을 발로 뛰며 바닥 민심을 듣는 ‘2012 대선 만인보- 국토종단 민심기행’ 두번째 순서로, 서울 구로·가산디지털단지에서 일하는 여성 비정규직들을 만났다.


각 분야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면서 8월 말부터 사전취재를 시작해 9월 초 구로디지털단지 조립공장에서 5일간 직접 일했다. 저소득 여성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구로동 근로임대아파트에도 들어가 그들의 생활을 밀착취재했다. 그 가운데 40여명을 대상으로 심층 설문조사를 진행하는 한편, 각종 통계자료를 통해 구로의 정치·경제·사회 지표를 분석했다. ‘2012 대선 만인보- 국토종단 민심기행’은 주 1회 정도씩 연말까지 연재한다.

켄베이어벨트앞 고단한 삶
“가는곳마다 이런 일자리뿐”
구로·금천 여성노동자 40명중 19명
“서민 이해할 후보 없어”“몰라”

첫출근한 생산팀 단기 사원은 공장을 돌며 인사했다. 컨베이어벨트 앞에 앉은 검사라인 직원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각자 휴대전화를 만지며 시계만 쳐다봤다.

서로 인사하지 않는 데는 곡절이 있었다. 컨베이어벨트에 둘러앉아 교통카드 단말기 오작동을 검사하는 20~30대 여성 10명 가운데 8명은 공장에서 일한 지 한달이 넘지 않았다. “서로 알아봐야…. 언제 그만둘지 모르니까.” 지난 6일 오전 9시 서울 구로디지털단지 안 조립공장에서 김소정(가명·27)씨가 속삭이듯 말했다.

김씨는 서울에서 전문계고를 졸업했다.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은 포기했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있는 휴대전화 부품 조립공장에서 매일 밤 9시까지 일했다. 잔업에 지쳐 6개월 만에 관뒀다. 독산동의 박스 포장 공장에서도 잔업을 밥 먹듯 했다. 1년까지 버티다 나왔다. 다시 취직한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의 화장품 용기 공장에선 온종일 서서 일했다. 주야 교대로 근무하느라 일과 잠이 생활의 전부였다. 6개월 만에 나왔다. 한동안 그냥 쉬다가 2년 전 지금 회사에 취직했다. 160만원 월급이 110만원으로 줄었지만, 앉아서 일할 수 있어 좋았다.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사실 별 기대 없어.” 오는 12월 대선에 대한 김씨의 생각이다. “대통령 바뀐다고 뭐가 많이 달라지는 것 같지 않아. 더 나쁘게만 안 되면 좋을 텐데.”

상황은 나빠지고 있었다. 컨베이어벨트가 조만간 멈춘다. 이번달을 끝으로 회사는 검사라인을 없앨 계획이다. 일감이 줄자 경영진은 다른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김씨를 비롯한 여성 비정규직 10명은 그 결정에 끼어들어 뭔가 도모할 힘이 없었다. “다른 직장이나 알아봐야지.” 김씨는 간호조무사 시험을 준비해볼까 궁리중이다.

서민들을 위한다는 대선 후보 3명이 나섰지만, 그 가운데 누군가 자신의 궁벽한 처지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김씨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수진(가명·28)씨는 이번 대선에 전혀 관심이 없다. “누가 되든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걔네가 우리한테 돈 준대냐? 돈 준다고 하면 뽑지.” 배유정(가명·31)씨는 마음에 드는 대통령 후보를 아직 찾지 못했다. “난 박근혜가 싫어. 문재인도 별로고. 안철수도 그냥 그래. 다른 인물은 없나?”

지난 8~10일 구로·가산디지털단지 일대에 사는 여성 노동자 40명을 무작위로 골라 설문조사한 결과, ‘비정규직 등 서민을 가장 잘 이해하는 대선 후보가 누구냐’는 질문에 절반 가까운 19명(47.5%)이 ‘없다’거나 ‘모르겠다’고 답했다.

“교육·육아만 해결돼도 좋을텐데…투표날 쉴 수나 있을지”

일제 시절, 허허벌판이던 구로에 처음 공장이 들어섰다. 경부선 철도가 지나고 서울에서 인천항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으며 안양천·도림천을 끼고 있는 땅이었다. 일본인 공장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했다. 벌집을 닮은 노동자 집거촌도 그때 형성됐다.

한반도의 고혈을 짜내던 구로공단은 1960~70년대 들어 수출산업단지로 이름을 바꿨다. 도심 재개발에 밀려난 철거민과 농촌에서 상경한 소녀들이 구로에서 일했다.

1990년대 들어 공장의 국외 이전이 잇따랐다. 성장의 열매는 공장주들과 함께 구로를 떠났다. 구로공단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다시 한번 이름을 바꿨다. 구로구 구로동에 들어선 1단지를 ‘구로디지털단지’, 금천구 가산동에 자리한 2·3단지를 ‘가산디지털단지’로 불렀다. 90년대 말 아이티(IT) 열풍을 타고 벤처기업들이 몰려들었으나 한때의 바람이었다.

첨단 연구실이 들어찰 것으로 기대했던 아파트형 단지 곳곳에는 전자제품 부품을 조립하는 영세공장들이 다시 들어섰다. 한국 사회 최하층 노동자들은 구로를 떠나지 못했다. ‘코리안드림’을 품은 재중동포와 탈북자, 그리고 20~40대 여성들이 지금도 구로에 모여 살고 있다.

구로디지털단지의 멀끔한 아파트형 복합건물 15층에 자리잡은 한 조립공장에도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너비 40㎝의 컨베이어벨트를 사이에 두고 교통카드 단말기 생산팀 검사라인 소속 직원 10명이 마주앉아 일한다. 매일 아침 9시가 되면 벨트는 쉼없는 회전을 시작한다.

같은 작업장서 일하는 10명
퇴근때까지 서로 말없어
누가 그만둬도 무관심
바쁜 노동 일과 속에
대선 이야기가 낄 틈이 없었다

옆방에서 완제품을 만들어 벨트에 올리면, 벨트를 타고 건너온 단말기를 집어 검사하는 게 이들의 일이다. 버튼이 제대로 눌리는지, 소리 크기가 일정한지, 영수증이 잘 나오는지, 단말기 칩을 잘 인식하는지 등 대략 20가지를 검사한다.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 작업이다. ‘신입’이 오면 작업조장이 한 시간 만에 일을 가르쳤다. “쉬우니까 금방 배울 거야. 받아 적어 봐요.” 신입들은 메모지를 보면서 한 시간 동안 연습해 전 과정을 익혔다. 누가 와도 금세 배워 일했고, 누가 그만둬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10여평의 작업장을 채우는 것은 전자음이었다. 단말기 버튼을 누를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났다. 녹음된 사람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검사를 시작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작업장의 ‘진짜 사람들’은 일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고참 김소정(가명·27)씨가 버튼을 눌러 컨베이어벨트를 멈췄다. 오전 11시. 휴식시간이었다. “소정인 칼 같네.” 작업조장이 은근히 비꼬았다. 오전 11시에 10분, 오후 4시에 15분의 휴식시간이 있다. 점심시간은 낮 12시부터 1시간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그 시간에 맞춰 화장실에 갔다. 작업시간에는 어깨를 펴거나 물을 마시는 것도 눈치를 봤다.

김씨의 바쁜 노동 속에 대선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다. “잘 모르겠네…. 기억이 안 나요.” 그동안 거쳐온 수많은 단기직을 줄줄 회고하던 그는 지난 대선에서 누굴 찍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누가 대통령이 되건 별 기대 안 해.”

점퍼를 입은 최수진(가명·28)씨는 기침을 하면서도 선풍기를 계속 틀어놨다. 공기가 답답하다고 했다. 최씨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투표권이 생긴 뒤 적어도 두 차례 대선이 있었지만, “한번도 대통령을 뽑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여성 노동자들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알고 있다. 다만 평판은 좋지 않았다. 10명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유미경(가명·39)씨도 박 후보의 흉을 봤다. “최저 시급이 얼마인지도 모른대. 아무래도 곱게만 자라서 뭘 모르나봐. 우리 같은 사람 이해하겠어?”

유씨는 세 아이를 돌보며 맞벌이하고 있다. “교육하고 육아만 해결돼도 얼마나 좋을까 싶어. 서민생활에 관심 있는 대통령이면 좋겠어.” 그에게 퇴근시간은 또다른 노동의 시작이다. 일이 끝나면 그는 자전거를 타고 서둘러 집으로 간다.

“조심 좀 하지.”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시 일을 시작했을 때, 조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기에 걸린 30대 후반의 여성 노동자가 연신 재채기를 하며 코를 풀었다. “감기 걸리면 안 돼. 한번 걸리면 다 옮기니까.”

그 잔소리가 못마땅해도 이들은 대놓고 말하진 못했다. “공기가 이렇게 안 좋은데 감기 안 걸리게 생겼어?” 조장이 없는 점심시간에 김경화(가명·31)씨가 말했다. 눈곱이 끼고 목에 가래도 찬다고 그는 불평했다. 바깥공기라도 쐬고 싶지만, 10분의 휴식시간은 화장실 다녀오기에도 빠듯했다.

“최저시급도 모르는 박후보
곱게만 자라서 그런가봐
MB도 ‘경제대통령’이라더니
나아진 게 하나도 없잖아
범죄증가도 나라탓 같아”

“나아진 게 하나도 없잖아.” 지난 대선 때 그는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 “‘경제 대통령’이라고 뽑았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지.” 김씨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범죄가 많잖아. 워낙 먹고살기 힘드니까, 나만 죽기 억울하니 너도 죽어라 이런 거잖아. 아무래도 나라가 잘못해서 그런 거 같아. 그걸 해결해야지.”

과묵한 배유정(가명·31)씨도 거들었다. “일자리랑 돈 문제가 제일 급해. 월급도 적고 단기직이고. 나이는 먹어가는데 할 만한 일은 다 이런 것뿐이고.” 이곳에 오기 전 휴대전화 부품 공장을 비롯해 여러 단기 생산직을 “돌아다녔다”고 그는 말했다. 과거 직업을 ‘이력’이 아니라 ‘방랑’인 것처럼 표현했다. 정치에 대한 배씨의 생각도 방랑중이었다.

“좋아하는 정당은 없어.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새누리당)이나 다 싫어.” 배씨에겐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고민도 있다. “근데 이번에 투표 언제인데? 투표하는 날 쉴 수 있나? 여기 늦게 출근할 수 있나? 우리 투표나 할 수 있는 거야?”

오후 6시, 일이 끝났다. 작업조장은 유성펜을 들고 화이트보드로 다가갔다. ‘하루 목표량 300개’라는 문구 아래에 ‘오늘의 실적’을 적어 넣었다. 216개. 여성 비정규직 10명은 오늘도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다. 퇴근길, 10명의 비정규직 여성들이 엘리베이터에 빼곡히 들어섰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내일 보자’는 인사도 없었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12월 대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경미 최유빈 기자 kmlee@hani.co.kr

▷ 1회 연평도 ‘평화가 밥 먹여준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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