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쏙] 조계종 음주도박 추문
90%지지 ‘자승 총무원장 체제’서
권력소외된 사람들 ‘동영상’ 입수
호법부장마저 “화투는 놀이문화”
교계단체 “불교 전체 훼손될 우려” 제33대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를 한달여 앞둔 2009년 9월29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대웅전에 200여명의 승려가 모였다. 당시 은정불교문화진흥원 이사장이던 자승 스님의 총무원장 출마를 지지하는 추대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자승 스님은 “구태 청산과 개방적 리더십이 절실한 때”라고 말했다. 추대식에는 조계사·법주사·직지사·은해사·불국사·해인사 등 전국 25개 교구 본사 가운데 19곳의 주지 스님이 참석했다. 화엄회·무량회·무차회·보림회 등 4대 종책 소속 종회의원 60여명도 가세했다. 종책은 조계종 중앙종회 안에서 정당과 같은 구실을 한다(이후 화엄회 일부가 법화회로 독립해서 현재는 5대 종책으로 불린다). 그 자리에는 이번 백양사 도박 사건에 연루된 승려도 있었다. 총무원장이 어떤 자리길래 전국의 내로라하는 승려 200여명이 모여 추대식을 열었을까? 조계종은 정신적 지주인 종정을 정점으로 총무원(행정기능), 중앙종회(입법기능), 호계원(사법기능) 등의 기구를 두고 있다. 총무원장은 행정부 수반인 국무총리에 비유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대통령 이상의 권력을 갖고 있다. 연간 300억원에 이르는 예산 집행권, 전국 사찰의 주지 임명권, 호법부를 통한 감찰권 등이 총무원장 감독 아래 있다. 종단 산하 사찰 재산에 대한 감독·처분권까지 갖고 있다.
더구나 총무원장은 국회 기능을 하는 중앙종회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임기 4년의 중앙종회 의원은 각 교구 본사의 산중총회를 통해 선출된다. 각 교구 본사 주지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찰의 주지 임명권은 총무원장에게 있다. 중앙종회에는 20여명의 직능대표 비례의원도 있는데, 역시 총무원장의 영향력 아래 있다. 불교계 한 인사는 “지금의 사태는 총무원장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구조가 근본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추대식이 열린 지 한달쯤 뒤인 2009년 10월22일. 자승 스님은 320명의 선거인단 가운데 290명의 지지를 얻는 ‘경이적인’ 득표율(90.6%)로 총무원장에 당선됐다. 기호 2번 각명 스님은 3표, 기호 3번 대우 스님은 4표를 얻었다. 28대 월주 스님부터 32대 지관 스님까지 역대 총무원장들은 60% 수준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그에 비하면 자승 스님은 종단 모든 세력의 지지를 두루 받아 ‘합의 추대’된 셈이었다.
4대 종책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자승 총무원장은 임기 초반 눈부신 정치력을 발휘했다. 교계 요직에 각 종책 출신을 골고루 배분하여 앉혔다. 과거와 달리, 총무원장 교체 이후 밀려나는 특정 종책 세력의 반발도 없었다. 개혁 성향으로 평가되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출신 젊은 승려들도 요직에 올랐다. 모든 종책을 아우르는 그의 정치력이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는 없었다.
올 4월22일, 단풍으로 유명한 전남 장성군 백양사 근처 한 관광호텔에 누군가 잠입했다. 이들은 호텔 특실에 무선 핀홀카메라를 설치했다. 백양사 방장 수산 큰스님의 49재 추모 법회에 참석하는 원로스님들이 묵을 방이었다. 그러나 원로스님들의 일정이 바뀌어 49재 당일인 24일에 오게 됐다. 빈방에 백양사 출신 몇몇 승려들이 모여 앉았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포커판을 벌였다. 20여일 뒤, 그 방에서 벌어진 일들이 영상으로 공개됐다.
백양사 도박 사건에 연루된 승려 대부분은 무차회 출신이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출신들이 무차회의 주축이다. 도박 영상을 폭로한 성호 스님은 “조계종에서 ‘종북 좌파’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보수 성향 인사다. 이 때문에 사태 초기에는 개혁파에 대한 보수파의 공격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백양사 도박 영상의 출발은 주지 자리를 둘러싼 백양사 내 갈등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몰래카메라가 설치된 방에 원래 묵기로 했던 것은 무차회 소속 승려가 아니라, 주지 임명 등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원로스님이었기 때문이다. 화살이 애초 의도와 다른 과녁에 꽂힌 셈이다.
그 우연이 이번 사태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문제의 동영상이 성호 스님의 수중에 들어갔다. 영상에 등장하는 이들은 자승 총무원장을 추대한 유력 스님들이었다. 같은 동영상이 재가 불자 ㄱ씨에게도 흘러갔다. 영상을 입수한 과정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두 인물이 동영상을 폭로하자 전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ㄱ씨에게 영상 유출을 사주한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이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조계종의 승려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자들의 폭로전”이라고 이번 사태를 평가했다.
자승 총무원장은 각 종책이 추천한 승려 대부분에게 ‘자리’를 나눠줬다. 여기서 소외된 이가 있었다. 금당사 주지였던 성호 스님은 자승 스님의 총무원장 출마 때부터 승적 및 이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다가 승적을 박탈당하는 ‘멸빈’에 처해졌고 주지 자리를 잃었다. 성호 스님은 징계 무효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는 승소한 상태다.
재가 불자 ㄱ씨는 지관 전 총무원장의 정책특보 출신으로, 자신이 모시던 명진 스님이 현 정권과 갈등을 빚는 바람에 덩달아 조계종 권력 구도에서 소외됐다. 봉은사 주지에서 물러난 명진 스님도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과 관련해 자승 총무원장과 대립각을 세운 바 있다. 자승 총무원장의 비리를 양심선언하겠다고 나선 ㅇ스님도 어느 유명 사찰의 비리 수사를 철저히 하라는 탄원서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폭로가 막장으로 치닫자 조계종은 15일 보도자료를 내고 가장 열성적으로 자승 총무원장을 공격하고 있는 성호 스님의 이력을 공개했다.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성호 스님은 성폭행 미수 등 각종 범죄 연루자다.
하지만 도박 영상에 나오는 당사자들이 “우리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16일 <문화방송>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 집중’에 출연한 조계종 호법부장 서리 정념 스님은 “화투는 일부 스님들의 놀이문화”라고 말했다. 그 발언에 대해 개혁 성향의 한 젊은 승려는 “미친 발언”이라며 격노했다. “만원짜리 수백장이 오고간 포커를 친 것이 재미라고 본다면 그건 부처님을 욕보이는 발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불교계에는 음주·흡연 등 계율에서 벗어나는 일탈을 선사들의 ‘기행’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문화적 관용이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역대 큰스님 가운데 기행을 일삼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젊은 승려들도 술을 ‘곡차’, 담배를 ‘향공양’이라고 순화해서 부른다. 이번 사태 관련자들이 상대를 향해 음주·도박을 일삼았다는 흠을 계속 들춰내는 걸 지켜보자면, 마치 조계종 승려 모두 음주·도박을 가까이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승려는 “스님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술·도박·여자 가운데 하나는 해야 미치지 않는다’는 말이 돈다. 이는 큰스님들이 기행을 통해 알리려 했던 참뜻을 왜곡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다른 불교계 인사는 “남성끼리 폐쇄된 공간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가끔 화투 정도는 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이런 작은 잘못이 모여 도박 사태를 낳았다”고 혀를 찼다.
불교계 시민단체들의 연대기구인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는 16일 의견서를 내고 “최근 도박사건이 파사현정(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의 수준을 넘어 불교 전체 명예를 훼손하는 것으로 흐르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며 “정한영(성호 스님)씨는 이제 그만 폭로를 중단하고, 종단은 밝혀야 할 허물이 있다면 용기있게 고백하고, 불교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감 있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16일 조계종은 원로의원, 총무원, 중앙종회에서 각 3명씩 9명으로 구성되는 ‘승단범계(梵戒) 쇄신위원회’를 설치하여 “승려들의 일상 전반에 걸쳐 사회적 윤리기준에 부합하는 새로운 계율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정국 이경미 진명선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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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 백양사 도박 사건이 알려진 뒤 옥천암 주지를 사임하고 참회정진중인 정범 스님이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신도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맞절을 하고있다. 정범 스님은 도박 사건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중앙종회의원, 총무원장 특보, 옥천암 주지 등에서 물러났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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