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24돌 특집]
탈출! 피로사회
탈출! 피로사회
야근·휴일근무가 일상이다. 퇴근 뒤에도 업무로 술을 마신다. 주말에 쉬어도 불안하다. 한국 사회에서 일중독에 걸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주변으로부터 ‘일중독자’라는 소리를 듣는 평범한 30대 직장인의 고백을 통해, 우리 사회가 왜 피로에서 탈출하기 쉽지 않은지를 살폈다.
물론 1000만원 덜 받으며
적당히 일하고
안 잘리는 회사 있다면
그리로 가겠죠 근데 그런 게 없다니까요
난 워커홀릭 아니에요
지금 시장이 요구하는 만큼
일하는 것뿐이라고요 다만 평생 살 동반자가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결혼 못하는 건가 전화를 못 받아 미안해요. 긴급회의가 있어 주말 내내 전국 지사 몇 곳을 돌았어요. 폰 배터리가 1% 남아 업무 외 전화를 받을 수 없었어요. 무슨 출장이냐고요? 지난 3월부터 미국과 체결한 에프티에이가 발효됐잖아요. 그 후속 조처로 다음달부터는 한국으로 들어오는 화물에 대해 미국이 증빙서류를 발급해주는 규정이 생겨요. 얼마 전 회사에서 그걸 확인하는 시스템을 갖췄는데, 각 지사가 잘 운영하는지 알아보러 간 거죠. 전 외국계 무역회사에서 수출 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김동현(가명·35)이라고 합니다. 직급은 팀장이고요. 올해 초 팀장으로 승진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를 겁니다. 중소기업에 다니다 3년 전 남들보다 늦은 32살에 이 회사에 입사했어요. 남들 따라잡으려고 미친 듯이 일했죠. 아침 9시 출근인데, 전 주로 8시까지 도착했어요. 항상 준비가 돼 있으면 실수도 적게 하는 법이거든요. 퇴근은 매일 밤 11시였어요. 그땐 부서가 새로 생겼을 때라, 나 혼자 일을 다 했어요. 사람 한 명을 더 달라는 말은 안 했어요. 저한테 일이 주어지면 일단 다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에요. 3년 만에 팀장이 됐죠. 늦은 편은 아닌 것 같아요. 팀장 되면 편해질 줄 알았더니 역시 아침 8시까지 출근해야 하더군요. 협력업체들이 모두 업무를 8시에 시작해요. 일찍 나와서 회사가 주문한 일을 업체가 잘 처리하는지 확인해요. 타이로 보내라고 한 물건이 베트남으로 발송되는 일은 없는지 체크하는 거죠. 사원들 업무 지시할 것도 챙기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요. 아, 물론 9시에 출근해도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에요. 정시에 오는 팀장도 있죠. 그러나 조금 더 원활하게 일하려면 아무래도 빨리 출근하는 게 좋겠죠.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부서에서 제가 항상 제일 먼저 회사에 도착하는 편입니다. 대신 퇴근은 좀 빨라졌어요. 약속이 있으면 저녁 7시에도 나가요. 주로 거래처 사람들과의 약속인데, 우리 회사가 ‘갑’일 때도 있고 ‘을’일 때도 있죠. 을일 땐 상대방 분위기 맞춰주느라 새벽까지 룸살롱에서 ‘양폭’을 마셔요. 절대 취하면 안 돼요. 인사불성된 사람들 다 택시 태워 보내고 집에 돌아옵니다. 새벽 2시쯤 되는데 잠시 눈 붙이고 5시 반에 또 일어나 출근 준비하죠. 좀 힘들긴 하지만, 먼저 집에 가거나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요. 주5일 근무제를 하지만, 난 거의 격주로 토요일은 출근해요. 다음주 월요일에 일할 거 미리 준비하면 마음이 편하니까요. 주말 이틀씩 꼬박 챙겨서 쉬면 불안해지더라고요.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의 유형은 두가지예요. 기본적으로 외국계 회사는 복지가 좋잖아요. 인사평가나 승진에 목 안 매고 적당히 일하면서 자기 취미생활 챙기는 유형이 있어요. 또 하나는, 높은 직급까지 올라가려는 성취욕이 강한 사람들. 이 비율이 보통 7:3 정도입니다. 전 3에 속하는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성취욕이 강하냐고요? 글쎄요, 원래부터 그런 성격이긴 했어요. 하지만 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내 나이대 직장인들 대체로 그런 것 아닌가요. 현재 내 연봉은 4500만원 정도예요. 같은 나이대의 다른 직원들과 비교하면 얼추 비슷한 것 같아요. 입사가 늦은 것치고는 성과가 있죠. 그게 다 지금까지 한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마흔 되기 전에 연봉 1억원 가까이 받는 게 목표예요.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건 아니에요. 시장에서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평가의 기준이 돈이잖아요. 제 시장가액을 높여야 다른 회사에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될 수 있고, 또 이 회사에서 승진할 수도 있고, 기회가 되면 내 회사를 차릴 수도 있는 거죠. 특별히 정해놓은 방향은 없어요. 일단 마흔 전에 최대한 내 시장가치를 끌어올려 제대로 평가받자는 거예요.
언젠가는 저도 이 업계에서 아웃되겠죠. 45살이 될지 50살이 될지 모르죠. 회사에서 퇴직 직전에 재취업 훈련 프로그램 받는 상사들 보면 내 미래도 갑갑해요. 퇴직한 뒤 편히 살고 싶어요. 당연한 바람이죠. 그 생활을 보장받으려면 지금 여기서 열심히 일해야죠. 돈 없는데 편히 살 수 있겠습니까.
내 내면엔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있는 것 같아요. 한번 인정받으니 계속 앞서나가고 싶다는 욕망도 있고요. 가끔씩 그게 스트레스일 때가 있지만, 그냥 친구들 만나 인생 얘기 들으면서 풀죠. 다들 비슷비슷하게 사는 거 보고 위로를 얻어요.
물론 가족들이 걱정해요. 일이 안 끝나면 집안 제사도 참석 안 하거든요. 어머니는 “건강 챙겨라,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하지만, 지금이 일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 투자하려면 지금 할 수밖에 없다고 해요. 하지만 딜레마가 있어요. 지금은 사회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이런 내 삶에 만족해요. 어느 정도 성과도 내고 있어 행복하다고 할 수도 있죠. 다만 나와 같이 평생을 살 동반자가 이런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이에요. 그래서 아직 결혼을 못하는 것인가 싶기도 해요.
누구는 그래요. 일 좀 줄이고 돈 좀 적게 받고 그냥 여유롭게 살라고 하죠. 하지만 그건 배부른 소리예요. 우리 세대 직장인들이 지금 개처럼 일하는 이유가, 다른 걸 버리고 돈을 택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봐요.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 그렇지 않아요. 지금 제 연봉에서 천만원 줄이면 일 적게 할 것 같나요? 아니에요. 이 회사 전에 다니던 중소기업에선 2500만원 받고 일했어요. 그때도 지금과 똑같이 일했어요. 대안적인 삶은 동화책에나 나오는 삶 같아요. 아 물론 3500만원 받으며 적당히 일하고 안 잘리는 회사 있다면 그리로 가겠죠. 근데 그런 게 없다니까요. 알고 보면 난 워커홀릭 아니에요. 지금 시장이 요구하는 만큼 일하는 것뿐이라고요.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적당히 일하고
안 잘리는 회사 있다면
그리로 가겠죠 근데 그런 게 없다니까요
난 워커홀릭 아니에요
지금 시장이 요구하는 만큼
일하는 것뿐이라고요 다만 평생 살 동반자가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결혼 못하는 건가 전화를 못 받아 미안해요. 긴급회의가 있어 주말 내내 전국 지사 몇 곳을 돌았어요. 폰 배터리가 1% 남아 업무 외 전화를 받을 수 없었어요. 무슨 출장이냐고요? 지난 3월부터 미국과 체결한 에프티에이가 발효됐잖아요. 그 후속 조처로 다음달부터는 한국으로 들어오는 화물에 대해 미국이 증빙서류를 발급해주는 규정이 생겨요. 얼마 전 회사에서 그걸 확인하는 시스템을 갖췄는데, 각 지사가 잘 운영하는지 알아보러 간 거죠. 전 외국계 무역회사에서 수출 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김동현(가명·35)이라고 합니다. 직급은 팀장이고요. 올해 초 팀장으로 승진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를 겁니다. 중소기업에 다니다 3년 전 남들보다 늦은 32살에 이 회사에 입사했어요. 남들 따라잡으려고 미친 듯이 일했죠. 아침 9시 출근인데, 전 주로 8시까지 도착했어요. 항상 준비가 돼 있으면 실수도 적게 하는 법이거든요. 퇴근은 매일 밤 11시였어요. 그땐 부서가 새로 생겼을 때라, 나 혼자 일을 다 했어요. 사람 한 명을 더 달라는 말은 안 했어요. 저한테 일이 주어지면 일단 다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에요. 3년 만에 팀장이 됐죠. 늦은 편은 아닌 것 같아요. 팀장 되면 편해질 줄 알았더니 역시 아침 8시까지 출근해야 하더군요. 협력업체들이 모두 업무를 8시에 시작해요. 일찍 나와서 회사가 주문한 일을 업체가 잘 처리하는지 확인해요. 타이로 보내라고 한 물건이 베트남으로 발송되는 일은 없는지 체크하는 거죠. 사원들 업무 지시할 것도 챙기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요. 아, 물론 9시에 출근해도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에요. 정시에 오는 팀장도 있죠. 그러나 조금 더 원활하게 일하려면 아무래도 빨리 출근하는 게 좋겠죠.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부서에서 제가 항상 제일 먼저 회사에 도착하는 편입니다. 대신 퇴근은 좀 빨라졌어요. 약속이 있으면 저녁 7시에도 나가요. 주로 거래처 사람들과의 약속인데, 우리 회사가 ‘갑’일 때도 있고 ‘을’일 때도 있죠. 을일 땐 상대방 분위기 맞춰주느라 새벽까지 룸살롱에서 ‘양폭’을 마셔요. 절대 취하면 안 돼요. 인사불성된 사람들 다 택시 태워 보내고 집에 돌아옵니다. 새벽 2시쯤 되는데 잠시 눈 붙이고 5시 반에 또 일어나 출근 준비하죠. 좀 힘들긴 하지만, 먼저 집에 가거나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요. 주5일 근무제를 하지만, 난 거의 격주로 토요일은 출근해요. 다음주 월요일에 일할 거 미리 준비하면 마음이 편하니까요. 주말 이틀씩 꼬박 챙겨서 쉬면 불안해지더라고요.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의 유형은 두가지예요. 기본적으로 외국계 회사는 복지가 좋잖아요. 인사평가나 승진에 목 안 매고 적당히 일하면서 자기 취미생활 챙기는 유형이 있어요. 또 하나는, 높은 직급까지 올라가려는 성취욕이 강한 사람들. 이 비율이 보통 7:3 정도입니다. 전 3에 속하는 것 같아요.
마포구 한 건물앞의 직장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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