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시사다큐 ‘한큐’]③ <1부> 파주 오현 마을
군 사격훈련장 확장에 뿌리 뽑힐 ‘시한부 삶’
28년 전 쫓겨나 옮겨왔다 또다시 ‘유배길’도
군 사격훈련장 확장에 뿌리 뽑힐 ‘시한부 삶’
28년 전 쫓겨나 옮겨왔다 또다시 ‘유배길’도
한겨레 시사다큐 <한큐>가 ‘큐!’했습니다.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뉴스의 현장과 진솔한 삶의 현장으로 카메라가 출동합니다. ‘사회와 사람’이 묻어나는 영상으로 우리들의 ‘오늘’을 요모조모, 촘촘하게 비춰드리겠습니다. <한큐>는 매주 화요일 10시 <인터넷한겨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한큐> ③자기 땅을 ‘사격’ 당한 오현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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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두텁고 바싹바싹한 가을햇살에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들녘. 분홍색, 하얀색 꽃잎이 수줍게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여느 농촌의 가을 풍경 그대로 다. 지난 10일 찾은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오현리의 첫인상은 그렇게 정겨웠다.
그러나 멀리서 본 모습과 달리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분위기가 심상찮다. 마을 어귀를 비롯한 곳곳에 “묵묵히 살아온 30년 보상이 훈련장이냐”, “고통의 30년 정부는 보상하라” 등의 펼침천이 걸렸다. 마을 앞 공터에는 경찰버스가 서 있고, ‘쾅쾅’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평화로운 일상과 팽팽한 긴장이 교차하고 있었다.
오현 마을에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1박2일을 함께 하면서 한적한 시골마을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의 정체를 추적해 보았다.
아침 9시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실랑이 “여기에 뼈를 묻어야 하는데…. 여기가 좋은데 자꾸 나가라고 하니까 걱정이지.” 새벽에 내린 이슬이 채 가시기도 전인 오전 9시30분, 마을 어귀 직천2교 앞이 소란하다.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더니,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유행가 소리가 조용한 마을을 깨운다. 백발이 성성한 김임순(81) 할머니는 건장한 젊은 사내들이 마을 이곳저곳을 측량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한숨만 쉬었다. 국방부가 오현리 마을과 인접해 있는 무건리 훈련장을 확장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12년 전인 1996년의 일이다. 군사지역이지만 마을 전체가 군과 마찰을 빚을 일은 거의 드물었다. 그러나 훈련장 확장은 마을 사람 모두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훈련장 확장 계획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구체화되었다. 군이 지난해 11월12일 오현리, 갈곡리 일대 1223m²(370만평)를 매입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마을은 술렁였다. 경기도가 지난 7월10일 관보에 국방부 장관이 요청한 ‘무건리 훈련장 확장사업 실시계획 승인고시’를 게재하면서부터는 마을은 들끓기 시작했다. 두 달 뒤 9월, 군이 한국토지공사에 감정평가를 의뢰하자 마을은 발칵 뒤집혔다. 오현리 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은 곧바로 <무건리 훈련장 확장 저지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만들어 국방부에 맞섰다. 이때부터 한국토지공사 직원들이 마을의 토지와 건물에 대한 감정평가를 벌이고, 주민들은 이를 감시하는 일이 날마다 반복되고 있다. 양쪽의 실랑이가 잦아지면서 사복 전경 7~8명이 감정평가 작업을 ‘보호’했다. 이처럼 주민과 군·경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오현리의 평화는 깨졌다. 트럭에서 감정평가를 지켜보던 전창준(50)씨는 “여름내 농사지었던 것들을 거둬들여야 하는데 지금 이것이 뭐 하는 짓이냐”며 “왜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쫓아와서 부득부득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다”고 역정을 냈다. “법이 필요 없는 그런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어” “법이 필요 없었다니깐…. 그렇게 착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살았던 동네야. 그런 마을을 국방부에서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어.” 밭에서 깨를 베던 이형우씨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군부대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이씨는 오현리에서 12대째 산 토박이 중의 토박이다. 조상 대대로 어림잡아 360년을 살아온 터전이다. 이씨는 “360년을 산 곳을 떠날 수 있겠어”라며 말문을 잇지 못한다. 양돈을 하는 서경자(50)씨도 떠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자식같이 키운다”는 돼지들은 서씨의 든든한 삶의 기반이다. 서씨는 “여기서 자리 잡느라 애 아빠는 20년 동안 청춘을 바쳤다”며 한숨을 지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한겨레> 취재진을 만나 “효율적인 훈련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며 “국가 안보라는 대명제 아래 훈련장 확장이 진행되는 것이고, 내년 말까지 합의 매수가 통하지 않으면 최종적으로 강제 매입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목민처럼 자기 땅에서 ‘유배’당해 또다시 떠돌 처지에 놓인 주민들도 있다. 윤병설(54)씨는 1980년 8월 무건리 일대에 1157m²(350만평) 규모의 훈련장이 들어설 때, 고향인 직천리에서 쫓겨난 550여명 중 한 명이었다. 윤씨는 인근 오현리로 옮겨와 30년 가까이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는 다시 한번 고향을 떠나야할 처지에 놓였다. 윤씨는 “속상해서 잠도 오지 않는다. 두 번씩이나 고향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이라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다. 윤씨처럼 직천리에서 쫓겨나 오현리에 정착한 사람들 중 남아 있는 집은 2가구가 더 있었다. 윤씨는 30여년전 고통스러웠던 이주의 기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두 집씩 헐릴 때마다 사람 사는 집으로 쥐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어. 나중엔 정말 끔찍하더라. 이제 우리가 또 옮겨야 하니깐 그런 삭막한 시절을 또 보내야 하는 거야.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니깐.”
아내와 아들 딸과 함께 일가족이 모두 연행되기도 주민들이 떠나지 못하는 것은 고향에 대한 애착 때문만은 아니다. 고향을 떠나면 살아갈 대책이 막막하다. 국방부가 추진하는 보상과 이주계획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96년 국방부의 훈련장 확장 계획 발표 뒤, 오현리 일대가 군사 시설로 묶이면서 땅값은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현재의 공시지가대로 보상을 받으면 주변 지역에 정착할 곳이 없다. 소를 키우며 아흔 살 노모를 돌보고 있는 심문기(58)씨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심씨는 “근처 효천리와 갈곡리는 땅값이 3.3m²(1평당)에 50~100만원 하는데 오현리는 15만원 안팎에 팔린다”며 “보상을 받아도 갈 곳이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주변 부동산 업자들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법원읍의 한 부동산 주인은 “오현리 사람들 진짜 안됐다”며 “다른 지역에 비해 땅값이 절반도 되지 않으니 보상 받고 외지 나가봐야 예전보다 훨씬 힘들게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답답한 주민들의 속내는 감정평가단이나 군인들과 충돌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지난달 16일 국방부가 경찰을 동원해 감정평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이 과정에서 주민 7명이 업무집행 방해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마을 주민들은 그날 저녁 연행에 항의하려고 파주경찰서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는데, 불법 집회를 벌였다는 죄로 또다시 29명이 무더기로 연행됐다. 이 과정에서 전창준(50)씨는 아내와 아들, 딸 등 일가족 4명이 한꺼번에 연행되는 일도 벌어졌다. 전씨의 딸 혜림(18·율곡고 3년)양은 “아빠가 연행돼서 풀어달라고 호소했을 뿐인데 나까지 또 연행해 황당했다”며 “군은 물론 경찰들의 만행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도 주민들과 군이 충돌할 뻔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한 오후 3시. 오현2리에서 감정작업을 벌이던 1군단 무건리사업단장 오세일 중령과 이를 지켜보던 주민 서경자(50)씨 사이에 입씨름이 벌어졌다. 서씨는 감정평가를 끝내고 돌아가던 오 중령의 차를 가로막으며 “주민들이 매일 밤 열고 있는 촛불집회에 한 번만 찾아와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 중령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음이 꽉 막힌 사람들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고 외면했다. 사복 전경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이들의 입씨름을 지켜봤다. 5분 후 오 중령은 “시간을 내 한번 찾아보겠다”고 말하고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오 중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주민들은 없어 보였다. 감정평가에 응하는 가구도 하나둘씩 늘어
오현리 주민들 대다수가 이주에 반대하고 있지만 감정평가에 응하는 가구도 하나둘씩 늘고 있다. 공대위에 따르면 이주대상 110여 가구 중 이주에 동의한 가구는 3가구에 불과하지만, 지난 10일까지 30여 가구가 감정평가에 응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감정평가에 응한 주민들도 뾰족한 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슈퍼마켓 주인은 “군 간부출신인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해” 감정평가를 받았고, 피난민 출신인 김아무개(79)씨는 “국가에서 하는 일을 어떻게 막겠느냐”며 고집을 꺾었다. 김씨는 “북에서 내려와 이곳에 정착해 살아왔는데 여기를 떠나야 한다니 안타깝다”며 한숨을 쉬었다. 김씨의 눈가에 깊게 패인 주름이 그의 말 못할 시름을 대신하는 듯했다.
어둠이 깔리기 전 군 부대의 사격이 끝나는 틈을 타 무건리 훈련장 주변을 둘러봤다. 곳곳에 사격과 폭격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산 중턱에는 포탄 자국으로 붉은 속살이 선연했고, 군인들이 소총 사격을 한 ‘인민군 표지판’들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주민들이 살았던 마을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람이 다니던 길은 전차의 바퀴자국만 어지러웠다. 전쟁이 끝난 지 60 년이 다 되었지만 무건리 훈련장은 여전히 전쟁의 상처에 신음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곳이 오현리의 미래”라며 “끔찍하다”고 혀를 찼다. 천연기념물 286호로 지정된 무건리 훈련장 안의 물푸레나무는 먼지 낀 잎사귀를 달고, 묵묵히 무건리의 상처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이름 적은 ‘나무 묘비’ 앞세우고 국방부 앞 시위 저녁 8시. 아침에 직천교에서 만났던 주민들이 옛 직천초등학교 교실에 모였다. 주민들 손에는 촛불이 들려 있었다. 낡은 칠판에는 ‘무건리 훈련장 확장을 반대하는 71차 촛불문화제’라는 알림판이 붙었다. 서울 도심의 촛불집회처럼 주민들은 구호를 외치고, 훈련장 확장 반대를 주제로 연설을 했다. 주병준 무건리 훈련장 확장반대 주민대책 위원장은 “이 땅을 지키는 게 한반도를 지키는 일”이라며 “지금까지 잘 되고 있으니 우리 손으로 마을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칠판에는 노란 분필로 ‘질긴 놈이 이긴다’고 쓰여 있다. 소박하지만 주민들의 결의가 느껴진다. 다음날인 11일 오현리 주민과 시민단체 회원 등 3백여명이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무건리 사격장 확장반대 1차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상경한 오현1, 2리 주민들 40여 명이 맨 앞에 섰다. ‘오현리에 뼈를 묻겠다’는 백발의 할머니부터 난생 처음 경찰서에 잡혀간 고등학생까지 무건리 훈련장 옆 오현리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집회장 앞에는 오현리 주민들의 이름이 적힌 나무 묘비 30개도 침묵시위를 벌였다. ‘죽어도 오현리에서 죽겠다’는 주민들의 ‘뜻’이 앞장을 선 것이다. 연출·영상 김도성 피디 kdspd@hani.co.kr
글 허재현 기자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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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법원읍 오현리 곳곳에는 무건리 훈련장 확장을 반대하는 펼침천이 곳곳에 걸려 있다. (촬영화면 캡처. 김도성 피디)
아침 9시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실랑이 “여기에 뼈를 묻어야 하는데…. 여기가 좋은데 자꾸 나가라고 하니까 걱정이지.” 새벽에 내린 이슬이 채 가시기도 전인 오전 9시30분, 마을 어귀 직천2교 앞이 소란하다.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더니,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유행가 소리가 조용한 마을을 깨운다. 백발이 성성한 김임순(81) 할머니는 건장한 젊은 사내들이 마을 이곳저곳을 측량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한숨만 쉬었다. 국방부가 오현리 마을과 인접해 있는 무건리 훈련장을 확장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12년 전인 1996년의 일이다. 군사지역이지만 마을 전체가 군과 마찰을 빚을 일은 거의 드물었다. 그러나 훈련장 확장은 마을 사람 모두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훈련장 확장 계획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구체화되었다. 군이 지난해 11월12일 오현리, 갈곡리 일대 1223m²(370만평)를 매입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마을은 술렁였다. 경기도가 지난 7월10일 관보에 국방부 장관이 요청한 ‘무건리 훈련장 확장사업 실시계획 승인고시’를 게재하면서부터는 마을은 들끓기 시작했다. 두 달 뒤 9월, 군이 한국토지공사에 감정평가를 의뢰하자 마을은 발칵 뒤집혔다. 오현리 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은 곧바로 <무건리 훈련장 확장 저지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만들어 국방부에 맞섰다. 이때부터 한국토지공사 직원들이 마을의 토지와 건물에 대한 감정평가를 벌이고, 주민들은 이를 감시하는 일이 날마다 반복되고 있다. 양쪽의 실랑이가 잦아지면서 사복 전경 7~8명이 감정평가 작업을 ‘보호’했다. 이처럼 주민과 군·경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오현리의 평화는 깨졌다. 트럭에서 감정평가를 지켜보던 전창준(50)씨는 “여름내 농사지었던 것들을 거둬들여야 하는데 지금 이것이 뭐 하는 짓이냐”며 “왜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쫓아와서 부득부득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다”고 역정을 냈다. “법이 필요 없는 그런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어” “법이 필요 없었다니깐…. 그렇게 착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살았던 동네야. 그런 마을을 국방부에서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어.” 밭에서 깨를 베던 이형우씨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군부대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이씨는 오현리에서 12대째 산 토박이 중의 토박이다. 조상 대대로 어림잡아 360년을 살아온 터전이다. 이씨는 “360년을 산 곳을 떠날 수 있겠어”라며 말문을 잇지 못한다. 양돈을 하는 서경자(50)씨도 떠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자식같이 키운다”는 돼지들은 서씨의 든든한 삶의 기반이다. 서씨는 “여기서 자리 잡느라 애 아빠는 20년 동안 청춘을 바쳤다”며 한숨을 지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한겨레> 취재진을 만나 “효율적인 훈련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며 “국가 안보라는 대명제 아래 훈련장 확장이 진행되는 것이고, 내년 말까지 합의 매수가 통하지 않으면 최종적으로 강제 매입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목민처럼 자기 땅에서 ‘유배’당해 또다시 떠돌 처지에 놓인 주민들도 있다. 윤병설(54)씨는 1980년 8월 무건리 일대에 1157m²(350만평) 규모의 훈련장이 들어설 때, 고향인 직천리에서 쫓겨난 550여명 중 한 명이었다. 윤씨는 인근 오현리로 옮겨와 30년 가까이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는 다시 한번 고향을 떠나야할 처지에 놓였다. 윤씨는 “속상해서 잠도 오지 않는다. 두 번씩이나 고향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이라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다. 윤씨처럼 직천리에서 쫓겨나 오현리에 정착한 사람들 중 남아 있는 집은 2가구가 더 있었다. 윤씨는 30여년전 고통스러웠던 이주의 기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두 집씩 헐릴 때마다 사람 사는 집으로 쥐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어. 나중엔 정말 끔찍하더라. 이제 우리가 또 옮겨야 하니깐 그런 삭막한 시절을 또 보내야 하는 거야.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니깐.”
오현리 주민들이 지난 11일 국방부 앞 집회를 마치고 행진을 하고 있다. 나이든 할머니부터 어린 학생까지 행진에 참여했다. (촬영화면 캡처. 김도성 피디)
아내와 아들 딸과 함께 일가족이 모두 연행되기도 주민들이 떠나지 못하는 것은 고향에 대한 애착 때문만은 아니다. 고향을 떠나면 살아갈 대책이 막막하다. 국방부가 추진하는 보상과 이주계획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96년 국방부의 훈련장 확장 계획 발표 뒤, 오현리 일대가 군사 시설로 묶이면서 땅값은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현재의 공시지가대로 보상을 받으면 주변 지역에 정착할 곳이 없다. 소를 키우며 아흔 살 노모를 돌보고 있는 심문기(58)씨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심씨는 “근처 효천리와 갈곡리는 땅값이 3.3m²(1평당)에 50~100만원 하는데 오현리는 15만원 안팎에 팔린다”며 “보상을 받아도 갈 곳이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주변 부동산 업자들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법원읍의 한 부동산 주인은 “오현리 사람들 진짜 안됐다”며 “다른 지역에 비해 땅값이 절반도 되지 않으니 보상 받고 외지 나가봐야 예전보다 훨씬 힘들게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답답한 주민들의 속내는 감정평가단이나 군인들과 충돌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지난달 16일 국방부가 경찰을 동원해 감정평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이 과정에서 주민 7명이 업무집행 방해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마을 주민들은 그날 저녁 연행에 항의하려고 파주경찰서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는데, 불법 집회를 벌였다는 죄로 또다시 29명이 무더기로 연행됐다. 이 과정에서 전창준(50)씨는 아내와 아들, 딸 등 일가족 4명이 한꺼번에 연행되는 일도 벌어졌다. 전씨의 딸 혜림(18·율곡고 3년)양은 “아빠가 연행돼서 풀어달라고 호소했을 뿐인데 나까지 또 연행해 황당했다”며 “군은 물론 경찰들의 만행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도 주민들과 군이 충돌할 뻔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한 오후 3시. 오현2리에서 감정작업을 벌이던 1군단 무건리사업단장 오세일 중령과 이를 지켜보던 주민 서경자(50)씨 사이에 입씨름이 벌어졌다. 서씨는 감정평가를 끝내고 돌아가던 오 중령의 차를 가로막으며 “주민들이 매일 밤 열고 있는 촛불집회에 한 번만 찾아와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 중령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음이 꽉 막힌 사람들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고 외면했다. 사복 전경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이들의 입씨름을 지켜봤다. 5분 후 오 중령은 “시간을 내 한번 찾아보겠다”고 말하고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오 중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주민들은 없어 보였다. 감정평가에 응하는 가구도 하나둘씩 늘어
무건리 훈련장 관련 지도. 노란 부분은 현재의 훈련장. 하얀 부분은 현재 주민 거주지로서 훈련장 흡수 통합 예정지. 가운데 부분의 하얀 지역이 법원읍 오현리다.
![지난 9월4일 오현리 주민들이 서울 국방부 앞에 가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지난 9월4일 오현리 주민들이 서울 국방부 앞에 가서 규탄대회를 열었다.](http://img.hani.co.kr/imgdb/resize/2008/0912/122118144879_20080912.jpg)
지난 9월4일 오현리 주민들이 서울 국방부 앞에 가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자신들의 이름 적은 ‘나무 묘비’ 앞세우고 국방부 앞 시위 저녁 8시. 아침에 직천교에서 만났던 주민들이 옛 직천초등학교 교실에 모였다. 주민들 손에는 촛불이 들려 있었다. 낡은 칠판에는 ‘무건리 훈련장 확장을 반대하는 71차 촛불문화제’라는 알림판이 붙었다. 서울 도심의 촛불집회처럼 주민들은 구호를 외치고, 훈련장 확장 반대를 주제로 연설을 했다. 주병준 무건리 훈련장 확장반대 주민대책 위원장은 “이 땅을 지키는 게 한반도를 지키는 일”이라며 “지금까지 잘 되고 있으니 우리 손으로 마을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칠판에는 노란 분필로 ‘질긴 놈이 이긴다’고 쓰여 있다. 소박하지만 주민들의 결의가 느껴진다. 다음날인 11일 오현리 주민과 시민단체 회원 등 3백여명이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무건리 사격장 확장반대 1차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상경한 오현1, 2리 주민들 40여 명이 맨 앞에 섰다. ‘오현리에 뼈를 묻겠다’는 백발의 할머니부터 난생 처음 경찰서에 잡혀간 고등학생까지 무건리 훈련장 옆 오현리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집회장 앞에는 오현리 주민들의 이름이 적힌 나무 묘비 30개도 침묵시위를 벌였다. ‘죽어도 오현리에서 죽겠다’는 주민들의 ‘뜻’이 앞장을 선 것이다. 연출·영상 김도성 피디 kdspd@hani.co.kr
글 허재현 기자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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