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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생활밀착 풀뿌리’가 지역사회 큰 뿌리로

등록 2008-10-02 21:58수정 2008-10-17 17:55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 단체 회원들이 도쿄 국회의사당 앞 길에서 전쟁에 의한 환경 피해를 고발하는 내용의 펼침막을 걸어놓은 채 미군기지 반대 이유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다. 오키나와에서 온 이들은 1000일이 넘도록 거리홍보를 계속하고 있다.  도쿄/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 단체 회원들이 도쿄 국회의사당 앞 길에서 전쟁에 의한 환경 피해를 고발하는 내용의 펼침막을 걸어놓은 채 미군기지 반대 이유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다. 오키나와에서 온 이들은 1000일이 넘도록 거리홍보를 계속하고 있다. 도쿄/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진화하는 세계의 진보] 4. 일본
시민단체 회원들 대거 지방의회 진출
일본 전역 생협 조합원수 31만명 넘어
집단논리 버리고 개개인 수평적 연결

다소 따갑게 느껴지는 6월 말의 햇볕 속에서 일본 도쿄 중심가의 국회의사당 옆에 7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선전물을 나눠주느라 바쁜 손길을 놀리고 있었다. 1000일이 넘게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마리 하토리다. “젊은이들은 생업때문에 여기까지 오지 못해, 나이 든 우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며 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날 도쿄 신주쿠역 앞에는 60살이 넘는 노인들 100여명이 손팻말과 확성기를 들고, 올해 도입된 75살 이상 후기고령자의료보험제도를 폐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동안 이들 세대는 자녀의 부양가족으로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올해 법이 바뀌면서 자기 부담으로 보험료를 내야만 된다. 시위대에 활력이 넘지도 않았고, 시민들의 관심도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10대부터 60대까지 재기발랄함으로 무장한 수만여명의 시민들이 광화문 네거리를 가득 메운 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던 한국의 촛불시위에 견줘보면 초라함마저 느껴졌다.

언뜻 보면 일본 시민사회 운동에서 젊음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고갱이마저 활력이 말라 버린 것은 아니다. ‘지역’과 ‘생활’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소리없이 강한’ 풀뿌리 주민운동이 곳곳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도쿄생활자네트워크는 대표적인 풀뿌리 시민단체로 꼽힌다.

도쿄생활자네트워크는 ‘정치는 생활의 일부’라며 자신들이 직접 ‘대리인’을 뽑아 지역의회에 출마시켜 주부는 물론 소외된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도쿄도 안에만 지부가 모두 32곳이나 된다. 나까무라 에이꼬 사무국장은 “선거비 마련을 위해 직접 모금을 하고, 주민들의 자원봉사로 선거운동을 한다”며 “도쿄생활자네트워크의 모태인 도쿄생협 조합원수는 7만여명이며, 일본 전역에 걸쳐 있는 다른 지역 생협 조합원까지 따지면 모두 31만여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일본 시민단체의, 지방정치를 중심으로 한 시민의 정치세력화는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일본 생협 가운데 하나인 생활클럽생협을 모체로 만들어진 생활자네트워크도 2001년에는 무려 6명의 도의원을 배출했다. 현재 시구의회까지 합치면 모두 62명의 지방의원을 두고 있다. 웬만한 정당 수준이다. 나까무라 사무국장은 “생활 속에서 풀어야 할 문제를 기존 정당이 해결할 수 없다. 생활자 중의 한사람이 대리인이 돼 생활 속의 문제를 직접 풀어야 한다”며 “‘생활자’라는 개념을 쓰게 된 건 소비만 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일하고 공부하고 노는 일생생활 속에서 의식적으로 생활의 바람직한 상태를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우리사회에서 풀뿌리 운동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건 2000년 이후이지만, 일본은 40여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왜 일본 진보세력은 지역에 눈을 돌리게 됐을까? 그들에겐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계기는 1960년 일본이 미국 주도의 냉전에 가담하는 미일상호방위조약 개정에 반대해 일어난 진보세력의 대규모 투쟁(안보투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싸움에서 진보세력은 패했고 정치적 좌절감에 휩싸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다.

하야시 야스오시 도쿄희망제작소 이사장은 “당시 활동가들은 시민을 이론으로 이끌어야 하는 존재로 봤고, 무엇보다 과격한 운동방식으로 시민들의 신뢰를 잃게 됐다”며 “결국 시민과 함께 하는 활동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지역에 눈을 돌리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직접 지역에 들어가 보니 지역 사회 안에 다양한 기능과 그 나름의 해결방식이 있다는 걸 깨닫고 믿게 됐다”고 덧붙였다.

지역에 터를 잡으면서 운동의 목표도 국가권력이 아닌 지역사회 변화에 두게 됐다. 주민운동을 통해 시민의식이 형성되자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 해결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특히 독특한 일본식 시민운동으로 전세계적으로 가장 활동이 왕성한 ‘생활협동조합(생협)’은 환경운동, 전통 부활, 소득 향상 등을 위한 자생적 지역운동을 벌여 나갔다. 쓰레기 재활용, 폐식용유를 이용한 비누 만들기, 유기농 식품 사용, 공해물질을 생산하는 제품 사용하지 않기 등의 생활운동은 물론 ‘마찌즈쿠리’(지역 만들기) 등 각 지역의 특성을 살리고 생활환경을 바꾸는 운동이다. 생활의 문제에 전착하되, 결코 ‘탈정치적’이지 않게 방향을 잡아나간 것이다.

일본 시민운동이 개인들을 수평적으로 연결하는 네트워크 방식의 운동방식을 특성으로 하는 것도 이른바 ‘민주집중제’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비롯됐다. 공산당·사회당 등 진보(혁신)세력의 주요 활동방식이던 이른바 민주집중제는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개인이 동원되고 개인은 집단의 논리에 종속된다.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개개인이 지닌 역량과 힘을 모아 참여자가 되게 함으로써 사회적 문제를 해결한다는 일본 시민운동의 원칙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일본 시민운동을 두고, 한편에선 지역에만 매몰돼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는 않다. 일본 정치와 사회변화를 지체시키는 체제유지적 역기능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나일경 일본 주쿄대 교수는 다른 견해를 펼쳤다. 나 교수는 “2004년 한국의 낙선운동을 보면서 일본 시민운동은 스스로가 얼마나 왜소한지 느끼게 됐지만, 지방정부 수준에서 보면 일본 시민운동의 영향력은 (한국에 견줘) 압도적”이라고 분석한다. 일본에 비해 한국이 정치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많겠지만, 지역사회에 뿌리를 둔 시민단체의 성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본이 시민사회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지 적극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까무라 사무국장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의 목표는 한사람 한사람이 ‘자치’하는 시민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정치를 하고 결정까지도 책임지는 그런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게 이념이자 목표이다.”

도쿄/이재명 기자, 나고야/오태규 기자

miso@hani.co.kr


나카무라 에이코 도쿄 생활자연합 사무국장(앞)이 도쿄 신주쿠 가부키조에 있는 사무실에서 책상 앞에 “생활자를 보호하자”는 홍보 깃발을 걸어놓은 채 업무를 보고 있다.  도쿄/강재훈 선임기자
나카무라 에이코 도쿄 생활자연합 사무국장(앞)이 도쿄 신주쿠 가부키조에 있는 사무실에서 책상 앞에 “생활자를 보호하자”는 홍보 깃발을 걸어놓은 채 업무를 보고 있다. 도쿄/강재훈 선임기자

60~70대가 시민운동 주류
“한국 젊은 활동가 부러워”

시민단체 누가 이끄나

일본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한국 시민운동에서 가장 부러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젊은 활동가’들이다. 20~30대의 한국 상근 활동가들을 보면서 그들은 일찍 시들어버린 일본 시민사회운동의 활력을 추억한다.

현재 일본 시민사회단체를 이끌고 있는 주요세대는 60대, 70대다. 일본 학생운동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안보투쟁을 했던 ‘안보세대’, 1968년을 정점으로 활발했던 전학공투회의(전공투)에 참여했던 ‘전공투 세대’의 지도자들이다. 투쟁의 실패는 이들을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중앙정치에 실망해 지방도시로 ‘하방’을 자청했던 이들도 적지 않다. 1970~80년대 일본 시민운동, 지역주민운동을 주도했던 것이 바로 이들이다. 생협의 ‘대리인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들도 이 세대들이고, 그 이후에는 이들이 키워낸 활동가들이 핵심 구실을 하고 있다.

평생을 운동에 헌신해온만큼 이들의 전문적 지식과 경험은 일본 시민사회운동의 큰 자산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고단함도 느껴진다. 한국 역시 최근 들어 활동가 재생산에 빨간등이 켜졌지만, 일본의 고민은 우리보다 훨씬 깊어 보였다.

나까무라 에이코 도쿄생활자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주요 활동가들이 나이를 먹고 장기간 활동하다보니 힘이 자꾸 빠진다”며 “조직에 활력을 넣기 위해서라도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대리인 운동’의 후보자를 뽑는 것도, 이들의 선거운동을 지원해 줄 회원도 구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특히 정치에 대한 젊은층의 불만과 무관심이 워낙 커 참여자체를 꺼린다고 아쉬워했다. 급여수준을 묻자 “혼자 사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답했다. 박봉이라는 얘기다.

사다토 오카와라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민의련) 사무처장도 2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32년동안 활동가로 일해야만 했다. 활동가도 활동가지만 “민의련 소속 병원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젊은 의대생이 없어 고민이 깊다”고 그는 말했다. 일반 회원들은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특히 복지 관련 사회단체들은 중산층 주부, 여성들이 70~80%를 차지한다. 반면 중산층 이상의 고학력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운동을 두고 가진자들의 정치운동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다.

도쿄/이재명 기자 mi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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