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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죄는 타인의 신체를 동의 없이 불법으로 촬영했다는 것이다. 그의 범죄 기록에는 각종 거짓말로 여성들의 환심을 산 뒤 그녀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신체를 몰래 촬영했다고 적혀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찍은 불법 촬영물이라….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그것이 가능할 수는 있다. 어차피 촬영은 기기가 하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왜? 스스로 볼 수 없는 자가 타인의 신체를 몰래 찍어 취하려는 욕망은 무엇인가? 공판검사인 나는 언뜻 모순이 가득해 보이는 공판카드를 받아들고 이것은 마치 풀기 어려운 선문답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눈이 보인다는 거죠.”
수사검사가 해답을 툭 던진다. 아하∼ 의외로 해답이 쉬운 것이어서 김이 좀 새려는 찰나 새로운 의문이 고개를 든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입증하지? 보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의 진실을, 그의 뇌를 스캔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입증한단 말인가. 근심이 가득한 내 앞에 수사검사는 “증거는 영상 안에 다 있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드디어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불법 성관계 동영상 촬영 사건의 첫 재판이 시작된 날, 나는 법정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검사석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법정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어두운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구나.’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아직 재판 시간이 되지 않은 법정에 누군가 있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거침없이 들어서다 검사석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는 우뚝 섰다. 그렇다. 그가 나를 ‘봤다’. 정확히 법정을 가로질러 대각선 지점에 앉아 있던 나를.
선글라스 너머로 서로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숙여 묵례를 했다. 그 순간 퍼뜩 상황 파악을 한 남자는 갑자기 팔을 앞으로 뻗으며 허공을 짚는 시늉을 했다. 문을 벌컥 열던 기세는 어디 가고 허방을 짚으며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자가 되었다.
뒤이어 화장실이라도 다녀온 듯 옷에 손을 닦으며 들어오던 활동보조인 여성의 팔을 그가 다급히 찾아 잡았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뒤늦게나마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있는 피고인에 비해 활동보조인의 연기는 다소 성의가 없어 보였다. 여성이 대충 남성의 팔을 끌고 의자에 앉혔다. 잠시 후 재판이 시작되기까지 나는 서류를 덮고 줄곧 그를 지켜봤다. 그는 그런 나의 시선을 인식하며 애써 피하느라 좀 불편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사건 번호가 호명되고 방청석에 있던 남자가 피고인석으로 이동하기까지 다시금 남자와 활동보조인의 길고 지루한 연기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판사라는 새 관중이 들어왔으므로 활동보조인 역도 정성을 다하는 듯 보였지만, 역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변호인의 얼굴에 짜증스러움이 묻어나는 걸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피고인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으로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우연히 피고인의 방에 설치된 방범용 카메라가 작동된 결과에 불과하다는 입장이군요.”
피고인의 입장을 확인하고 첫날의 재판은 금방 끝났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면서, 그가 법정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혼신의 연기로 법정 퇴장 장면까지 마친 피고인이 법정 문이 다 닫히기도 전에 성급하게 활동보조인의 팔을 뿌리치고 성큼 앞서 걸어가는 것을 문틈 사이로 볼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재판은 길게 이어졌다. 문제는 피해자가 법정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피고인이 쓰는 컴퓨터에서 문제의 동영상들을 발견한 피고인 처의 신고로 수사가 시작되었다.(그렇다. 그에게는 처도 있었다.) 피고인의 처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불륜녀를 잡겠다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피해자들은 꽁꽁 숨어버렸다. 나오지 않는 피해자를 기다리며 여러 기일이 그냥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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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성과 없이 장기화되다 보니 분위기가 다소 헐렁해졌다. 특히 매회 앞이 보이지 않는 연기를 해야 하는 피고인의 경우 집중력의 저하가 심한 것 같았다. 무심결에 두리번거리다가 눈이 마주치는 경우가 잦았고, 활동보조인 역을 맡은 사람과의 합도 자주 어그러져 빈틈을 보였다.
사실 그 무렵 법정의 모든 사람은 그가 앞을 멀쩡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공식적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무죄 추정의 법도가 지엄한 곳이 형사소송 판이다 보니 판결이 선고되기 전까지는 모두 함께 모르는 척하며 그의 발연기를 견디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재판이 끝나고 그의 지루한 퇴장 장면을 지켜보던 법정경위가 그만 인내심을 잃고 “아휴∼ 그냥 좀 빨리 나가요”라고 말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오지 않는 피해자 대신 영상증거물 조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영상물에 대한 증거조사는 영상을 법정에 설치된 큰 화면에 띄워 재생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시디(CD)를 재생하자 피고인의 전면에 설치되어 있는 커다란 화면 가득, 나체 상태인 중년 남성의 몸뚱이가 나타났다. 법정의 모두는 숨죽이고 영상을 봤다.
그곳은 어떤 방이었는데 각도상 카메라는 방 안 책상 위에 설치된 것 같다. 나체인 상태로 주요 부분을 수건으로 가린 남성이 뒤뚱뒤뚱 걸어 카메라에 다가선다. 카메라를 잡고 이리저리 돌려 초점을 맞춘다. 방의 한 지점과 카메라의 각도를 반복적으로 돌아보며 체크한다. 다음으로 능숙하게 벽장문을 열고 이불을 꺼내 카메라의 포커스가 떨어진 지점에 편다. 그리고 그 위에 비스듬히 눕는다.
이렇게 비유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에 나오는 아담의 포즈로 비스듬히 누워 카메라 방향을 지긋이 응시한다. 잠시 뒤 방금 몸을 씻은 듯한 여성이 나와 그에게로 다가간다. 카메라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무방비한 몸짓이다. 그런 그도 천지창조 스타일의 포즈를 보고 흠칫 놀란다. 이후는… 에휴, 생략하자.
다소 충격적인 영상을 직업적인 얼굴로 묵묵히 보던 판사가 묻는다.
“그러니까 이것이 ○○년 ○월○일, 피해자 ○○○씨에 대한 불법 촬영물이라는 거죠? 저기 나오는 여성이 ○○○씨라는 것은 피고인 측에서도 인정하는 건가요?”
변호인을 향해 물었을 것인데 피고인이 뭐라고 중얼중얼 말한다.
“피고인, 뭐라고요?” 판사가 다시 묻는다. 뭐라고 다시 중얼거리는데 알아듣기 어렵다.
“그러니까 피고인의 말은 저 여성이 ○○○은 맞는데 날짜가 그날이 아니랍니다, 저것은 두번째 만난 날 상황이라고….”
보다 못한 변호인이 대신 대답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
더 이상은 모르는 척할 도리가 없다는 듯 판사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나직이 말한다.
“피고인, 동영상이 보이는군요….”
대구지검 부장검사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 정명원이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과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