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화곡동의 한 은행 앞에서 상추와 고구마 줄기를 팔고 있는 한 노점상. 김가윤 기자
■ 우산 3개·얼음물로 좌판 지키는 82살
‘상추 3천원, 꼬시락나물 5천원.’
한낮 기온이 34도까지 치솟은 지난 1일 오후.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은행 앞에 좌판을 깐 김월예(82)씨가 고구마 줄기를 다듬고 있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5시간 동안 꼬박 김씨는 내리쬐는 볕을 막을 도리가 없어 장우산 2개와 단우산 1개로 몸 하나 숨길 그늘을 만들어 버텼다.
“횡단보도 앞 그늘막이 있는 곳은 ‘구청 땅’이라면서 못 있게 해요.” 김씨는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 스티로폼 하나만 깔고 앉아 있었다. 집에서 들고 왔다는 얼음물 2병은 이미 녹아 따뜻했다.
김씨는 “손녀딸이 대학원 시험에 합격해 돈이 많이 들어갈 텐데 집에 보탬이 되려고 나왔다”며 챙모자 아래 흐르는 땀을 닦았다.
지난 1일 영등포역 인근에 놓여 있는 손수레. 한낮 불볕 더위에 손수레의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박시은 교육연수생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는 가운데,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며 거리로 나온 노인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더위는 노인에게 더 가혹한 탓이다.
고령층은 땀 배출 등 체온을 조절하는 기능이 떨어지는 데다, 온열질환을 인지하는 기능도 젊은층보다 약화돼 있다. 2일 질병관리청 집계 기준, 올해 들어 발생한 온열질환자의 30%는 65살 이상 노인이고, 이로 인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16명 중 13명도 노인이었다.
■ 폐지 담은 손수레 옆 숨 고르는 74살
1일 오후 3시께 영등포구 영등포본동 골목에서 만난 김원화(74)씨는 폐지를 가득 담은 작은 손수레를 곁에 두고 한 시간 넘게 그늘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김씨는 “위험해도 밥을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어서 나왔다. 안 나오면 이만큼도 못 줍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죽을까봐’ 나오지 않는 동료들도 있다고 한다. 인근 고물상 채승관(72)씨는 “계절이나 날씨 상관 안 하고 온다. 더워도 생업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고물상 ㄱ(42)씨는 “하루에 30∼40명 정도 온다. 위험하니 오후에는 오지 말라고 해도 오는 분들이 있다”고 얘기했다.
청량리역 인근에 과일 노점상을 차린 ㄴ(78)씨는 허리를 붙잡은 채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오후 4시께 만난 ㄴ씨는 “허리가 아프고 병원비도 많이 나와서 뭐라도 팔려고 나왔다”며 “아침부터 나와서 팔릴 때까지 있으려고 하지만 잘 팔리진 않는다”고 말했다. 건강식품을 팔며 시장을 하염없이 돌아다니던 ㄷ(82)씨는 “이 나이에 어디서 일을 시켜주지 않으니 이거라도 팔려고 나왔다”고 토로했다.
2일 안양천에서 ‘노인 일자리’ 업무로 환경미화 활동을 하는 노인들. 김가윤 기자
■ 지자체 공영주차장 청소하는 77살
지방자치단체에서 제공하는 ‘노인 일자리’도 혹서기 야외 작업이 녹록지 않다. 2일 서울 은평구 응암동의 한 공영주차장에서 만난 이아무개(77)씨는 아침 9시부터 빠르게 청소를 시작했다. 모든 층의 바닥이 철로 이뤄진 탓에 시간이 지나면 공기가 뜨거워지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쉬는 곳이라곤 사무실 한군데지만 에어컨도 틀지 못하게 해 집에서 큰 선풍기를 가져와 틀어뒀다. 이씨는 “위(옥상)에 올라가면 오래 있지도 못해서 바로 내려와야 한다. 오전 11시가 되면 뜨거워서 있을 수도 없다”며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그나마 구청은 혹서기엔 오후 시간대 작업을 오전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오전부터 쏟아내리는 볕은 피할 수 없었다. 노인 일자리 중 하나로 안양천에서 환경미화 활동을 하는 주아무개(68)씨는 40분 연속 풀을 뽑고 오전 10시께 숨을 돌렸다. 하천 인근 나무들엔 잎이 없어 볕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주씨는 팔토시와 챙모자로 중무장한 채 허리를 최대한 숙여 볕을 막았다. 주씨는 “생활비를 벌려고 나와서 하고 있다”고 말한 뒤,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금세 먹고 다시 풀숲으로 향했다.
유재언 가천대 교수(사회복지학)는 “폭염엔 만성질환이 있는 노인들이 무리하게 야외에서 일하지 않도록 지침이 필요하고, 노인 일자리 사업도 여름철엔 실내 작업 위주로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일 서울 응암동의 한 공영주차장에서 ‘노인 일자리’ 업무로 청소를 하는 노인. 김우리사랑 교육연수생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김우리사랑 박시은 교육연수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