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큰한 밤이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열대의 밤을 닮았다. 열어둔 창 너머로 하천의 물소리가 거세다. 지난 날 내린 빗물들이 한꺼번에 흘러가는 소리다. 물은 내내 흘렀으나 아직 흘러야 할 역사가 많다는 듯 줄기차게 흐른다. 줄기찬 물소리를 한 귀로 들으며 지나온 날들을, 그리고 아직 못다 지나간 날들을 생각한다.
나는 검사로 18년째 일하고 있는 사람이다. 검사란 무엇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지나간 시간을 더듬어 진실 비슷한 것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과거를 품은 기록들은 언제나 현재적으로 내 책상 위에 있었고 그것들을 헤집어 공소장을 쓰고 누군가의 미래에 제약을 가하는 일을 하며 여기까지 왔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그런 방식으로 나의 업무 속에서 서로 연결돼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 모든 것을 감당하는 몸은 언제나 현재에 있었으므로 나는 늘 피곤했다. 또한 위태로웠다. 내가 애써 본 것들이 진실이 아닐까봐 겁이 나고 내가 하는 선택들이 잘못된 것일까 주저했다. 모든 망설임들이 무거운 얼굴로 잊히지도 않고 나의 퇴근가방에 들어 있었다.
‘사기꾼’ 의심했던 편집자를 만나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득한 두려움과 망설임들로 가방이 너무 무거워 무엇이라도 써내야 했다. 검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사람을 피의자나 피해자의 이름으로 마주할 때 어떤 마음이 되는지, 그래서 나의 일은 얼마만큼 위대하고 하찮은지 가만히 들여다보다 글로 옮겼다. 처음에는 혼자서 쓰고 혼자 읽었다. 그러다가 옆에 앉은, 나처럼 피곤하고 망설이는 얼굴을 한 동료들에게 보여줬다. 막간에 믹스커피를 나눠 마시듯, 우리는 잠시 큭큭 웃으며 작게 공감을 나누고 다시 각자의 업무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편집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난 도봉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쳐진 검찰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야근을 하다 말고 나와 청사 앞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대뜸 책을 내보자고 했다. 그가 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이런 제안을 하는 건지 나로서는 의아했다.(그때 그는 내가 쓴 1천자짜리 칼럼 하나를 달랑 읽었을 뿐이었다.) “제가요? 책을요?” 묻는 나에게 “네, 사람들이 검사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거예요”라고 확신에 찬 말투로 그는 답했다. 뭐지? 사기꾼인가?
다행히 사기꾼은 아니어서 얼마 뒤 나의 첫번째 책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래저래 세상을 향해 이야기를 내어놓는 이야기꾼 검사가 되었다.
제법 능숙하게 이야기꾼 행세를 해내다가도 문득 멀미가 나는 날들이 있다. 침묵하는 법을 오래 훈련받은 자의 울렁임이다. 그런 날은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젊은 편집자를 만난 밤 홀로 곱씹던 의문들을 다시 마주한다. 검사인 내가 세상을 향해 내어놓아도 좋을 이야기가 있을까.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지리멸렬한 인간 군상들과 그 옆을 서성이며 뒤척이는 나의 망설임뿐인데, 그런 것들도 세상에 나가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쉽게 내가 본 수많은 사건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수없이 밀려오던 사건들 속에 웃기고 슬프고 아프던 이야기들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데 그중 어떤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에 나는 번번이 말문이 막힌다. 나는 누군가의 생의 한순간에 벌어진 일들 중 범죄가 되는 부분만 가려내는 일을 하는 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에 대해, 사연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겨우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이야기들 옆에 서 있었던 나에 대한 이야기다. 내 좁은 시야로 더듬어본 책상 너머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고, 늘 조금은 주저하면서도 단단하고자 했던 나의 표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것들도 세상에 나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겨우 밥벌이를 하고 사는 자의 이야기를 다시 조심스레 시작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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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속 청년사업가의 실재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이미 여러 건의 사기죄로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는데, 과거 동업자였던 이들로부터 추가 고소를 당했다. 그를 조사하기에 앞서 나는 이전 사건기록을 꼼꼼히 살폈다. 기록 속에 담긴 과거의 시간 속에서 그는 전도유망한 청년사업가였다. 적어도 남들에게는 그렇게 인식됐다. 돈 한푼 없었지만 창의적인 아이템과 공격적인 실행력으로 투자자를 모았다. 화려한 언변과 세련된 매너가 그의 말끝에 투자를 불러왔다. 사업은 무섭게 일어났고 한때 그는 동업자에게도 투자자에게도 영웅이었다. 물론 모든 일들이 틀어지기 이전의 일이다. 성공의 신화가 물거품처럼 사라진 자리에 마침내 형체가 드러난 그의 거짓말들이 고스란히 고소장에 담겨 내게 왔다. 고급스러운 캐시미어 코트 차림에 차분한 분위기의 명품 안경을 쓴 패기만만한 젊은이의 사진이 기록 속에 편철돼 있었다.
문이 열리고 수의를 입은 남자가 교도관들에 이끌려 검사실로 들어섰다. 내 앞에 앉은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불안해 보였다. 몸체를 작게 웅크리고 앉아 두리번거렸다. 무엇을 물으면 한번에 알아듣지 못했고 입을 조금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리를 달달 떨었다. 교도관으로부터 그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연락을 미리 받았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남자의 상태는 더 좋지 않았다. 조사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힘들어 보이니 다음에 다시 조사 일정을 잡자고 제안하면 그는 한사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진술하겠다고, 진술할 수 있다고 단호히 말했다. 이미 형을 받은 사건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사건에 대해서만은 정말로 할 말이 많다고 하며 흔들리던 눈빛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자신의 사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일관되게 부인하고 있었으나 조금씩 아귀가 맞지 않는 진술들이었다. 무언가 잔뜩 메모한 종이들을 어수선하게 들고 있었으나 대답에 필요한 정보를 쉽게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에게 불리한 질문을 하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교도관으로부터 건네받은 약을 손을 떨며 삼켰다. 기록 속에서 내가 보았던 눈빛이 형형한 젊은이의 모습은 거기에 없었다. 그는 누구인가. 어느 쪽이 진짜 그인가.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대구지검 상주지청장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 정명원이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과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